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9단의 LG배 8강전 코드는 현란함이었다. 종반 끝내기에서 두 번이나 무너진 기억이 떠올랐을까?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듯 정신없이 몰아친 그의 사나운 발톱에 마왕 치우쥔 8단의 끈끈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종반 끝내기가 안 되면 싸움으로!
스승 조훈현 9단이 화려한 변신술처럼 이창호 9단도 제2의 전성기를 위해 색다른 변신을 준비하고 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치우쥔 8단과 맞붙은 LG배 8강전을 집중조명으로 감상해보자.
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 8강
○이창호 9단
●치우쥔 8단(中)
장소: 서귀포시 휘닉스 아일랜드
날짜: 2009년 11월 09일
결과: 218수 백불계승
장면1 (흑의 다음 한 수는?)
흑이 둘 차례다. 다음 한 수에 따라 포석의 방향이 정해지는 중요한 갈림길이다. 생각할 수 있는 수가 많지만 크게 A~C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A는 우변 모양을 키우며 상변 백모양 확장을 저지하는 수, B는 좌변 모양을 키우는 수, C는 우하 백 한 점을 공격하면서 하변 모양을 개척하는 수다. 치우쥔 8단의 선택은 어디였을까?
실전진행1 (흑1은 완착)
치우쥔 8단의 선택은 흑1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흑1은 우변을 확실히 지켜놓고 다음 행마를 보겠다는 의미였지만 백2의 밀어가는 수로 인해 때 이른 완착이 되고 말았다. 백14까지 쭉쭉 밀어가자 흑1자리가 어정쩡한 자리에 놓여 있다. 자세히 보면 우변 흑진영 역시 중복이다.
장면2 (응수타진 이후)
실전진행1과 이어지는 수순이다. 흑1은 이 한 수라 말할 수 있는 천하명당자리다. 백2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지킴이고 다음 흑3으로 백 한 점을 공격하는 수순이 돌아왔다. 그런대로 판을 두텁게 짜나갈 수 있단 치우쥔 8단의 판단이다. 백6, 8의 연속된 붙임은 타개의 상용수법인데 여기서부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창호 9단의 강수가 전판을 휘몰아친다.
실전진행2 (강하게 버티다!)
백1로 몰고 3으로 되단수 친 게 이창호 9단답지 않은 초강수다. 보통 상대의 진영에선 가볍게 행마하는 것이 원칙이건만 되레 강하게 버틴다. 흑6의 치받음에 백돌이 조금 무거워진 느낌이다. 우하귀 패는 초반무패라 백이 당장 들어갈 수 없다.
참고도1 (백1의 젖힘으로 충분했다)
이 정도 타협이면 충분했다. 애초 백이 손을 뺀 자리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실리는 내줘야 했던 곳이다.
실전진행2는 조금 과한 것 같다는 검토실 평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창호 9단의 머릿속은 우하귀 패를 배경에 깐 강수 퍼레이드를 준비중에 있었으니….
실전진행3 (싸움을 걸어가는 기술)
첫 번째 모티브는 좌변이었다. 좌변 백3부터 7까지는 상용의 맥점인데 다음 백11로 씌우는 수가 판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든 폭군의 어명이었다. 흑도 계속 참아줄 수 없는 노릇이기에 흑14이하 20까지의 반발은 필연이다. 여기서 백21의 끊음이 기민했다. 흑도 24, 28로 물러서지 않겠다하자 백29의 절묘한 끼움수가 등장한다. 흑38까지 중앙 흑이 분단된 걸 확인한 후 그때서야 백39로 패를 들어가는 타이밍이 싸움의 기술을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기호지세다.
장면3 (타개는 어떻게?)
쉴 틈 없이
실전진행3까지 달려왔다. 중앙 백△와 흑▲가 분단된 상황에다 우하귀 패까지 걸려있어 한 수 한 수가 살얼음판이다. 백으로선 중앙 백말이 잡혀도 우하귀 패를 이기면 이득인데 이창호 9단의 다음 수는 어디였을까?
실전진행4 (사석작전의 묘미를 보여주다!)
백1의 코붙임이 우하귀 팻감이자 하변 흑대마의 모양을 단박에 무너뜨린 급소였다. 흑4로 양보할 수밖에 없을 때 이하 백23까지 하변과 중앙을 수상전 양상으로 만들었다. 수상전은 흑이 한 수 빠르지만 흑24의 찌름이 두어지는 순간, 기막힌 사석작전이 기다리고 있다. 백29로 빠지자 흑은 썩은 고기를 덥썩 물은 꼴이다.
실전진행5 (고깃값을 톡톡히 받아내다!)
흑1부터 13까지는 일사천리의 수순들이다. 이창호 9단은 백14로 더 강하게 조여 갔다. 고깃값을 톡톡하게 받아내겠다는 지독한 수순들은 결국 좌변 흑일단이 자연스럽게 접수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백 우세가 확연해지는 순간이다. 도중 흑은 41까지 좌상귀를 파내는 전과를 얻었지만 후수라 별 게 없다.
실전진행6 (헛수를 두다)
계속되는 실전진행이다. 백1로 젖혔을 때 흑2가 정확한 수를 읽지 못한 헛수다. 초읽기가 부른 패착이라 봐도 무방하다. 수를 확실히 읽은 이창호 9단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백5로 넘었다. 이래서는 상황종료!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알아챈 치우쥔 8단은 우하귀 백대마를 모두 잡자는 마지막 승부수를 꺼냈으나 흑은 팻감마저 부족한 상황이라 더 이상 판을 진행시킬 수가 없다.
참고도2 (꾹 참고 두었다면)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흑은 1로 튼튼하게 이어두는 것이 좋았다. 흑1로 두텁게 이어둔다면 막상 백의 다음 행마가 답답해진다. 흑▲는 백돌이 엷어 잘 공격당할 돌이 아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중앙을 튼튼하게 해두었으면 A로 나가는 맛도 간접보강되는 장점이 있다.
참고도3 (과연 이창호가 둔 수인가?)
두텁고 끈끈한 기풍의 치우쥔 8단을 상대로 이창호 9단의 구사한 백△들은 그가 얼마든지 다양한 색깔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종반 끝내기에서 승패를 보기 싫었다는 듯 전판을 어지럽게 몰아친 이창호 9단의 화려함에 이세돌 9단의 현란함이 오버랩되는 건 무슨 사유인지…. 화려한 준결승전을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