일본기원에서 출판되는 월간 바둑월드 7월호에 '일본과 세계의 바둑' 이라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일본 바둑의 현주소를 냉철히 바라보고 반성과 회고의 시간을 갖고 발전방향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의 기사인데, 이번 월간 바둑월드 8월호에도 속편의 기사가 올라왔다. 예전에는 약한 일본 바둑에 관한 면피성 기사가 주종이었던 것에 비해 이 기사는 솔직함을 드러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8월호에 소개된 기사로 류시훈 9단의 의견을 피력하는 내용을 발췌해 보았다.
14세에 도일한 후 처음 일본바둑을 접했을 때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좀 있었다. 원생들 사이에서 "OO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것이다. 나는 바둑이 자신의 수읽기와 감각을 바탕으로 해서 전개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선생님의 말씀이라 해도 '왜 쉽게 타인의 생각을 그대로 수용하는가?' 에 대해 의문을 가지곤 했다. 동시에 "여기서는 이렇게 두는 한수"라는 등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초반에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라고 의문을 품기도 했다.
바둑에 해박하면 이런 단정적인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확실히 해박함이라는 것은 일본바둑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해박함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유구한 역사의 소산이기에 이점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틈엔가 해박함 자체만 강조되어 바둑의 기초체력 혹은 기초 근력에 해당하는 수읽기라는 분야가 경시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나는 자신의 착수나 의견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 바둑에서 이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OO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모양이 좋을 리가 없다" 등등 수읽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두어 버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산인지? 나로서는 '사고의 방치' 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자세가 한국바둑에 뒤지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국의 젊은 기사들은 자신의 수읽기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 비밀을 푸는 열쇠를 작년 여름 일본 젊은 기사들을 데리고 한국에서 합숙을 했을 때 알게 됐다. 한국의 권갑룡 7단이 운영하고 있는 바둑도장에서 꽤 많은 프로가 배출됐다. 이세돌 9단이나 최철한 9단도 이 도장 출신이다. 우리들은 합숙중 이 도장 원생 및 원생 출신 프로기사들과 같이 공부할 기회가 있었는데 커리큘럼 중 사활문제 풀이가 있었다. 학교시험과 비슷하게 인쇄된 문제가 출제되어 2시간 이내에 풀게끔 하는 것으로 레벨은 꽤 높았다. 일본의 젊은 기사들은 상당히 고전했으나 한국의 원생들은 척척 풀어나갔다. 최철한 9단보다 많은 정답을 낸 원생이 있을 정도였다.
권갑룡 7단은 '수읽기가 있고나서 감각' 이라는 주장의 소유자다. 어쨌든 철저하게 수읽기를 훈련시키는 곳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권7단의 생각은 한국바둑계의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이렇게 철저하게 수읽기에 단련된 자만이 프로가 되어 이창호 9단이나 이세돌 9단 같은 정점의 프로기사들에게도 이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하 중략)
일본바둑계에도 전형적인 예가 장쉬 9단이다. 그의 바둑은 철저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하는 바둑이다. 수읽기에 자신을 가지고 있으며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실전적인 기풍이다. 한국의 바둑 스타일과 굉장히 닮아있다. 물론 세계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일본바둑도 이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더 근원적이고 실전적인 부분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