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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홍 감독,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주연 윤제문)의 개봉을 눈 앞에 뒀다

'영화와 바둑', 공무원이 된 밀본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 한 악인이 있다. 한 없이 착한 데다 정의롭고 명석하기까지 한 세종대왕을 자신을 파멸시키며까지 괴롭히던 '밀본' 윤제문이었다. 그는 철저한 집요함의 악당이었으며, 그런 밀본이 있었기에 세종대왕은 빛났다.

'밀본' 윤제문이 현대 한국사회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새파랗게 빛나는 '사시미'가 아니라 TV 리모콘이다. 그의 정체는 7급 공무원이며 절대 흥분하지 않는 '평정심의 대가'이다.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에서 밀본은 그렇게 변해 있다. 밀본 윤제문에게 사시미(회칼)대신 리모콘을 들려준 것은 구자홍 감독이다. 이 영화의 슬로건도 '흥분하면 지는 거다'라는 게 리모콘을 부여잡은 밀본 윤제문의 화려한 '폭발'을 두고두고 암시하는 것만 같다.

구자홍 감독을 제작사 마포필름이 자리잡은 서울 망원동 사무실에서 지난 6월 14일 만났다. 구 감독에 대해선 일찌기 아는 사이다. 6년전 '마지막 늑대'라는 작품으로 데뷔했다가 깔끔히 말아드셨다. 그리고 6년간 생명연장을 하다 '나는 공무원이다'를 들고 나타나셨다. - 생명연장은 첫 작품 후 6년의 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구자홍 감독의 표현이다.

<<살아온 이력- 생명연장>>

구자홍은 86학번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과 영화에 심취해 대학입시 학력고사를 심하게 망쳤다. 지금에 와서도 그런 조그만 일탈에 대해 그다지 후회의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 그의 친구들은 그가 음악다방의 DJ를 맡아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들 한다. - 대학 졸업 후엔 광고회사 대흥기획에 다니며 CF를 제작했고 광고대행사의 PD로서 3년간 일했다. 그러나 영상에 대한 갈증으로 결국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웠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혹해 밑도 끝도 없이 프랑스에 영화 유학을 갔다. 예상하셨다시피 학위 따윈 신경쓰지 않았으며, 하고 싶은 것만 했기에 알찬 유학생활을 증명하는 무슨 빛나는 증서 같은 거, 이 사람에겐 당연히 없다.

말했다시피 구자홍 감독에 대해 약간은 아는 바가 있었다. 바둑 때문이다. 그의 바둑 실력이야 아직도 초보지만 바둑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품고 있어서, 그는 한때 바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 한 편을 기획하기도 했다. 바둑이란 '장르'에 대해선 이해가 깊은데 '한국 바둑계'를 '선비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생각하는 순수한 아마추어이기도 하다.

◀ 윤제문, 강한 색깔을 가진 배우다. 구자홍 감독은 윤제문에게 고정된 이미지를 바꿨다.

- 다른 인터뷰에서 생명연장이란 단어를 쓰셨는데, 첫번째 영화개봉 이후 두번째 영화개봉까지 '6년간의 생명연장'이다.(영화를 촬영한 2011년이 6년째, 올해는 실질적으로 7년) '아 버틴다는 거 자체'가 정말 힘들구나는 생각이 든다. 삶의 구질구질함을 버텨낸 어떤 철학까지 느껴지는 단어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데.

"하하하, 생명연장, 그~~~~ 뭐랄까, 마땅한 답이 생각 안난다. 그냥 괜찮게 지냈다. 일하면서 지냈다. 그게 참 설명하기 어려운 게 바둑에도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 보름 정도 일하면 뭔가 될 것 같고, 일이 잘 못되지도 않고, 과정은 괜찮게 흘러가는데 막판에 바둑으로 치면 결정적 수 하나를 잘 못두면 모든 게 날아간다. 그렇게 지내며 생명연장을 했다. "

- 영화에서 수 하나를 그르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바둑은 수 하나 그르치면 다음 판을 다시 두면 되는 것 아닌가. 바둑은 가장 긴 판이 어느 정도인가? 일본의 이틀걸이 바둑인가? 한국은 2~3시간 바둑이 보편화돼 있고? 하하 역시 우리는 성질이 급하니까 2~3시간 바둑도 좋을 것 같다. 그 거 하나 져도 그리 한탄하는데 말이다. 전에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 보고 음악 하는 사람은 참 좋다고 그랬다. 음반 제작의 텀이 짧으니까. "

"영화 기획에서 개봉까지 해서 정리될 때까지 한판의 바둑으로 친다면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3년 정도 잡는다. 마지막 수를 삐끗하면 다시 3년!이다. 한 판의 바둑을 다시 두려면 3년이 걸리는 거다. 그래서 삽질을 하면 안된다. 이래저래 하면 10년도 금방 지난다."

- 지금은 영화를 다 만들고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바둑으로 치면 끝내기 상황인가?
"아, 영화에선 끝내기가 가장 중요하다. 바둑의 끝내기와는 매우 다르다. 아예 개봉을 못하는 영화도 많다. 바둑은 한 사람을 상대해 이기는 것이지만 영화는 여러 사람들을 상대한다. 재미있냐 없냐를 관객이 판단하는 게 영화다. 영화는 대중을 설득하고 이겨야 한다. "

▶ 윤제문이 이렇게 변했다. 손에는 서슬푸른 '사시미' 대신 리모콘을 쥐었다

구자홍 감독의 궁금증이 갑자기 터져 나온다. "여담이지만 바둑에선 재미없게 이기는 사람도 있나? 많이 이기고 승률도 좋은데 인기는 좀 없는 기사도 있나?"

"바둑자체의 격렬함이 없어보여 팬들이 재미없다고 하는 경우 있다. 그러나 프로기사의 생명은 길다."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구 감독이 자신의 영화인생을 바둑의 기풍으로 비유했다. 무모해 보이는 수읽기 바둑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맨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 그때 좀 제가 무모했다. 무난한 바둑을 둔 건 아니었다. 첫번째 영화의 시나리오에도 5번의 고비가 있었다. 4개까지도 넘어갔는데, 격렬한 수 싸움을 하기에 5번은 많았다. 지나와서 생각하기에 5개의 격렬한 고비(바둑으로 치면 승부처)는 무리였다는 느낌(전작 마지막 늑대)이다."

"무난한 것이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팬들이 그런 바둑을 별로 안좋아한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나 또 안정되게 살고 싶으면서도 재미는 또 누리고 싶은 양가(兩價)의 감정도 있을 것이다. "

분명 이번 작품에는 내공이 더욱 쌓였을 것이다. 전작의 무리함은 관객의 재미를 넘어서는 수싸움이었다. 감독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으니까.

- 원래 제목이 '위험한 흥분'이었는데 제목을 '나는 공무원이다'로 바꿨다. 왜인가?
"이 영화는 2011년 봄에 찍었다. 그해 부산 영화제에서 상영을 했는데 '야하지 않냐?'는 영화팬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들과 함께 볼 건데 심하게 야하냐?"는 질문이었다. 이 영화는 전체관람 가 영화다. 특별히 건전하지는 않은데, 야한 영화라고 생각할 줄은 제가 모른 거지. 웃겼다. 그래서 제목을 바꾼 계기가 됐다."

- 혹시 야한가?
"나름 관능적인 씬들이 있다. 제 나름의 눈이다. 물론 옷 벗는 관능은 아니다. 눈요기는 많다. 관능이 있다고만 말하겠다."

◀ 영화에서 민폐(?) 수준의 인디밴드 보컬을 맡은 김희정(소속사 자료사진), 밴드는 실제 뮤지션들과 송하윤 등의 전문배우들이 함께 출연했다. 뮤지션들의 연기는 전문 배우들과 큰 차이가 없는데 감독의 설명으론 그들이 가진 '끼'때문이다. 배우들이 실감나는 연주를 선보이는 것이 훨씬 어렵다.

- 윤제문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지금처럼 뜨기 전이었는데
"비중 있는 조연으로 영화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작은 주연 경험이 있지만 많은 관객과 만나지는 못했다. 영화를 찍고 개봉을 준비하는 동안 주연배우 윤제문은 밀본이 되시고 유명해졌다. 영화계에선 저 보고 '신끼(神氣)'가 있다고 말한다. '끼'로 말하자면 다른 데서 이야기 했듯이 윤제문의 연기를 보면 흥분이 된다. 사시미 부여 잡는 식의 역할을 많이 맡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굉장히 귀여운 구석이 많았다. 윤제문의 새로운 면을 볼 것이다. 사시미대신 리모콘을 들려 줬고, 영화 속에서 더욱 놀라운 걸 들게 된다. "

- 영화 제작 후에 윤제문이 그렇게 뜬 건, 정말 신이 내린 '끼'다. 하늘이 돕는 건가?
"노력이 필요하다. 영화에 이 말이 나온다. '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의 노래제목인데, 꽤 중요하게 언급이 된다. 누구나 변하니까 말이다. 윤제문이 조연만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밑고 그의 잠재력이 있는 배우라는 걸 인정할 때 그를 주연으로 데려오는 노력이 있는 거고 그가 주연이 되는 거다. 윤제문의 연기는 말하자면 '괴물 슈코' 그런 분들의 바둑과 비슷할 거다. 재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장면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심오한 면이 나오는 그런 바둑에 가깝다."

- 그러나 감독의 비애랄까? (사실 전작 마지막 늑대의 출연배우들은 지금 보면 매우 화려하다) 6년전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을 때, 슬프지 않았나?
"그땐 업계에 대해 잘 몰라서, 흥행실패에 대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어, 괜찮았다는 뜻이 아니고 당연히 투자자들에게 엄청 미안한 거지. 그래도 좋은 평가를 해준 분들도 있어서 (물론 다시 영화를 개봉까지 하는데 6년이 걸렸지만) 영화 관련 일이 계속 들어오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실패라는 그것을 넘어야 하니까 점점 부담이 되기는 했다."

- 그래도 용하다. 영화계가 살벌해서 한 편 실패하면 영화감독이 다시 재기하기가 힘들다고 들었다.
"그때만 해도 현재처럼 살벌한 시기는 아니었다. 한번의 실패는 봐줄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도 있었는데 요즘은 한번 데뷔에 실패한 감독들은 그냥 용도폐기가 되는 수준같다. 2000년 후반이 되면서 한 편만 실패해도 버려지는 리스크를 지고 있다."

인생은 흥분과 환각

- 슬로건 말이다. '흥분하면 지는 거다.'인가? 인터뷰 주제와 연관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슬로건이 바둑과 정말 닮았다. 포스터 속에선 코믹하지만 따로 바둑계에 떼어놓으면 마치 입단대회에 출전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 해줄 만한 이야기다. 여기 찾아온 이유 중 하나도 감독이 바둑에 가진 선의뿐만 아니라 뭔가에 흥분하거나 뭔가에 깊이 빠지는 그런 면이 있는가 해서다.

"하하하. 맞아. 다른 측면으로 그래, 흥분, 홀딱 빠지는 거, 전 환각이라고까지 표현을 했다. 영어판이면 'delusion' 이런 식이다. 심지어는 바둑이든 음악이든 사상이든 종교든 혹은 음식이든 다 환각성이 있지? 그러니까 바둑매체에서 절 찾아온 것도 굉장히 반갑다, 생뚱맞지만 좋아. "

"오로바둑에 절 인터뷰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게, 맞다고. 그쪽(바둑계)에도 흥분한 사람, 이를테면 '환각'에 빠진 사람들이 많은 게지, 그렇지? 지금에서야 답이 생각났는데 첫 영화에 실패하고 나서 어떻게 6년간을 생명연장했느냐는 그 질문 말야. 나도 그렇지, 환각에 빠졌으니까 6년을 버텼지. 제 정신이 아닌 거지. 그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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