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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최전선의 바둑돌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7월 3일, 한국의 유력매체들은 중국 환구시보가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을 맺으려는) 한국 정부의 선택은 근시안적인 것으로 한국의 장기 국가 이익에도 배치되며 한국은 앞으로 동북아에서 대국들 사이의 '최전선 바둑돌'로 전락할 것"이라 주장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최전선 바둑돌'이라는 비유가 인상적이어서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많이 유포된 말이기도 하다.

환구시보에서 중국어 원본을 찾고 싶었는데 시일이 지나서인지 '최전선 바둑돌'이라는 표현이 원래 어느 기사에 있었던 것인지 찾지 못했다. 다만 7월 3일자로 올라온 한 군사관련 사설이 한국에 소개된 내용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 안에 바둑관련 표현이나 비유는 없었다. 어딘가에 잘 찾아보면 있긴 있을 것 같긴 한데 말이다. - 그런데 본문중 它会成为这场博弈的前沿 이라는 문장에 한국에 소개된 '최전선 바둑돌(博弈的前沿)'이 있었다. 오로바둑 회원이신 '맹물국수'님이 찾아주셨다. '한국은 (강대국들이 조정하는) 최전선의 한 판 바둑(게임, 전쟁)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런 뜻.

그 사설의 URL은 다음과 같다.
http://opinion.huanqiu.com/1152/2012-07/2876394.html 韩国不应助美日挤压中国 ☜

중국 현지 통신원에게 번역해 달랬더니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뺀다. 척 보기엔 티탄(체단주보) 바둑전문기자 씨에루이의 글이 이 사설보다 번역하기에 훨씬 까다로울 것 같은데, 어려운 비유가 난무하던 바둑글도 꾸역꾸역 번역하던 사람이 갑자기 못하겠다는 건 아마도 민감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통신원이 갑자기 부담(?)을 느낀 이 글은 "중국을 압박하려는 미-일 동맹에 한국은 응하지마라"는 제목의 사설이다.

내용은 당시 한국언론이 보도한 환구시보 인용 기사와 거의 비슷하다. 즉 한국이 추진하려는 한-일 군사협정은 준 군사동맹이며,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위치에 놓인 한국이 구태여 한쪽편을 들어 중국과 미국이 겨루는 긴장의 중심(말하자면 최전선)에 서지 말라는 경고다. 또 한국이 동북아시아 균형전략을 버리는 이런 입장은 한국의 미래에 대한 선택을 극도로 좁히게 될 것이고 중국은 물론 결국 한국에도 큰 손해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 주장엔 이미 한-중간의 무역량은 한-일, 한-미를 초과했고, 한-일 군사협정이 체결된다면 장기적으로 현재의 한-중의 경제적 관계 또한 지속시키지 못 할 것이라는 은근한 경고가 내재해있다.

중국의 반일감정은 한국보다 강하다. 아시아에서 반일감정이 강한 나라는 중국-한국(북한포함)-베트남(동남아포함) 정도가 있고 반일감정의 크기 또한 대략 이 순서라 할 수 있겠다. 일본에 대해 뼈 아픈 과거역사를 세나라 모두 가지고 있다. 중국은 기본적인 문화활동에도 반일이 배여있다. 예를 들어 '정무문, 황비홍 시리즈, 엽문 시리즈, 붉은 수수밭'처럼 크게 성공한 중국상업-예술영화들도 기본적으로 '항일'을 배경으로 둔 것들이 중국에는 많다.

7월이 지나고 나서 최근 바둑계를 보니 중국이 가진 반일감정의 크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 단 한장의 사진도 없이 한중일 국제교류전이 진행됐다.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 '꾸이린배 세계우승자 대회'였다. 바로 전 주에 열린 한중일 명인전도 별 탈이 없었는데 불과 며칠만에 상황이 바뀌었다. 인터넷 수순중계는 물론 중국내 어느 곳에서도 아무런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국유화조치로 인해 크게 증폭된 반일 감정때문이었다.

중국 시나바둑 담당자에게 물었다.
"이세돌-구리 결승판은 인터넷 중계를 하나요?"
"일본이 들어간 것은 아무 것도 안 합니다."

미니 삼국지이긴 했어도 이세돌과 구리를 초정했고, 일본에선 요다 노리모토가 나왔던 대회다. 이 대회, 일본에겐 미안하지만 일본은 체면치레(?)고 실은 이세돌-구리의 한중 라이벌 대결을 보기위한 대회였다. 그래서 일본 판만 빼고 결승판(이세돌-구리)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중국이 가진 반일감정의 크기와 반일 포지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현재까진 '반일'은 중국의 존재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곤 9월 19일, 한국기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10월 15일~20일 열릴 예정이었던 제14회 농심신라면배 제1차전의 장소를 한국 부산으로 변경했다. 변경 사유는 간단히 '현지사정'이었다. 농심신라면배는 한-중-일 삼국의 연승 대항전이다. 그때까지 중-일 관계가 현재처럼 지속된다면 농심신라면배 1차전은 아무런 조명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미 봤잖나. 꾸이린배가 소리소문없이 진행된 모양말이다. 아마도 그게 1차전 개최지가 부산으로 옮겨진 진짜 속사정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사실 90년대 이후의 한국 경제성장은 중국이 있었기에 가능한 부분이 많다. 그럴린 없지만 교류가 완전히 끊긴다면 20년전의 상황이 된다는 이야기다. 바둑계도 마찬가지. 중국이 없는 바둑계를 상상하기는 좀 어렵다. 일단 재미 자체가 많이 사라질 것 같다. 한국바둑은 조훈현 9단이 응씨배를 우승할 때까지 '극일(克日)'의 미학을 추구했지만 중국과 교류하고 세계대회 창설을 주도하면서 승부의 대량생산 시대에 접어들었다. 예전 20년 전 그 시절이 좋아보인다해도 현재의 높아진 눈은 그 시절처럼 다시 낮아지지 않는 법. 중국과의 교류가 끊기면 현재의 한국바둑이 가진 대량승부의 시대는 지속하기 좀 어려워진다.

영토에 관한 그 어떤 양보도 얻지는 못할텐데, 올해 한국정부가 한-일 군사정보협정을 국민들과 국회 '몰래' 체결하려 한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중국이 영토문제를 거치며 폭발한 거대한 '반일감정'은 보기에 무섭다. 그 힘이 우리를 향할까봐도 그렇다. 우리는 항상 미국의 거대한 힘을 느꼈는데, 미국만한 존재가 옆에 있었다. 우리는 그 둘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 한국이 처한 위치, 언제나 그렇듯 바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균형'이 우리에겐 지극히 필요할 것 같다.

관련기보(하단 목록줄의 관련기보 아이콘)는 이세돌-구리의 꾸이린배 결승전이다. 구리가 우승했다.

2012 꾸이린배 결승
2012-09-16 광시성 꾸이린시
●이세돌 ○ 구리 214수 백불계승

'최전선 바둑돌'과 반일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