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겼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
29일 제3회 BC카드배 64강전 스케치
▲ 턱을 괸 중국의 구리, 기분이 좋다
2011-02-02 오전 12:26
1월 29일. 김진휘가 둔 대국은 맨 처음 끝난 판이 됐다.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제3회 비씨카드배 본선 32판중에서 말이다. 한국기원 연구생 김진휘는 랭킹1위 이세돌에게 졌다. 대국이 끝나 별다른 표정없이 검토실에 들른 김진휘는 기록자로 왔던 동료 연구생과 함께 바둑을 검토했다.
뭔가 아쉬운 듯, 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약간 어색하기도 한 표정으로 앉아 있길래 물어봤다.
- 오늘 바둑은 상대가 이세돌이라 긴장했던 거 아닌가? 굉장히 빨리 끝났다. 아쉽지 않나?
"아쉽지 않다. (긴장해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런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쭉 밀려서 졌다."
김진휘는 예선결승서 중국의 강호 구링이를 잡았었다. 아쉬움이야 많았겠지만 굳이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김진휘와 같은 도장에서 수업하는 연구생 홍무진은 32강에 들었다. 이틀전에 예선 결승을 통과했을 때처럼 황망히 웃으며 어쩔줄을 모른다. 그래도 대화중 어느 순간 자세를 잡더니, 멋진 말을 한다. 스승인 장수영 9단이 해준 말이라고 했다.
- 오늘 바둑은 어디쯤에서 이긴다고 확신했나?
"중반전에서 상대의 실수가 나왔다. 그 수를 본 순간 이판을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범님(장수영 9단)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이겼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하셨다. 이말을 떠올리며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뒀다."
- 대단하다. 본선에 출전할 때 부모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적어도) 한 판은 이기라고 하셨다."
중국의 구리는 이세돌의 판이 끝나자마자 얼마 안되어 자신의 판을 끝냈다. 승리를 거뒀다. 승리한 구리는 신났다. 동료들과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대고 무엇인가 수를 나눴다.
콩지에도 일찍 끝났다. 이세돌과 구리와 달리 졌다는 것이 아프다. 국후 검토실에 와 위빈과 수를 나누는데 표정은 없어도 착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이세돌은 64강전서 한국기원의 연구생 1조를 만나 부담이 큰 대국이었고, 구리와 콩지에는 중국의 한참 어린 신예기사들을 만나 나름 부담이 있었다. 이세돌은 검토실에 들르지 않았고, 구리는 동료들과 꽉 끼여서 신나게 검토를 하고, 콩지에는 장주주 9단과 가라앉은 자세로 침착하게 수를 나눴다. 3인 3색이다.
이창호 9단의 판은 초반에 비교적 급하게 진행되어 다들 빨리 끝날 줄 알았다. 중국의 펑첸과 겨뤘는데 예상과 달리 가장 늦게 끝난 판들 중의 하나가 됐다. 양측 다 초읽기 마지막까지 몰렸고, 초읽기에 먼저 몰린 것은 이창호 9단이었다. 이창호 9단은 끝나고 나서 바둑TV와 인터뷰도 했다.
검토실에선 이창호 9단이 비교적 유리한 판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 TV 인터뷰를 끝낸 다음 외투를 챙겨 입던 이창호 9단에게 몇마디 말을 던졌다. 이 9단은 "초읽기에 내가 먼저 몰려 형세판단이 힘들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잘해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담담히 소감을 밝혔다.
대만 천스위엔의 부인 장정핑은 기쁜 표정으로 검토실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대만의 본선시드 1장을 받아 참가한 천 8단은 한국의 윤준상 8단을 이겨 32강에 들었다. 천스위엔은 권갑룡 도장에서 수학하다 한국기원에서 입단했다. 이후 대만에 돌아가 저우쥔쉰, 린즈한 등과 함께 대만의 정상권을 이루고 있다. 장정핑에게 물었다.
- 천스위엔은 대만에 돌아가서 실력이 더 는 것 같다. 오늘 32강에도 들었다.
"한국에 쭉 있는 것 보다 더 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의 여건이 훨씬 좋으니까. 다만 천스위엔은 그게(머리가?) 좋다."
- 오 천스위엔은 대단히 총명하군. 여건이 안좋아도 혼자서 발전했다는 거 같다. 머리가 굉장히 좋은가보다.
"아고, 아고, 머리가 좋다는 게 아니라, 오늘은 운이 굉장히 좋았다. 어려운 바둑인데 역전이었다."
최명훈 9단의 판도 이창호 9단 판 만큼이나 늦게 끝났다. 결과가 안 난 판은 박문요-종원징의 한 판 정도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최철한 9단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상대인 중국의 신예기사가 끝까지 물고 늘어져 역전에 성공한 모양이다. 최명훈 9단이 돌을 던지고, 씁쓸한 한숨을 잠깐 쉬었다가 아쉬운 표정을 숨기고 상대와 복기에 임한다.
저 멀리에 조치훈 9단과 사카이 히데유키 7단이 보인다. 모니터로 오늘의 바둑을 살펴보는 것이라 짐작된다.
1월 29일, 유리한 판을 쭉 밀고나가 이긴 사람도 있었고, 불리한 판을 역전시켜 이긴 사람도 많았다. 대진표를 한 참 쳐다보다 귀가하는 선수들이 많은 것을 보면 모든 판에는 나름의 사연이 깃든 것 같다. 불리했던 순간과 승리를 잡을 수 있었던 순간, 그런 것들이 대진표를 보면서 머리속에 떠올랐을까? 승자건 패자건 그냥 가지는 않고, 대진표를 꼭 본다. 패자의 경우 물끄러미, 혹은 하염없이 대진표를 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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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RISK)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좋은 결과도 보통은 없는 법이다. 물론 연구생 홍무진의 말도 옳다. 스승이 해 준 말이지만 소년의 입에서 병법서에서 나올 만한 말이 나오니까 더욱 신기했다. '이겼다고 생각될 때가 거꾸로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했다.
홍무진 본인이야 노숙(老宿)해 보인다는 말에 다시 한 번 어쩔줄 몰라했지만, 승부에 있어서 노숙하다는 것은 큰 장점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이창호 9단의 초창기 별명중에 '애늙은이'라는 것도 있었다.
각자가 처한 위험의 크기를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프로선수들의 길이 조금씩, 결국엔 크게 달라질 것 같다. 위험을 감수하는 타입이건, 위험을 피하는 타입이건 말이다. 64강에서 선수들이 위험을 처리하는 방식은 모두 개성이 있었다.
PS. 노숙(老宿) : 포털 싸이트의 사전에서 검색해보니 나이많고 경험많은 사람이라는 뜻이 있길래 그냥 이 한자를 택했습니다. 성숙하다는 느낌이나는 노숙(老熟)이라는 말을 듣기에 홍무진 연구생은 아직은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