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던가, ‘유리한 바둑을 이기는 것 보다 불리한 바둑을 뒤집는 것이 더 쉽다’고. 이 말의 통용은 고수와 하수를 가리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임에 분명하다. 행여 아니라고 우기시는 분들은 자신의 내공을 의심해보시길. 풋풋한 5급 바둑도 이 진리 안에서 논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당신의 맞수는 그 즉시 하수로 전락할지 모른다.
삼성화재배 8강전 콩지에 9단과 김지석 7단의 바둑은 이 진리의 영원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세간의 예상대로 바둑은 콩지에 9단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시작됐다. 김지석 7단의 무한과속을 정확히 걸고넘어지면서 일찌감치 칼자루를 쥐었으니, 콩지에 9단으로선 쾌재를 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마 중국랭킹 1위이자 전년도 우승자의 자격으로 김지석 7단을 크게 호통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숨 쉬는 진리는 우리에게 끝까지 구경할 거리를 준다.
‘방심하는 너에게 패배가 있을지니!’
제15회 삼성화재배 8강전
● 콩지에(孔杰) 9단(中) ○ 김지석 7단(韓)
장소: 삼성화재 유성연수원
날짜: 2010년 10월 14일
결과: 202수 백불계승
장면1
포석부터 격렬한 힘겨루기 양상이다. 힘바둑으로 소문난 김지석 7단이 우변 흑진을 과감히 쳐들어가면서 보기 드문 모양이 출현했다. 흑9로 젖힌 것과 백10으로 끊은 것은 쌍방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14로 붙인 수는 준비된 맥점이었다.
단박에 16까지 바꿔치기가 된 모습이다. 언뜻 귀를 도려낸 백이 기분 좋은 결과로 보이나 이후 콩지에 9단의 둔중한 행마는 김지석 7단의 가슴을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실전진행1
먼저 실전진행을 보자. 콩지에 9단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두 점 빵따냄을 선택한다. 두 점이 준동하는 뒷맛을 방지할뿐더러 △의 엷음을 추궁하겠다는 의미다.
실전에서 이렇게 둘 기사는 콩지에 9단 밖에 없을 거란 김성룡 9단의 너스레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백의 다음 수는 당연히 우상귀 보강일 것인데, 어라? 김지석 7단의 손길은 태연히 중앙으로 향한다. 이건 무슨 뜻이지?
참고1
백이 중앙을 지킨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온당 백1로 두는 것이 정수겠지만 이렇게 둔다면 중앙 제공권이 순식간에 흑에게 넘어가고 말 것이다. 흑2의 선제공격을 맞은 다음 흑6으로 갈라치는 그림이 척척 맞아 떨어진다.
중앙은 중앙대로 시달리며 백△도 고립되는 불리한 전투가 기다린다. 그러므로 실전진행1 백2는 정수 아닌 정수였던 것이다.
실전진행2
연이은 실전진행이다. 백1로 중앙을 선택했으니 우상귀의 처분은 흑의 손에 맡겨지게 됐다. 흑2의 끊음에 이어 흑12까지 백대마가 그냥은 못사는 모양이다. 어떻게 두어도 괴로운 상황인지라 아예 손을 빼버리고 백13을 두는 건 이해할만한 수다.
‘우상귀를 포기할까? 포기하기엔 덩치가 너무 크잖아.’
김지석 6단의 신음이 커져만 간다.
참고2
사실 백에겐 실전을 피할 길이 있었다. 실리를 내주더라도 백△를 버림돌 삼아 상변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두는 것이 최선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지석 7단의 기풍을 참고삼는다면 이렇게 실리를 많이 내주는 그림은 지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장면2
우상귀 백대마가 패에 의지한 채 삶을 모색하고 있다. 흑10의 팻감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백11로 패를 해소했지만 흑12의 끊음이 무척이나 통렬하다.
중앙 백대마와 하변을 동시에 수습하지 못한다면 백의 승리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 백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을까?
실전진행3
백의 수습이 굉장히 어려워진 상황에서 김지석 7단은 백3의 기발한 수를 들고 나온다.
언뜻 중앙과 하변 양쪽을 다 수습할 수 있는 묘수처럼 보이나 흑18이 오자 중앙 백말의 위태로움은 전혀 가시질 않는다. 위기일발이다.
참고3
프로들 10명에게 물어본다면 10명 중 8명은 공격보다 타개가 쉽다고 한다. 그만큼 확실한 공격의 효과를 얻기 위해선 방심의 여지가 끼어들 수 없는 치밀함이 깔려야한다는 증언인데 그런 의미에서 실전진행3은 조금 나태한 수순이었다.
흑1의 급소붙임이 엷음을 찌르는 예리한 칼날로 백의 다음 수가 난처한 상황이다. 실전도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뒀다면 백의 타개는 더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중앙흑은 제압할 수 없다. 6으로 밀어도 7로 뻗으면 그만이다.
실전진행4
‘이 대마를 다 잡다니! 난 천재야!’
흑8을 두는 콩지에 9단의 심정이 이랬을까? 지금까지 잘 둬오던 콩지에 9단이 흑8의 떡수(?)를 빌미로 엄청난 흥분상태에 다다른다. 흑8은 무슨 의미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대마를 잡기 전 자신의 그물을 좀 더 튼튼히 하자는 뜻이었을까? 엄청난 손해수임에는 틀림없다. 일단 흑26까지 두 집이 어디서 나느냐고 김지석 7단을 윽박지른다.
실전진행5
아, 그러나 다 잡은 줄 알았던 대마가 일장춘몽일 줄이야.
촘촘하지 못했던 그물이 기어코 커다란 구멍을 내면서 대마의 숨구멍을 틔워준 것이다. 예리한 칼날과 같은 백1이 그물을 찢자 콩지에 9단은 혼돈상태에 빠진다. 백19까지 헤집고 나와선 완연한 역전무드!
참고4
흑1로 잡으러가는 건 대형사고가 난다. 백2의 패를 빌미로 백10까지 역습을 가하는 수단이 있어서 되레 흑대마가 잡혀버린다. 실전진행5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참고5
실전진행5의 흑10도 큰 실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백대마 사냥에 온 몸을 내던져야했건만 콩지에 9단은 무슨 이유인지 아무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돌아선다. 흑2로 패를 들어가 버텼으면 어땠을까?
참고6
콩지에 9단으로선 참으로 허망한 패배인데 결과적으로 봤을 때 공격의 시발점이 문제가 됐다.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
실전진행4 흑8로는 다음과 같이 흑1로 둬서 안형을 없애는 것이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치밀한 수순이다.
백2로 나가길 기다려 흑3과 5의 연타를 작렬시키면 성동격서의 백미를 짜릿하게 즐길 수 있었을 것을. 잘 짜놓고도 매듭의 마무리를 짓지 못해 모든 것이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글 | 김상우]
김상우 기자를 때론 상우'놈'이라 부르기도 했다. 까닭모를 근성이 있기 때문인데, 어느날 갑자기 회사를 박차고 나가더니 속세와 인연을 하나 둘씩 끊고 있다. 관두기 전 날, '내 놀고 있으면 가끔 술 한잔 쏘시오'하던 '놈'이 점점더 신학을 파고들며 술도 끊고 담배도 완전히 끊었다.
◀ 결혼직후 김상우,
놈의 근성은 색다르다. 놈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놈을 무척 좋아한다. 순진하기 때문이다. 다만 놈의 주변에 포진한 '쌍'것(上것, 직장상사, 선배 내지 어르신을 달리 이르는 표현)들의 염장을 쿡 쑤셔 놓는 순진함과 무지함, 그리고 무모한 열정과 단순한 게으름이 그 근성의 본체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늦었지만 상처받은 염장들에게 경의를...
'신(神)'과 함께 길을 떠난 상우'씨'가 아직 속세와의 한가지 인연만은 끊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바둑이다. 상우 '놈'의 근성이 상우'씨'의 속에 남아 속세에 한발을 걸치고 있는 걸까? 상우'씨'는 아마도 신(神)과 함께 인생의 남은 길을 걸어 갈 것 같다. 그가 신과 함께 가는 동안, 바둑이 그의 동반자이길 바랄 뿐.
김상우 기자는 일찌기 연세대 신학과에 잘 다니다, 바둑이 너무 좋은 나머지 신학을 접고, 당시 생긴지 얼마 안됐던 명지대 바둑학과에 입학했다. 졸업후 다소 늙은 나이에, 시험삼아(?) 원서를 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