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자서전이 화제다. 덩달아 그 제목도 언론매체의 관심을 끌게 됐다. 사회적인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책의 제목은 다 알다시피 위기십결의 첫 번째인 '부득탐승(不得貪勝)'.
얼마 전 아는 사람들과 저녁을 같이 하다, 역시나 이창호 9단의 자서전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위기십결에 이르렀다. 연합뉴스에서 바둑소식을 담당하기도 했던 J모 차장이 위기십결의 '사소취대'의 이야기를 한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뜻인데 '취'가 여태 알던 것과 달랐다.
"사소취대의 취가 나아갈 취(就)야. 그런데 많이들 얻을 취(取)로 쓰고 있지. 뉴스에서도 '取'를 쓰는 경우가 많을 걸, 한 번은 내가 사소취대(捨小就大)라고 썼는데 별로 달리지도 않던 댓글이 하나 달리더라고. 뭐라고 썼는지 알아.?"
"얻을 취를 써야 한다고, 무식하게 굴지말고 한자 공부좀 제대로 하라고 썼더라. 하하"
옆에서 듣던 나도 할 말은 없었다. 별 생각 없이 '얻을 취'를 쓰면 되는 줄 알았으니까. 우리말에서 '버리다'와 '얻다'가 댓구를 이루기가 좋으니까 누구나 별다른 확인 없이 얻을 '취(取)'를 많이 쓴 것 같다.
자리에 동석한 한국기원 기전사업팀장 하훈희 부장이 한가지 견해를 밝혔다. 하훈희 부장은 재단법인 한국기원 사무국의 대표적인 중국 전문가이며, 한자와 서예 방면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또 기자들에게 나아갈 취(就)를 쓰는 게 맞다고 조용히 알려준 분이다.
"'나아갈 취'건 '얻을 취'건, 어떤 것을 쓰건 사소취대의 뜻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다행이다. 없댄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사소취대가 들어간 글을 썼다면 얻을 취(取)로만 써왔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하훈희 팀장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러나 '얻을 취(取)'를 쓰면 바둑의 기술적인 면만을 강조한 것 같고, 격언이 아니라 바둑판 속 '싸움의 기술'에 불과한 느낌이 난다. 나아갈 취(就)를 쓰면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는' 고급기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큰 곳'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就'를 썼을 때야 싸움의 기술에서 벗어나 비로서 격언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다. 어떤 것을 써야 특별히 옳다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 그렇다."
위기십결은 바둑계 뿐 아니라 바둑을 아는 다른 업종에서도 가끔씩 인용하는 격언이기도 하다. 투자업계에서도 바둑을 아는 매니저들은 위기십결을 매우 좋아한다. 사진은 웅진루카스 투자자문 목이균 대표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위기십결 액자다. 역시 나아갈 '취'를 쓰고 있다.
- 이창호의 글씨는 '하훈희'체?
충무로 인쇄골목 주변 족발집에 자리를 마련했던 이날 저녁은 이창호 9단이 자서전 출간 기념 사인회를 하기 바로 이틀 전이었다. 이야기 안주감으로 사인회 이야기가 나오자 J모 차장은 이창호 서체의 출발이 '하훈희 체'라고 주장한다.
프로기사들이 성적을 내기 시작하면 바둑판에 사인할 일이 많아진다. 1인자 대열에 올라서면 사인할 기회가 더욱 많아지는데 바둑판 사인의 가장 큰 특징은 볼펜이나 매직이 아닌 붓을 사용하는데 있다.
붓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젊은 프로들은, 그러나 한국기원서 가장 쉽게, 그리고 편안하게 붓글씨를 배울 수 있다. 조금 속성(?)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처음 잡아 본 붓의 느낌에 당혹해 하는 프로기사들로선 긴장하지 않고 붓을 잡을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 붓글씨 선생님이 바로 기전사업팀의 하훈희 부장이다. 하훈희 부장에게 많은 프로들이 붓글씨의 기본을 배웠다.
J모 차장은 "그래서 모든 프로들의 서체가 '하훈희'체가 된다니까!" 라고 웃는다.
실제로 여러 기사들이 배우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글씨체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그 기사의 특유의 것으로 변해간다.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 같은 경우도 워낙 사인을 많이 하다보니 자신만의 체가 생겼다. 누구나 그들의 글씨를 보면 이게 누구의 글씨인지 안다. 그러고보니 올 해 안에 '이세돌 9단의 자서전'도 나올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세돌의 자서전은 또 어떤 모습일지. 이세돌의 글씨를 닮은 느낌이 나는 자서전이라면 아마 읽을 맛이 날 것이다.
저녁식사에 끼어 이야기 나누길 잘했다.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을 더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 고맙게도 하나를 얻어 간다. 그래, 더 큰 보상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었구나. 그랬던 것이로구나.
9월이다. 일년의 4분 3이 지나가고 있다. 꼭 추석 연휴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것은 버리고 좀 큰 곳을 바라볼 여유가 필요할 때다. 생각해보니 사소한 것을 버리기도 힘든데다 더 큰 곳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꽤나 힘든 일이다. 더 큰 곳으로 나아가는 것엔 각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바둑팬 여러분도 2011년 한 해의 남은 30%기간 동안, 더 큰 곳으로 나아가시라.
PS 아래에 'J모 차장'님의 블로그를 소개한다. 바둑계의 어두운(?) 이야기들을 발랄하게 재구성했다. 그의 글은 깨소금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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