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바둑 강국 한국, 중국, 일본은 치열한 연구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예전에도 각국은 국가대표팀 혹은 연구회를 중심으로 포석을 연구해 뒀다가 비장의 카드로서 실전에 활용했는데, AI의 등장 이후엔 더욱 연구할 게 많아졌다. 연구가 많이 되어있을수록, 대비가 잘 되어 있을수록 실전에서 유리한 건 당연하다.
한데 미래의 수법만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재해석하는 작업도 활발하다. 없어졌던 정석도 다시 꺼내어 먼지를 떨어내고서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살펴보는 작업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복고풍 포석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예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개량하고 조합하고 창조한다. 복고풍 포석이 나올 때면 과거와 미래가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프로기사들의 복고풍 포석(혹은 정석)을 둘러싼 연구 전쟁을 AI로 추적해 봤다.
▼ 흑1은 사카다 에이오나 후지사와 슈코 같은 인물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유행하던 수들이다. 수백년 전에도 썼다. 하지만 현대바둑에선 사라졌다. 그랬던 이 소목 한칸협공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바둑 이론연구에 AI를 활용하면서 과거 정석을 재평가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험 중인 것인지, 아니면 유력한 변화를 발견해서인지는 모르겠지면 어쨌든 유행을 탈 조짐이다. 지금 변화는 지난 27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월드바둑챔피언십 국제예선 4회전에서 중국 구쯔하오 9단(흑)과 중국 스웨 9단이 둔 바둑이다. 즉 흑1은 구쯔하오가 시도했다.
▼ 흑의 한칸협공이 사라졌던 건 백1이 워낙 강력한 대응이어서였다.
▼ 흑1~8까지가 정석이었다. 흑과 백은 서로 한점씩을 제압한 모습인데, 흑이 좀 더 불만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흑한점이 백8에 너무나도 깔끔하게 제압되었고 발전성 면에서 백이 월등히 앞선다는 것이었다. 한쪽에 일방적으로 좋은 결과라면 자연스럽게 그 정석은 사라지게 된다. 이 정석은 그렇게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 AI는 정석이 바뀌었다고 강조한다. 흑1과 백2의 위치는 한줄씩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엔 A, B로 3선에 있었는데, 옛정석을 업그레이드 시켜 4선으로 올려놨다. 4선은 19줄 바둑판에서 그 어느 선보다 효율성이 있다고 알려졌다. 인공지능은 그것을 말하는 것일까.
▼ 인공지능이 왜 정석을 바꿨을까 생각해 보고자 한다. 흑2로 밀어갈 때가 문제다. (이렇게 밀 때 흑세모는 A의 곳보다 도움이 되는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막상 흑1을 밀어오면 백은 고민에 빠진다. 묘하게도 받는 자세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백2로 받으면 이하 6까지 진행해야 할 텐데, 흑세모를 제압한 백세모의 자리가 불만스럽다. 백은 좁은 공간에 중복투자가 되어 있다. 흑은 백을 힘껏 누른 뒤 유유히 7의 곳으로 향할 것이다.
▼ 도중에 백1로 젖혀도 크게 다를 게 없다. 흑2로 끊어둔 뒤 이하 12까지 흑세가 더 웅장해질 뿐이다.
▼ 흑세모자리로 밀 때 백이 하는 수 없이 손을 빼어 백1로 향하면 흑2, 4로 백을 철저히 누르는 자세가 좋다. 이하 8까지 흑이 우세한 변화다.
▼ 이 정석의 핵심은 변이 아니라 중앙에 있다. X의 곳은 요처 중 요처다. 실전에서 구쯔하오는 흑1로 3선에 두었고, 스웨는 백2로 두었다. 얼핏 스웨의 연구가 잘 되어 있는 듯도 보인다. 그런데 백2는 여전히 아쉽다.
▼ 백2로 즉각 미는 게 좋았다. 지금 흑1이 3선으로 처져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다. 이 정석의 핵심은 여전히 중앙에 있다. 다음 그림을 본다
▼ 흑은 달리 둘 수가 없고 흑1로 늘어야 하는데, 이하 백2로 밀어붙인다. 흑은 다시 3으로 두어서 우변을 돌봐야 하는데, 이하 흑8, 9까지 교환을 한 뒤 백10~14로 진행하면 백이 확실히 우세하다.
▼ 이런 이유로, 흑세모가 지금처럼 4선에 위치한 것은 의미있다. 백1로 밀고자 하면 흑2로 받아 호구 자세를 갖출 수 있다.
▼ 흑은 나중에 A, B에 두는 기분 좋은 후속수단이 있다. 백 역시 C의 곳에 두는 후속수단이 있다.
▼ 당장 둘 수도 있다. 흑1은 백2와 교환해 변에 도움이 된다. 흑3은 4로 받게 해 거꾸로 날일자를 당하는 것과 비교해 쏠쏠한 끝내기를 한 결과다.
▼ 백으로선 흑11로 젖히는 타이밍에 백12로 둘 수 있다.
▼ 흑세모와 백세모를 언제 결행할지는 배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 AI가 제시하는 '모범 포석'이다. 우하 정석 이후 좌하에서 자연스런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다.
▼ 또 다른 대국이다. 24일 제3회 월드바둑챔피언십 국제예선 1회전에서 박영훈 9단(흑)과 일본 시바노 도라마루 7단이 둔 바둑이다. 시바노 도라마루가 백2로 협공했다. 일본에서도 사라진 정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박영훈은 직접 대응하지 않고 손을 빼어 흑1로 걸쳤다.
▼ 흑세모에 백1로 받아주면 그때 흑2로 눌러가겠다는 뜻이다. 걸쳐둔 흑세모가 좌변 싸움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 그것을 의식해서인지 시바노 도라마루는 백1로 흑한점을 제압해 둔다. 백1은 굉장히 특이한 수인데, 백1의 곳은 인공지능이 가장 유력하다고 추천하는 자리다. 잘 이해하기 쉽지 않다.
▼ 이 부근을 수나누기 해보면, 백의 두칸굳힘 속으로 흑1이 침투했는데 백이 2로 느슨하게 받은 꼴이다.
▼ 인간의 감각이라면 백1로 두는 정도인 것 같은데... 아마도 인공지능은 외곽을 차지하는 게 지금의 백1보다는 낫다고 보는 모양이다.
▼ 참고로 흑한점을 제압하는 방법으로서 백1은 좋지 않다.
▼ 흑1로 찌르는 게 따끔하기 때문이다. 죽 진행되어 흑5로 끊는게 간명하면서 좋은 수다.
▼ 백1로 막아야 하는데, 이하 7까지 사석작전을 펼친다.
▼ 이하 5까지 흑이 넓은 바둑이다.
▼ 실전진행이다. 백18까지는 호각. 이 다음 한 수가 중요하다.
▼ 흑1이 박영훈이 선택한 수. AI는 흑1을 칭찬했지만 흑3에는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이하 6까지 보듯 백이 양쪽으로 집을 튼실하게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흑은 별다른 활약이 없어서다. (실전에선 시바노 도라마루가 백6 대신 A를 택했는데 이후 박영훈이 중앙에서 힘을 발휘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 AI는 흑1을 추천했다.
▼ 백1, 3으로 차단해 온다면 -
▼ 어디서 본 듯한 전개가 된다. 처음에 보았던 변화다. 거의 호각이긴 하지만 흑이 넓은 바둑이다.
▼ 백1은 거의 정수인 듯한데, 흑2~12까지 백진을 깨끗하게 도려내어 만족스럽다. 흑이 약간 기분 좋은 형세가 된다.
▼ 시바노 도라마루는 무엇을 연구해 놓았던 걸까? 백1이었을까? 백1로 차단하는 게 까칠해 보이긴 한다.
▼ 흑에겐 1이라는 타개책이 있다.
▼ 백1로 젖힌다면 이하 6까지 흑은 순조롭게 수습하게 된다.
▼ 백2로 둔다면 이하 흑5까지 준동한다.
▼ 백1부터는 백의 공격인데, 이하 12까지 접전이다.
▼ 애초에 좌상 변화에서 각기 독자적으로 연구한 수가 부딪혔을지도 모르겠다. 흑2, 백3, 흑4 같은 것들.
▼ 두 사람은 백2, 백12, 흑11, 백14 같은 수로 '연구 전쟁'을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 왜 연구가 더 필요하냐 하면, 가령 흑1로 반발하는 수가 어떻게 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이후 예상수순은 그저 영화감상하듯이 보겠다.
▼ 이하 9까지 진행.
▼ 이하 6까지 진행.
▼ 이하 11까지 진행.
▼ 이하 13까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변화 중의 하나다. (참고로, 지금의 변화는 백이 우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