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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윤이 해냈다!

아직 8강전인데도 불구하고 팬들의 반응은 마치 결승에서 커제를 꺾고 우승한 것마냥 열광했다. 현지 검토실의 분위기도 들뜨기는 마찬가지. 그만큼 커제 9단이 난적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장면이다.

상대전적에서 다소 앞서 희망을 걸었던 김지석 9단이 스웨에게 졌고, 복병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 원성진 9단 또한 제일 먼저 퉈자시에게 꺾였다. 박영훈과 강동윤 9단이 4강에 진출해 이제 2:2의 한중전. 강동윤-스웨, 박영훈-퉈자시의 대결로 압축됐다. 준결승전은 이틀 뒤 11월18일 오전9시부터 같은 장소에서 펼쳐진다.

8강전의 영웅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의 강력한 일인자로 떠오른 커제 9단을 시원하게 눕힌 강동윤 9단이다. 모든 승부가 그러하듯 이긴 자는 남고 진 자는 보따리를 싸야 한다. 이긴 자는 환호하는 팬들 앞에 서서 포효하고 진 자는 등을 보이며 무대 뒤로 사라지는 법이다. 강동윤은 남아 4강 대진을 추첨했고 커제는 내일 당장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알아봤다.

▲ 강동윤이 해냈다! 준결승에서 만날 상대도 중국바둑의 최강, 스웨 9단이다. 난적이란 난적은 혼자 도맡아 해결하고 있는 느낌이다. 승부세계에서 결승에 가까울수록, 어차피 맞닥뜨려야할 강자들이긴 하다. 피할 수 없는 대결이라면 멋지게 이겨주면 된다. 그뿐! 2009 후지쯔배 우승처럼 한번 더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거야! 파이팅 강동윤! 어게인 2009!

‘백번 필승’을 달리고 있는 커제가 어찌하여 흑을 선택했는지, 가장 궁금한 대목이었다. 대국에 들어간 직후 왕레이 감독조차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진 자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건 상처를 덧내는 일이라 차마 그러진 못하고 대진추첨 직전에 승자 강동윤 9단에게 몇마디 건넸다.

- 왜 커제가 백을 쥐지 않았을까요? 의외라고 생각진 않았나요?
“아뇨...그럴 수 있다고 봤는데요. LG배는 덤이 6집반이니까...흑이나 백이나 별 차이 없다고 본 거겠죠.”

- 중국룰보다 덤이 한집 적은 6집반에 제한시간 3시간 장고바둑이라는 점도 작용했을까요? 중국내 기전에서는 덤이 한집 더 많으니까 아무래도 백을 선호했을 거고, 백번으로 더 많이 이기지 않았을까요?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제한시간은 별로 상관은 없다고 보고요. 중국룰이 덤 7집반이라 해도(설령 중국에서 거둔 백번 승리가 많다고 해도) 백번 32연승은 엄청 대단한 기록이지요.”

- 그럼 강동윤 9단에게 흑백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상대의 백번을 의식해 백을 쥐려고 했나요?
“(단호한 어조로) 아뇨. 흑을 잡았을 겁니다. 덤 6집반이면 커제 9단도 아마 흑이 판을 짜기 편하다고 생각해 그랬을 겁니다.”

(김성룡 9단의 조사에 따르면, 커제 9단은 올해 공식기록 60전 48승12패 가운데 백을 쥐고 32승 연승을 달리고 있다. 흑으로는 16승12패. 백을 쥐면 무적이라는 얘기다. 커제 자신도 인터뷰에서 “덤 7집반이면 무조건 백이 좋다고 생각한다. 6집반의 덤으로도 백이 편하다”고 말한 바 있다.)

▲ 강동윤 9단에게 진 뒤 커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그렇게 보였으나) 다른 때와는 달리 좀 상기돼 보였다. 지리라 생각진 않았던 듯하다. 대국장을 나서기도 전에 중국통역원에게 중국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비행편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진 자는 떠날 수밖에 없긴 하다.

커제 9단을 보다 보면 ‘귀여운 악동’을 연상케 한다. 톡톡 튀되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성, 시원시원 거침없는 언변(그렇지만 독설은 아닌)과 기묘한 행동, 분명 묘한 캐릭터인 것만은 맞다. 타고난 성격에서 우러나는 것이건 자신감에서 기인하는 것이건 바둑팬들은 실로 오랜만에 ‘스타성’이 철철 넘치는 승부사를 만났다.

강동윤 9단에게 지고 난 뒤의 행동도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았다. 한참 복기를 하고 그래도 아쉬웠는지 기록자석에 앉아 사이버오로에 저장된 기보를 한참 검토한다. 여기까지는 다른 기사에게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고선 대다수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대국장 밖으로 나가든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부터 복기도 하는 둥 마는 둥 상기된 표정으로 서둘러 자리를 떠나기 마련, 자기바둑을 두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뿜어져 나오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커제의 다음 행보는 좀 달랐다. 문득 배가 고팠는지 천연덕스럽게 간식 테이블에 놓인 컵라면을 하나 부욱 따서 온수를 채운 다음 온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다시 두껑을 닫고 나무젓가락을 가지런히 위에 얹는다. 그러고선 면발이 익을 때까지 다시 복기하는 기사들 판으로 와 지켜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부리나케 돌아가 맛있게 라면을 먹는다. 후르룩 후르룩 면발을 빨아들이는 소리도 요란하게. 남의 눈은 의식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정면에서 라면 먹는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기자정신 발휘’에도 정도가 있기에 차마 그렇게 모질게까지 할 수 없었다.)

▲ 패배 이후 커제 9단의 동선을 찍었다. 참으로 맛이 없었을 라면을, 기자가 보기엔, 참말 맛있게 먹는 모습이었다.

오늘 한국바둑은 강동윤의 분전으로 흡사 ‘백만대군’처럼 다가왔던 커제공습을 막았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 성장기세대로라면 커제의 공습은 향후 몇 년간 쓰나미처럼 밀려올 것이다. 한국바둑을 이끌던 간판스타 이세돌이 서른 중반에 접어들며 전성기를 지난 듯하고, 김지석이 정상에 선다 싶다가 하락세에 빠졌는데 세대교체의 선봉장인 박정환은 여전히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엉거주춤한 사이에 커제바람이 느닷없이 불어닥쳤다. 필요 이상 불안하고 초조해진 건 이 탓이다.

일단 LG배 대진표에서 커제는 8강에서 멈췄다. 그렇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기록이 실력을 말해주고 있다. 커제는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강자가 아니다. 국내외 프로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커제가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지 않을 때에도 머지않아 가장 껄끄럽고 가장 대적하기 어려운 ‘괴물’이 될 것이란 사실을. 고수가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며 승부사는 일합을 겨루지 않아도 감으로 안다. 커제는 이미 준비된, 예고된 승부사였다. 지난 삼성화재배 준결승 3번기에서 한국의 프로들은 이세돌 9단이 이겨주기를 ‘기대’ 했지 ‘이긴다’고 장담한 기사는 거의 없었다. 대놓고 입밖으로 발설할 수 없었을 뿐이다. 승부의 기세란, 흐름이란 이런 것이다.

모 9단이 말했다. 이창호시대 이후 수읽기가 깊으면서 타고난 감각을 가진 기사로 이세돌과 구리, 커제, 그리고 박정환을 꼽는다고. 앞의 3명과 구분하여 ‘그리고’란 접속어 다음에 박정환을 거명한 이유는 ‘임기응변’이 뛰어나냐 아니냐의 차이다.

이세돌, 구리, 커제는 수읽기 자체도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센데 여기에 천부적인 감각, 맹수처럼 번뜩이는 감각이 빛나고도 빛난다. 감각은, 그렇지만 때로 불확실하고 모호하기도 한 것이어서 최선이 아닐 때가 있다. 이럴 때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최선의 길로 잡을 수 있는 임기응변이 절실한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박정환은 뒤처진다. 알기 쉽게 말하면 앞 3명의 바둑은 초반에 불리하더라도(설령 망했더라도) 그냥 지는 법이 없다. 지더라도 상대를 엄청 고생시킨다. 이에 견주면 박정환의 바둑은 그대로 지는 편이다. 모 9단은 물론 3명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그렇다는 단서를 붙였다.

종반 커제의 1집반 패국이 확정적인 상황에서 검토실에서 지켜보던 김영삼 9단에게 물었다.
“커제의 약점이 끝내기인가 보네요?”
“다 센데 상대적으로 끝내기가 그렇죠.”
“끝내기는 비교적 타고 나는 재능보다는 경험이 쌓이면 느는 부분이니, 아직 나이 열아홉, 더 강해지겠군요?”
“초중종반을 놓고 볼 때 상대적으로 가장 빨리 늘 수 있는 부분이 끝내기죠. 박영훈을 전담교사로 붙여주면 단기간에 늘 텐데...(웃음)”

마침 일주일 뒤 몽백합배 4강에서 박영훈 9단이 커제와 마주한다. 종반의 박영훈, 끝내기의 박영훈이니까 어쩌면 커제가 가장 곤혹스런 스타일일 수 있다. 여기서 커제가 또 진다면 가팔랐던 기세가 수그러들어 당분간 주춤댈지 모르지만, 중국바둑이 커제 이후 2000년대 태생의 수많은 영재들이 대기하고 있다고는 하나 커제만한 천재가 당장 안 보이는 지금, 잠시 지체할지언정 주머니속의 송곳은 반드시 삐져나온다.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 20회 LG배 4강은 이제 2:2의 한중전, 강동윤-스웨, 박영훈-퉈자시의 대결로 압축됐다. 준결승전은 이틀 뒤 11월18일 오전9시부터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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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긴자는 남고 진자는 떠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