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진다는 생각은 없다. 최선을 다할 것이고, 과거처럼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3월 3일, 국내 최고(最古) 기전인, 제53기 국수전 준결승에서 안형준 2단을 물리치고 결승5번기에 오른 홍기표 4단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결의가 동시에 나타났다. 약간 억울한(?) 듯한 표정을 가끔씩 잘 짓던 홍 4단이었지만, 인터뷰 내내 평온하고 여유가 넘쳤다.
대국 직후 홍기표 4단은 상대 안형준 2단과 30분 가까이 기나긴 복기를 했다. 두 대국자가 서로 친한 사이기도 하지만 안형준 2단도 몹시 아쉬웠던 듯 쉽게 복기현장을 떠나지 못했다. 복기가 끝난 후, 이창호 9단과 결승5번기를 겨루게 될 홍기표 4단을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본선대국실 현장에서 인터뷰했다. 홍4단은 입단한 지 만 5년째이며, 현재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중이다.
▲ 복기중. 김승준 국수전 해설위원이 가운데서 지켜보고 있다.
"계속 나빴다. 시간도 없어 초조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풀렸는 데 좋아진 건 아니었다. 상대가 실수해줘서 이겼다. 내가 비관파라서 점심때도 너무 안좋다고 생각했었다."
- 복기할 때, 우변과 상변을 많이 놓아 보던데 바둑의 전환점은?
"(내가) 상변 삭감한 게 좋았다.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 이창호 9단과 결승5번기를 겨루게 됐다. 그냥 예선이나 본선에서 한번 만나는게 아니라서 나름의 감회가 있을 법한데.
"이창호 9단과는 두판을 뒀다. 특히 작년 삼성화재배 본선에서 만난 판이 아쉽다. 비록 그 판을 져서 떨어졌지만 내용은 괜찮은 바둑이었다. 마지막에 감춰진 수가 있었는데 둘 다 못보고 나중에야 알았다. 이창호 9단과 (5번기를) 두게 됐으니까,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작정이다."
- 이번엔 이창호 9단과 겨루게 됐지만, 이세돌 9단이 휴직하지 않았다면 이세돌 9단에게 도전하는 것이 됐을 게다. 가상이지만 이세돌 9단과 겨루는 것이었다면 어땠을 거 같나?
"글쎄, 이세돌 9단이 휴직도 하긴 했지만, 이창호 9단과 겨루는게 더 편할 것 같다. 내 기풍에 더 맞는 거 같다."
- 홍기표 4단을 가끔 볼 때 마다, 뭔가 우울하고 억울한 표정을 자주 짓더라. 억눌린 거 같기도 하고 말이다. 뭔가 안풀린 것들이 있었나?
"'2007년과 8년에 연속해서 바둑리그에 들지 못했다. 정말 짜증이 많이 났다. 작년 삼성화재배때는 정말 오르고 싶었던 본선이라 기분도 좋고, 충분히 할만한 조라 여겼었다. 그런데 아마추어(당시 이원영 연구생)에게 지고해서 충격이 컸다. 2009년은 GS배 리그에서도 자꾸 지고, 그래서 그런지 랭킹도 자꾸 낮아졌다. 특별히 우울한 표정을 짓는 건 아닌데, 대국하는게 그렇게 보인 거 같다. "
- 음. 본인의 표정은 '포커 페이스'인가?
"그런 게, 좋고 나쁘고가 표시가 잘 나는 기사가 많이 있다. 나같은 경우는 잘 표시가 안나는 편이고, 그런 표시를 안내려고 노력한다. 티 안내려고 노력하는데 거울이 없어서 잘 모른다."
- 전에 프로기전 예선결승에서 자주 져서 속상하다는 말을 했었는데? 중요한 고비마다 자주 고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렇긴 한데, 그런건 내가 그런 중요한 승부마다 '새가슴'이되서가 아니라 기량의 문제였던 거 같다. 새가슴은 아니다. '(벌벌)떠는 바둑'은 아니다."
- 본인의 기풍은 어떤가? 심한 비관파라고 스스로를 진단하는데, 실상은 서봉수 9단이 '천재적인 기풍'이라고 칭찬한 적도 있다. 또 본인보다 더 심한 비관파를 손 꼽을 수 있겠나?
"제가 도장에서 공부할 때 서 명인님이 제가 좋은 수를 두는 걸 몇 번 봤다. 그래서 그런 것 같다. 보강할 점이 많다. 나 스스로는 초반이 좀 강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남들은 전혀 그렇게 안보는 거 같고. 끝내기, 계가와 형세판단이 약한 것 같아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더니, 늘은 듯 말은 듯 하고, 상대적으로 전투가 약해진 느낌이 든다. 글쎄 나보다 더 심한 비관파라면 이세돌 9단이 아닐까?"
- 현재 공익요원의 신분이다.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을텐데?
"하루 3시간 정도 틈날 때마다 공부한다. 국수전 외 다른 프로기전은 참가하지 않는다. 참가하기도 쉽지않고 시간을 내기 어렵다."
- 사실 국수전에서 홍기표 4단이 결승에 오르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다. 본인이 어떤 기세를 탄 것 같은데, 본인이 이유를 찾자면?
"대진표의 조가 잘 풀렸다.하하. 또 나름 열심히 뒀다. 운이 따라 준 거다."
▲ 홍기표, 오늘은 기쁜 날, 지고 싶지 않다!
"이창호 9단은 한 수 위의 기사다. 배운다는 자세로 최선을 다할 거다. (배운다는 자세라고 해서) 절대 진다는 마음은 없다. 특별히 따로 준비할 건 없고 최선을 다해 이겨야 한다."
- 오늘 상대인 안형준 2단과 점심도 같이 먹던데,
"입단후 서로 친해졌다. 동갑이다. 원래 같이 두는 사람과 같이 먹기는 서로 싫은 건데, 오늘은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별명은 따로 있나?
"봐라, 별명없게 생겼지 않나?"
- 이번에 입단후 처음으로 결승에 올랐다. 부모님도 기뻐할 거고. 아직 젊지만, 바둑인생을 걸어 오면서 때려치고 싶다는 그런 좌절같은 것도 있었나?
"때려쳐야겠다는 그런 생각까진 아니었다. 다만 '아 왜 안될까'하는 생각까진 했다. 머 그런 생각보다는 결국 노력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 결승진출이 일생에 처음이라 그런지 기분이 묘하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 3시간 바둑이 좋나?
"3시간 바둑이 편하다. 그러나 원래 지구전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3시간은 시간이 많으니까. 그나마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후반에 역전을 많이 당했던 편이고, 깊은 수읽기가 부족하다. 게다가 깜빡,깜빡하기까지 한다. 오늘 바둑도 너무 힘들었다.
제53기 국수전 결승1국, 이창호 9단과 홍기표 4단의 대결은 3월 6일 전남 영암에서 열리며, 사이버오로,파란바둑, 야후바둑에서 인터넷 대화명 '국산김치'의 해설로 인터넷 생중계된다.
[취재 : 최병준, 김수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