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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한화이글스 야구단에서 4월8일을 ‘미생의 날’로 잡았을 때, 왜 이날이었을까, 궁금해하는 이가 있었다. 4월의 4는 ‘죽을 사(死)’자를 말하며, 8일의 8은 바둑판 2선에서 8번을 밀어야 산다(活)는 데 착안해 바로 이날을 잡은 게 아니냐며 제법 심오하게 추리하는 이도 있었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명성(제목)을 빌린 게 자명했지만, 하고 많은 날 중 4월8일을 택한 연유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하는 이라면, 어쨌거나 ‘미생(未生)’은 바둑의 사활(死活)과 연관된 용어이니까 이런 발상을 할 법도 하다.

○● 조훈현, ‘미생의 날’ 시구 ☜ 뉴스보기 클릭

프로야구경기 시구(始球)는 주로 ‘섹시 컨셉’으로 간다. 대중의 관심과 시선을 끌만한 인기 여자연예인을 내세우는 것이 흥행 면에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화이글스가 젊은이들에게 익숙지 않은 바둑을 대전 한밭 마운드에 올렸다. 역시 인기드라마 ‘미생’의 후광인가, 싶었는데 내막이 있었다.

한화이글스의 박찬혁 마케팅1팀장과 한국물가정보의 노승권 대표이사가 막역한 친구 사이라는 사실. ‘한국물가정보배’를 지난 10년간 주최하다 잠시 중단하고 올해부터 한국바둑리그에 참가하는 바로 그 회사의 그 대표이니, 바둑에 대한 차고 넘치는 애정이 한화이글스의 마케팅팀장에게 ‘요즘 미생이 대세이니 바둑스타를 시구자로 모셔보라’는 아이디어를 건넸을 테고, 마케팅 전문가의 감각이 ‘미생의 날’이란 홍보문구를 단숨에 뽑아냈을 것임은 ‘안 봐도 비디오’.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이 4월8일 LG-한화 전 시구자로 나서게 된 내막이다.

▲ 조훈현 9단을 반갑게 맞이하는 박찬혁 한화이글스 마케팅1팀장(가운데). 오른쪽 서 있는 이가 노승권 한국물가정보 대표이사다. 한화구장의 '미생의 날'은 두 사람의 아이디어로 성사됐다.

조훈현 9단의 시구는 이번이 두 번째다. 1998년 잠실운동장에서 두산베어스의 시구자로 나선 바 있다. 그때는 바둑스타로서 개인적(두산 팬)으로 섭외 받아 던졌고, 이번은 한국기원 공식루트를 통해 한국바둑 대표로 시구했다는 점이 다르다. 바둑(미생)의 날이니 만큼 동행 기사들도 많았다. 유창혁 국가대표팀 감독을 비롯한 국가대표선수들과 프로기사야구팀 ‘기(棋)’팀 선수들, 이창호, 김지석 9단 등 한국바둑의 별들이 대거 움직였다. 한화이글스에서는 1군 전용버스 두 대를 한국기원으로 보냈다.

▲ 한화이글스 1군 선수들이 타고다니는 전용버스. 조훈현 9단을 비롯한 한국기원 기사들은 한화구단에 제공한 이 버스를 타고 대전을 다녀왔다.

[대전으로 가는 버스에서]
(기자) “두번째 시구이긴 한데 17년 전에 하신지라...따로 연습 좀 하셨나요? 스트라이크 넣을 자신이 있으신지요?”
(조훈현 9단) “스트라이크? 그거야 100%지. 타자가 무조건 휘둘러 주걸랑.”
(기자) “에이~, 질문 요지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조9단) “그러면(스트라이크를 팍팍 던질 정도면) 내가 야구선수했지 바둑 뒀겠어?”

그러면서 버스 뒤편을 휘휘 둘러보다가 국가대표팀 총무인 김현아 아마5단과 송혜령 초단 등 여자기사들을 발견하고선 근처에 앉은 유창혁 감독을 바라보며 농을 건넨다.
“벌써부터 호흡 맞추나? 박지연은 안왔네, 에이~”
(곧 본선을 시작하는 5기 SG배 페어바둑에서 유창혁 9단은 김현아 아마5단과, 송혜령 초단은 이날 동행한 김세동 5단과 짝이다. 조훈현 9단의 파트너인 박지연 3단은 안 왔다.)

▲ 한화이글스의 홈구장인 대전 한밭야구장에 도착. 일찌감치 야구장에 온 야구팬들 관심집중. "이따가 조훈현 9단 사인회 있는 거야?"

▲ 한국바둑계의 무시무시한 유단자들이 대거 떴다!

오후3시에 한국기원에서 출발한 버스가 대전 한밭야구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5시.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스카이박스석으로 올라갔고, 경기 시작 전까지 김지석, 이지현, 안국현, 송혜령, 이영주 프로가 한화 팬들과 지도기를 두었다. 한화이글스에서 바둑을 좋아하는 한화 팬을 초청했고, 지도를 해준 프로기사들에게는 김태균 선수의 사인볼을 기념으로 선물했다. 조훈현 9단을 비롯한 프로기사들을 위해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박스석(VIP 관중석) 두 동을 비워두었고, 푸짐한 다과와 음료를 서비스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 한화이글스 팬 초청 지도다면기.

▲ 국가대표팀 주장 김지석 9단의 지도기 모습. 국가대표팀 가는 곳엔 사이버오로가 함께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바둑에서 번 돈은 바둑계에 피드백' 하고자 애쓰는 사이버오로이기에 인터넷사이트 중 유일하게 국가대표팀을 지원하고 있다. 국가대표팀은 유니폼에 사이버오로의 로고를 스스로 부착해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 '미생의 날'에 생일을 맞은 이영주 초단. 김태균 선수의 사인볼을 들어보였다.

스카이박스석에서는 마침 이날 25번째 생일을 맞은 이영주 초단을 위해 동료기사들이 케이크를 준비해 와 축하했다. 여자바둑리그에서 인제하늘내린팀 3지명으로 뛴 이영주 초단은 결정적일 때마다 한방을 터뜨리는 만점활약을 보였다. 국가대표팀에서 공부하면서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다는 말을 듣고 있다.

이창호 9단은 노승권 한국물가정보 대표이사의 승용차로 왔다.
(기자) “이국수도 프로기사야구단 기팀 일원이었지요. 포지션이 어디였죠?”
(이창호 9단) “경기에 나간 적이 없는데 무슨 포지션이 있었겠어요?”
(기자) “방망이 들고 타석에 들어선 사진도 봤는데...”
(이9단) “대타로 딱 한번...그게 유일한 출전이었지요. ^^;;”

경기장의 꽃이라 말하는 치어리더들과 기념촬영도 했다. 관계자가 경기 전 스카이박스석을 일부러 찾아온 치어리더들과 기념사진 한장을 제안하자 조훈현 9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특유의 쾌속행마로, “당연히 찍어야지.”

처음엔 유창혁 감독, 김지석 국가대표팀 주장과 다함께 ↑요렇게 나란히 점잖게 촬영했다. 일단 한 장을 찍은 후,
(유창혁 감독) “남자 셋이서 가운데 나란히...이거 영 그림이...지석아 잠깐, 이번엔 저희 둘 빠지고 조국수님만 치어리더들과 한 컷 더 찍으시죠?”
(주변에서) “팔짱도 좀 끼고 화기애애하게...”
(기자) “팔짱까지...이거 기사 나갑니다. 이러시다 황후마마(조9단의 부인 정미화 씨)께 혼나면 어떡하시려고...”
(조9단) “오늘은 허가받았잖아, 공식행사라고! 매일 시구 좀 하게 해주면 안될까?”

▲ 치어리더들과 단독 한 컷!

바둑황제가 한밭벌에 납시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 직전 허구연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방문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허구연 해설위원) “오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올라오는 건데...참, 프로기사야구팀도 있잖아요?”
(기자) “기팀입니다. 지난 4월5일 사회인야구리그에서 참가 10년 만에 마침내 우승했지요.”
(허 해설위원) “어? 그래요? 프로기사들 대단하군요.”

허구연 해설위원은 바둑은 둘 줄 모르지만 조훈현 9단과 사적인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날 중계방송 중 조훈현 9단이 휘호한 부채를 펼쳐보이며 ‘바둑의 날’에 대해 특별히 소개하기도 했다. 조훈현 9단의 휘호부채는 선착순 입장객 500명에게 특별선물로 증정되었다.

▲ 이창호 9단이 유니폼 입는 걸 도와주고 있는 박찬혁 마케팅팀장.

6시30분 경기를 20분쯤 앞두고 유니폼으로 갈아입기 위해 이동했다. 노재덕 한화이글스 단장이 손수 유니폼 착용을 도왔다. 조훈현, 이창호 9단의 사인판도 전달했다. 알고 보니 노재덕 단장은 ‘오로’에서 바둑을 즐기는 애호가였다.
(노재덕 단장) “오늘 바둑의 전설들을 만나 영광입니다. 휘호 합죽선과 선물로 받은 바둑판은 가보로 대대로 보관하겠습니다.”

▲ 이창호 9단이 휘호한 사인 바둑판을 받고 기뻐하는 노재덕 한화이글스 단장. 사이버오로에서 바둑을 즐기는 회원이다.

▲ 한국바둑의 별, 조훈현- 이창호-유창혁 트리오가 한화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다.

조훈현 9단의 등번호는 7번, 유창혁 감독은 8번. 그런데 이창호 9단은 껑충 뛰어 88번이었다.
(유창혁 감독) “조국수님께서 7번 하셔서 전 그 뒤 번호로 해야 하는 걸로 알았는데, 그런데 이국수는 확 올라가네.”
(조9단) “오우~, 88! 팔팔한 젊음에 대한 희망을 담은 번호인가.”
(노재덕 단장) “야구선수도 몸관리를 잘하면 마흔두세 살까지는 뜁니다만 대부분 그 전에 은퇴하죠. 요즘은 바둑도 조로하더군요. (이창호 9단을 보며) 제 희망사항이랄까, 팬으로서 기대가 있다면 다시 한번 타이틀을 따셔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조9단) “아, 그런 좋은 말씀은 저한테 해주셔야죠...”
(주변에서) “조국수님은 여전히 시니어전 휩쓸고 계시잖아요!”
일동 폭소.

5분전 운동장 입구에 대기. 선수소개에 이어 애국가 제창. 6시28분, 드디어 마운드에 올랐다. 손을 흔들며 등장하는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세명의 ‘반상영웅’에게 관객들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으로 맞았다. 조훈현 9단은 크게 와인드업, 여유 있게 공을 뿌렸다. 공은 좀 높게 들어왔지만 기막힌 투구폼이었다. 투수가 던지는 거리는 18.44미터지만 시구자들은 보통 10~12미터 지점에서 던진다. 조9단은 5미터쯤 앞에서 던졌다.
(운동장 입구에서 함께 대기하고 있던 양재호 한국기원 총장) “땅볼로 안 던져서 다행이네.”

▲ 조훈현 9단이 이창호, 유창혁 9단과 함께 마운드 올라 시구를 하고 운동장을 나설 때까지의 장면들.

시구 경험이 있는 조훈현 9단이지만 “겉보기엔 투구거리가 짧아 보여도 막상 서 보면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마운드가 우묵 솟아있어 더욱 익숙지 않다보니 제거리에서 던질 욕심을 부리다간 공이 도달하지도 못하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며 애초에 좀더 앞에서 던질 작정을 하고 있었다. 높게 공이 들어온 건 낮게 제구하다가 까딱 땅볼이 나올까 걱정해 그리했던 듯하다.
운동장 출구로 들어오며 기자와 눈이 마주친 조9단이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던진다.
“휴우~, 땅볼 안 던졌다!”

▲ 드디어 한화-LG전 시작.

▲ 오늘만큼은 프로기사 모두 한화이글스의 팬이 되어.

▲ 야구장 전광판에 뜬 '미생의 날'

▲ 한국바둑의 날.

5회말이 끝나 운동장을 정비하는 클리닝타임에 바둑퀴즈 이벤트가 펼쳐졌다. 한화이글스의 요청에 한국기원 차영구 홍보팀장이 사전에 20문제, 정말로 정말로 아주 쉬운 바둑문제를 보내 두 문제를 골라 쓰라 했는데, 이마저도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며 손을 봐 낸 문제가 아래↓.

▲ 2번문제의 정답을 맞힌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정답을 대기 전부터 덩실덩실 기뻐 춤을 추었던 그는 바둑을 아는 외국인이었을까. 바둑황제를 어찌 알았을까.

▲ 전날 경기에서 연장혈투 끝에 4-3으로 '반집' 이겼던 한화이글스는 '미생의 날'에는 아쉽게도 2-3으로 반집 역전패했다.

▲ 그렇지만 한국바둑 승부사들은 9회말까지 한화이글스를 뜨겁게 응원했다.

▲ 한국야구 파이팅! 한화이글스 파이팅! 한국바둑 파이팅!

[현장취재/ 정용진, 사진/ 월간바둑 이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