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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동용 과학만화를 재미있게 봤다. 과학이란 게 어렵고 따분해 보인다고 해서 만화로 쉽게 풀어놓은 책 말이다. 천문, 물리, 생물 등 많은 주제를 다양하게 다루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미래세계는 어떻게 펼쳐질까를 상상하는 내용의 챕터가 가장 재미있었다.

거기에는 ‘미래엔 이런 것들이 만들어질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상상 속 산물들을 나열해 놓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용하다.

예를 들면 음악이나 영상을 테이프에 담지 않고 디스크 형태가 등장해 거기에 담을 것이라 내다봤고,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전 세계 책들의 정보와 학술 자료를 검색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예견했다. 그게 다 지금 살펴보면 CD, 하드디스크이며 인터넷 아닌가.

결과적으로 보면 상상은 척척 실현되고 있었다. 앞으로 그럴 것이 분명하다. 상상→가능(?)이란 도식은 상상=가능으로 변하는 듯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가 관건일 뿐.

인공지능도 그렇다. 초기 인공지능의 개념이 발표됐을 때 그런 게 가능하겠느냐고 부정적인 의견이 팽배했다고 한다. ‘어떻게 감히 기계가 생각한단 말이야.’

그러나 인공지능은 꾸준히 발달을 거듭했고 1997년은 인공지능 학계에서 지축을 뒤흔든 사건이 일어난다. IBM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체스황제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를 이겼다.

이게 17년 전 이야기이니 그동안 기술은 얼마나 많이 발전했나. 지난해 말, 체스계에선 은퇴하고 나이도 지긋해 져 한국을 찾은 체스황제 가리 카스파로프는 “내가 당시 컴퓨터에게 진 건 이미 오래된 사건이다. 이제는 흔한 개인용 노트북에 깔린 게임용 프로그램한테도 젊고 잘나가는 체스 마스터들이 지고 있다.”고 말했다. 체스 분야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뛰어넘었다.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바둑은 체스보다 훨씬 더 정복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행마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은 데다 가로줄과 세로줄이 만나는 점은 361개. 탐색해야 할 문제 공간은 무한대나 다름없고 반상에서 발생하는 경우의 수는 우주에서 가장 큰 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초기 버전 인공지능 바둑의 수준은 참 보잘것없었다. 프로기사는커녕 일반 바둑애호가들에게 많이 깔고도 졌다. 행마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장난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인공지능 바둑은 꽤 인간을 따라잡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최강의 인공지능 바둑은 일본에 있다. 일본 프로그래머 요지 오지마 씨가 제작한 ‘젠(Zen)’이란 프로그램은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들이 겨루는 여러 대회에서 25차례 우승 경력을 보유했다. 일본은 이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수년 전까지 프랑스, 미국, 북한 등이 바둑 인공지능 분야에 강세를 보였는데 다수의 프로기사가 소속된 일본기원의 협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일본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재작년, 이벤트로 진행된 본인방 출신 다케미야 마사키 9단과의 대국에서 흑을 들고 5점 접바둑(19×19)과 4점 접바둑으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화제를 모았다.

기자는, 이런 이벤트가 슈퍼컴퓨터 혹은 그에 준하는 하드웨어를 활용하는 환경에서 이루어지기에(딥블루의 경우 연산작동을 위해 가동된 컴퓨터가 잠실운동장을 채울만한 물량이라는 소리도 얼핏 들었다) 일반적인 상용 프로그램에서는 프로에게 넉점, 다섯점을 깔고 이긴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데 그렇지 않아서 놀랐다. 일본에서 발매되는 ‘젠’을 구입하여 노트북에 깔았다. 그리고 우리 프로기사, 연구생과 연구생 출신 아마강자들, 그리고 사이버오로 5ㆍ6ㆍ7단의 바둑회원들에게 19줄 바둑판으로 두루 대국 시켜 보았다.

바둑을 전문적으로 수련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고수’ 소리 듣는 사이버오로 5ㆍ6ㆍ7단들과 젠은 호선~두점 치수를 왔다갔다 했다. 젠에겐 제한시간 15초 1회를, 사람은 무한대로 시간을 주었다. 상용화된 젠은 120초 1회까지 제한시간을 늘려줄 수 있는데, 제한시간을 많이 허용할수록 수읽기 측면에서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프로기사와 연구생을 상대로 한 결과는 5점이 정 치수로 보였다. 6점접바둑이나 7점접바둑에선 사람 쪽 대마가 무수히 잡혔다. 프로기사, 현역 연구생, 연구생 출신 강자들의 반응은 칭찬이 많았다. “중반 수읽기가 훌륭하다.” “계가가 아주 정확하다.” “패싸움도 웬만큼 한다.” “중앙 감각이 좋다.” “끝내기가 약하다.” “공격해 올 땐 프로의 느낌이 난다.” “속임수에 잘 당하지 않는다.” 등의 평가가 주를 이뤘다. 일단 젠은 힘이 아주 좋다. 수상전에서의 수읽기는 놀랄 정도로 정확했다.

▲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과 기계의 본격대결, 제1회 바둑전왕전의 대국 현장.

사람과 기계의 바둑을 통한 두뇌싸움은 제법 볼만해졌다. 일본이 사람과 인공지능이 겨루는 바둑대회를 본격화하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공익재단법인 일본기원과 국립대학법인 전기통신대학이 후원하고 주식회사 DWANGO가 협찬한 제1회 바둑전왕전(電王戦)이 11일 도쿄 일본기원에서 시작됐다.

9줄바둑판(9×9)에서 호선으로 프로기사들이 젠과 3번기로 겨뤘다. 제한시간은 각 20분 30초 1회. 프로기사는 개발자의 집에 있는 컴퓨터를 네트워크를 경유해 인공지능 젠과 맞섰다.

결과는 프로기사의 완승이었다. 일본 바둑국가대표팀 감독이기도 한 대만출신 일본기사 장리요우 8단이 젠에게 2-0으로 이겼고, 나현 3단을 꺾고서 일본에서 주목 받았던 히라타 도모야 3단도 2-0으로 손쉽게 이겼다.

히라타는 두번을 모두 불계로 끝냈고 장리요우는 반집승 한번, 불계승 한번이었다. 완승이었다. 싱겁게 끝났지만 2회 대회엔 또 어떤 결과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순 없다. 이 대회는 16일 아마추어 대표와 젠의 대결로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 영국 캠브리지대 닐 투록 박사, 미국 프린스턴대 폴 스타인하트 박사처럼 우주의 나이를 1조년으로 보는 과학자도 있다. 바둑에서 일어나는 경우의 수를 우직하게 계산해야 한다면 현대 기술을 총동원해서 1조년의 1000제곱년을 탐색할지라도 단지 얼굴에 붙은 먼지(인체를 바둑의 문제 공간 전체라 할 때) 만큼을 아는 데 그친다고 한다.

알고리즘 분야의 권위자인 문병로 서울대학교 교수(컴퓨터공학부)는 “바둑과 관련한 인공지능 연구는 지금까지 거침없이 진보해 왔을지 모르지만 이제부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프로기사에게 석점을 넘어서 호선으로 가기까지는 100년이 넘게 걸릴지도 모른다.”고 전망한다.

100년은 우리의 일반적 기대보다는 긴 세월이다. 문교수의 이런 비관(?)적 전망의 근거는 이렇다 “문제공간의 탐색은 상위단계로 갈수록 어렵다. 하위단계에서는 가보지 않아도 될 공간을 쳐내는 게 쉽지만, 상위단계로 갈수록 가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그럴 듯한’ 공간이 많아진다. 그 확장은 아주 방대해서 또 하나의 우주가 다시 펼쳐진다고도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을 사람처럼, 그러니까 추상적 사고도 가능하도록 모델링하는 것도 난해한 과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문제공간을 모두 탐색해서 해결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는 것이다. 문교수는 “우직하게 경우의 수를 따지면서 문제공간 모두를 탐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 시대 가장 뛰어난 슈퍼컴퓨터에 10만개의 시피유(CPU)를 돌렸다고 가정할 때 1조의 1천제곱년이 걸려도 가볼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작은 영역뿐이다. 다시 말해 인체를 바둑의 문제공간 전체라고 한다면 얼굴 위의 먼지 하나 정도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문교수의 견해는 지금까지의 기술진보 속도를 감안했다는 전제가 깔린다. 극적인 기술의 혁명이 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버드대 출신 물리학자이자 컴퓨터 사이언티스트 알렉스 위스너 그로스(Alex Wissner-Gross)는 최근, 지능이 실제로 정적 속성이라기보다는 역동적인 힘이라 물리적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인과적 엔트로피력 관점에서 지능을 설명하면서, 궁극적으로 지능은 ‘행동의 미래 자유를 극대화하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알렉스는 인공지능 바둑이 지금처럼 발전한 것은 행동의 미래자유를 보다 극대화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덧붙이는데 이런 행동의 미래자유를 극대화하는 힘이란 관점에서 지능을 바라보면, 우리가 로봇을 발전시킬수록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세상을 전복시킬 가능성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기계가 반란을 일으키는 영화의 한 장면이 픽션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공지능 바둑이 인간을 추격해 올 때 슬쩍슬쩍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미래야 어찌됐든, 아마추어 유단자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젠'의 출현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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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의 천제곱년 지나도 먼지 만큼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