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승 9단에게 이번 후지쯔배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준우승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병역혜택이 주어지는 후지쯔배이기 때문에 8월 군입대가 예정돼있는 그로서는 기사 인생의 중대한 승부처를 맞이한 셈이다.
그 첫 번째 고비는 류싱 7단. 류싱 7단은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 2008년 들어서 응씨배 준결승 진출, 아함동산배 우승, 창기배 준우승 등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의 신진기수다.
8강전이 열리기 전 많은 전문가들은 조한승 9단의 우세를 예측했다. 류싱 7단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지만 큰 무대에선 기사들의 네임밸류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을 고려해 조한승 9단의 손을 들어줬다. 뚜껑을 열자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막판 조한승 9단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 줄이야….
제21회 후지쯔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8강전
○조한승 9단 (한국)
●류싱 7단 (중국)
장소: 중국 베이징 중국기원
날짜: 2008년 6월 7일
결과: 303수 흑1집반승
장면 (형세는 백이 좋다)
백을 잡은 조한승 9단이 상당히 좋은 형세다. 중앙 두터움이 살아있고 좌변 흑진의 엷음이 눈에 확 들어온다. 확정가는 흑이 조금 앞서있지만 두터움에 가려진 집모양을 헤아린다면 백이 10집 이상은 너끈히 앞서있다 봐도 무방한 국면.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지가 중요한 장면인데 선수를 잡은 조한승 9단은 다음 수를 어디에 두었을까?
실전진행1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형세가 괜찮았던 조한승 9단은 백1로 삭감 온 흑▲를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수를 들고 나왔는데 이 수가 결과론적으로 무책임한 수였다. 흑이 잽싸게 2, 4의 선수교환을 한 다음 배짱 좋게 6까지 한 발 더 들어가 버리자 백1의 수가 머쓱해져버린 꼴이 됐다. 10집 이상 기대할 수 있었던 중앙 백모양이 일시에 빛을 잃은 장면.
참고도1 (솔직하게 응수했어야)
백은 간명하게 처리했으면 그만이었다. 먼저 백1로 응수를 물어봤으면 흑이 난처한 상황. 흑이 두 점을 살리겠다면 백11까지의 수순이 예상되는데 흑이 후수로 2집을 내고 사는 모습이 비참하다.
백9의 선수를 바탕으로 11까지 압박했으면 흑은 여기서 추격의지가 제대로 꺾였을 것이다.
참고도2 (아마추어적인 발상도 괜찮았다)
아마추어적인 발상이지만 백1로 붙여 중앙 두터움을 확정가로 만드는 방법 또한 실전보단 훨씬 좋았다. 흑이 중앙에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했으면 여전히 백이 나쁘지 않은 형세.
실전진행2 (한 순간의 착오가 낭떠러지로)
실전은 참담하다 못해 처절한 결과다. 흑6으로 밀리자 좌상 백의 안위 때문에 백7의 간접보강은 어쩔 수 없었는데 흑20까지 백의 중앙모양은 철저히 공배화 됐다. 백의 우세가 삽시간에 사라진 모습.
참고도3 (흑이 중앙을 지울 동안 백이 한 것은?!)
흑이 중앙을 지울 동안 백이 한 것이라곤 좌변과 우하귀 백△로 흑 한 점을 잡는 끝내기 밖에 못했다. 거의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간명한 길을 외면하고 복잡한 길을 찾으려했던 조한승 9단의 조급함이 결국 뼈저린 패배를 안기고야 말았다. 결승점을 눈앞에 두고 넘어진 조한승 9단으로선 통한의 패배로 기억될만한 한 판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