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이란 언제나 쉽지 않다.
실전에서 남들이 해보지 않은 수법, 가보지 않은 길을 중요한 순간에 선택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특히 이 한판이다 싶은 명운을 건 대국이라면 정말 ‘중요한 순간’이 틀림없을 텐데, 그때 사용했다면 굉장한 용기를 냈다고 볼 수 있다. 꼭,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 한판일수록 검증되고 안정된, 내가 아는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바둑리그 챔프를 결정하는 2013 KB리그 챔피언결정전 3차전 5국은 신안천일염의 강유택과 티브로드의 김세동이 맞섰다. 1, 2차전을 서로 주고받아 1-1로 맞선 상황에서 3차전 4국까지 치른 결과도 2-2로 팽팽한 상황에서, 그러니까 한 해를 마감하면서 한국리그 우승이냐 아니냐에 직결되는 ‘이 한판’이었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마지막, 진짜 마지막 승부에서 프로기사들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 나왔다.
2013 KB리그 챔피언 결정전 3차전 5국 흑:강유택 백: 김세동
초반에 강유택이 선택한 ▲ 즉, 대외목은 최근 등장했다. 왼쪽 외목과 호응하면서 굳힘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이 형태는 목진석이 2013년 실전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뱀발을 잠깐 달자면, 처음 등장했다’고 하니까 “나도 써 본 적이 있는 수법인데 무슨 말이냐?”고 흥분하는 이도 있는데, 만약 그런 식으로 따져봐야 한다면 역사에서 지금까지 ‘처음 등장한 수’는 거의 없을지도 모르겠다. 보통 ‘처음 등장했다’고 표현할 땐 보통 ‘프로기사의 공식 경기에서 처음 시도됐다.’는 의미다).
2013년 한해 현장취재를 하면서 가장 신선하고 파격적인 수법을 들라고 한다면 바로 목진석 9단이 이 외목, 대외목 포석을 말하겠다. 중견이건 신예이건 이제는 '오직 이기기 위한 수법' 다시 말해 '검증된 수법'만을 두는 게 '최선이고 아주 상식적'인 게 돼버린 시대에서 '이단적'인 충격이었다.
외목+대외목 앙상블은 목진석이 2013 올레배 광주 투어 4라운드 변상일과의 경기 때 들고 나왔다. 프로기사 다수는 “공식경기에서 이때 처음 봤다.”고 증언한다.
목진석이 올레배 광주투어에서 보여준 실험. 외목+대외목.
위험이 동반되기에 함부로 사용하기 어려운 포진인데 김정현, 강유택 같은 기사가 과감하게 시도했다는 것이다. 해설을 하던 목진석은 후배들이 이 수법을 사용하는 걸 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 두 기사는 모두 승리했고 소속팀도 우승하는 영광을 누렸다.
만약 실패했다면?
과감한 포석을 짠 사실을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는 제쳐두고 이런 실험과 모험을 한 것은 대단하다. 아무리 연구를 많이 했더라도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서는 선택은 누구나 두렵고 주저하기 마련이다.
이 수법을 처음 사용한 목진석은 오히려 이 변화를 즉흥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라고 말한다. 올레배 광주투어에서 대국을 앞두고 팬들에게 인사하면서 재미있는 바둑을 보여드리겠다고 한 목진석은 대국을 시작할 때 자신의 말이 떠올랐다. ‘아, 팬들에게 약속했었지.’ 그 약속을 지키려고 들고 나온 변화가 외목과 대외목의 조합이다.
4라운드 대국이라면 아주 중요한 길목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승부를 하는 사람은 대국 하나 사사로이 버리지 않는다. 중요한 대국에서 감행한 이 시도가 단지 팬들을 위해 순간적으로 나온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모험 정신이 투철한 목진석인 줄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 결정하는 과정이 그랬다는 것을 두고 다소 놀랐다.
그렇다면 목진석은 자신의 승부보다는 팬들에게 관전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초연하게 바둑을 둔다는 것인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이것은 오히려 아마추어리즘에 가까울 터이다. 목진석은 “물론 아니다.”라고 말한다. “팬들을 위해서 바둑을 둔다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승부사로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히 한다. 프로기사에게 두 가지 측면 모두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모험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는 것도 맞다. 다만 승부에 얽매어 두고 싶은 수를 못 두는 건 싫다.”
팬 없이는 프로기사도 있을 수 없다. 천편일률적인 바둑을 좋아하는 바둑팬이 어디 있겠나. 늘 비슷비슷하고 어제도 보고 그저께도 보던 획일화된 바둑에 열광하는 바둑애호가는 없다. 목진석은 “그런 바둑이라면 내가 팬이라도 재미없겠다.”고 한다.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팬이 원하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출 수는 없을 텐데 어떨까.
굳힘인지 벌림인지, 그 어떤 것인지안 수는 없지만 백을 응수를 쉽지 않게 하는 포진이다. 백은 변으로도 침투하기엔 간격이 마당치 않고 귀를 파고들기엔 시기 상조다. 이 포진을 선보인 사람은 다케미야 마사키. 자유롭다.
바둑을 잘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을 감상해보라고 권유한다.
4선에 놓인 돌에 모자를 씌우다니. 호방한 사나이 후지사와답다. 일본 바둑계의 전설 후지사와는 이상감각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얼핏 조소하는 것 같은 이 말엔 역설적으로 존경의 의미가 담기기도 했다. 이상감각이라고? 이상해 보였지만 일리가 있었다. 이상감각을 결코 낮잡아 볼 수 없었다. 아니 일류의 감각이었다.
다케미야의 밭전자 행마. 과연 비범하다.
목진석은 바둑의 본질 자체에 ‘다양성’이 있다고 한다. 바둑이라는 것은 언제가 구리 9단도 말했듯 ‘천변만화•변화무쌍’이 그 본질이다. 하나 이기기 위한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에게 다양성 따위는 사치 같은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다양성의 뿌리엔 예술성이 있다. 그리고 독창성이 없이는 다양성도 예술성도 있을 수 없다. 우주류의 원조 다케미야 마사키는 과거에 “승부에 매몰된 나머지 예술성을 상실한 기사가 많다.”고 꼬집은 바 있다. 승부와 예술 사이는 틈이 벌어지고 있을까. 아니 원래 건널 수 없는 바닥 없는 구덩이가 있었던 것일까.
한국바둑이 명실상부 세계대회 개인전에서 중국에 완전히 손을 들었던 해 2013년이 저물고 있다. 대체로 문제점으로 지목됐던 독창성의 부재.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앞서 말했던 KB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보여줬던 새로운 포석의 시도들은 무척이나 반갑다. 창조란 그렇게 아름답고 숭고하다. 진취와 도전 정신은 식상한 언어로만 치부되기엔 변하지 않는 좋은 가치가 있다.
색칠공부 바둑, 밑그림은 같고 색칠만 다르다
오늘날 한국 신예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바둑을 둔다. 특히 초반이 그렇다. 어디선가는 봤던, 어디선가 누가 두었던 바둑을 약속이나 한 듯이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답습’은 보다 안정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안정적인 예측의 달콤함으로 인해 답습엔 중독되기 쉽다. 이걸 버리긴 어렵다. 반대로 실험은 어렵고 힘들며 실패율이 높다. 그렇다 하더라도 똑같을 바둑을 반복하는 건, 재미는 둘째 치고 이래서 발전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목진석은 이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빈도로 보아, 우리 신예들은 열의 아홉, 아니 그 이상이 초반을 정해진 듯이 짠다. 언젠가 나왔던 변화들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대국을 해보면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외가 거의 없다. 마치 밑그림은 다 똑같이 그려 놓고 색칠만 다르게 하는 것 같다.”
과거 바둑왕전에서 목진석은 여러 차례 첫수로 천원을 선택해 연전연승을 했다. 당시 첫수 천원은 장안의 화제였고 언제까지 그 기세가 이어갈 주목 받았다. 거침없고 실험을 좋아하는 목진석이라고는 하지만 ‘첫수 천원’은 굉장한 파격이다. 역사에서도 몇 번 등장하지 않았던 천원에 첫 착점. 목진석은 심중에 어떤 계획을 했던 걸까 궁금했다. 혹시, 300년도 넘은 시절 천문학자 야스이 산테쓰가 하늘의 시작되는 곳이 바로 천원이라는 신념을 실천하려고 첫수를 천원에 둔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천문학자 야스이 산테쓰가 하늘의 중심 천원에 제1수를 두었다. 그러나 중앙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크게 웃던 목진석은 허무개그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안영길 사범과 바둑왕전 패자조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냥 갑자기 떠올랐다. 천원에 둘까 말까 하면서 망설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개성과 창의가 담긴 바둑이 도박 같이 위험천만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비교적 근래엔 구리와 이세돌이 증명한다. 구리는 대륙풍의 호방한 압박 바둑으로 시대를 풍미했다. 이세돌은 기존의 관념을 틀을 무수히 깨고 남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줬다. 그리고 최고의 성적을 보여준 바 있다. “자유자재로 두고도 성적을 내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목진석은 말한다.
이쯤에서 올해 세계대회를 점령한 중국 신예 타이틀 홀더들의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 기자는 독창성을 논할 때 간판급 중국 신예들의 예는 오히려 모순적인 면을 부각시킬 거란 생각을 문득 했다. 스웨, 저우루이양, 천야오예, 판팅위, 미위팅, 탕웨이싱. 이런 기사들은 구리나 이세돌과는 정말 다르다. 그다지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고, 독창적이거나 강한 개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나 같이 말이다. 몰아치는 쪽보다는 잘 받아치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이들의 바둑이 대세다. 이들처럼 두면 세계대회를 차지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스웨, 미위팅 이런 기사들의 스타일은 초기와는 많이 변한 것이다.” 목진석은 이렇게 운을 뗀다. 선이 굵고 호방한 구리, 기존의 관념을 깨는 이세돌 못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위팅은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본디 깡패 바둑이었다. 무지막지한 힘을 바탕으로 어떨 때는 오바한다 싶을 정도로 휘몰아쳤다. 지금은 높은 레벨들 사이에서 잘 통하지 않으면서 다듬어진 것이다. 스웨 역시 마찬가지다. 스웨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창조적인 몸싸움이 벌일 줄 안다. 무리하지 않을 뿐이다. 참고로, 셰허도 여러 가지를 숨기고 있을 뿐 자신의 스타일이 있다. (-그럼 이들은 언젠가 뚜렷한 개성을 보여줄까?) 알 수 없다. 지금을 말하자면 한창 성적을 내는 도중이라 바꿀 것 같지는 않다.
목진석은 우리 신예들에게 제안한다. 자신의 수를 둬보라는 것이다.
“강요하지는 않는다. 프로기사이므로 자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본인이 조금이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과감하게 자신만의 수를 찾아 나서라고 권한다. 첫수로 천원을 두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우리 신예들이라면 평범한 포진 속에서도 독창적인 수를 충분히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30수~40수 가량 늘 남이 만들어 놓은 수를 좇아간다면 발전도 없고 결국 대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일가를 이룬 초일류기사 중에 자신만의 색채가 없던 기사가 있었는지 살펴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