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9단은 바둑이 좋다고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형세가 유리하면 적당히 타협도 하고 물러서기 마련인데, 통렬한 승리를 보여주기 위함일까? 그러다 보니 이 바둑처럼 어처구니없이 역전패를 당하곤 한다. 이세돌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2007 남방장성배 한중프로최강전
백: 뤄시허 9단(중국)
흑: 이세돌 9단(한국)
장소: 중국 후난(湖南)성 펑황(鳳凰)현 펑황고성에 위치한 만수(萬壽)궁 특별대국실
날짜: 2007년 9월 9일
결과: 206수 끝, 백불계승
장면 (역전 조짐)
2년마다 열리는 세계바둑최정상 대결은 올해 3회 대회를 맞았다. 삼성화재배 우승자(뤄시허)와 토요다덴소배 우승자(이세돌)가 자존심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인 끝에 이세돌 9단이 아쉽게도 막판 역전패를 당하며 지존 자리를 뤄시허 9단에게 내주고 말았다.
하변을 크게 장악한 이세돌 9단(흑)이 넉넉히 유리한 국면. 문제는 백5로 찔렀을 때 최강으로 막은 흑6에 있었다. 희망이 없던 뤄시허 9단의 눈빛이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참고도1 (이세돌의 자존심)
하변 백△를 크게 수중에 넣은 이세돌 9단은 배가 부른 상태. 따라서 백1로 뤄시허 9단이 찔러왔을 때 이세돌 9단은 좀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었다.
흑2 정도로 양보를 했으면 형세는 여전히 이세돌이 유리했다. 물론 A로 막는 것에 비하면 부분적으로는 두기 싫은 굴복이다. 이세돌에게 있어서 흑2 같은 물러섬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전진행1 (돌아올 수 없는 강)
이처럼 이세돌 9단이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자, 뤄시허 9단도 수를 내러 일어섰다. 백1·5. 어차피 져 있는 바둑이라 뤄시허 9단으로서는 손해볼 게 없다.
흑▲를 주면서까지 이세돌 9단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더 커진 백 대마를 잡으면 이기지만 거꾸로 살아가면 역전이다. 과연 최선이었을까?
참고도2 (요석이 잡혀)
백1에 대해 흑2로 받으면 당장 큰일난다. 가만히 백3으로 잇는 것으로 요석 흑▲가 죽어버리기 때문.
일견 흑4면 탈출할 수 있어 보이지만 '준비된 장문' 백5에 의해 퇴로가 막힌다. 이어 흑6엔 백7로 몰아, 다음 A와 B를 맞보기로 최소한 요석(▲)은 살아갈 길이 없다.
참고도3 (흑 불만)
또, 흑2로 한점을 따내도 불만이다. 백에게는 3으로 끊는 멋진 수단이 있다. 이를 발판 삼아 백은 흑▲ 두점을 잡고 일부를 살려갈 수 있다. 이럴 바엔 처음부터 물러서는 게 훨씬 나았다.
참고도4 (나름 최선)
한발 물러서서 흑2에서 끊더라도 흑은 좀 손해를 봐야 한다. 백3은 눈여겨볼 좋은 수. 백은 이 한점을 미끼로 쉽게 왼쪽과 연결을 꽤할 수 있다.
다만 흑도 <참고도3>과 달리 중앙을 깔끔하게 막을 수 있어 좀 낫다. 지금은 이렇게 타협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여전히 흑의 우세가 여전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실전진행2 (탄력 생긴 백돌)
이세돌 9단이 타협을 거부하는 바람에 중앙에서는 피를 봐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맞았다. 백1을 발판으로 위쪽 흑돌과 부딪히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뤄시허 9단은 속기에 능한 기사로 잘 알려져 있다. 속기로는 3초안에 두어 '3초서'라는 별명을 가진 서능욱 9단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뤄시허 9단이다. 이세돌만큼 수를 빨리 보는 뤄시허는 백15까지 탄력적인 행마를 찾아낸다.
참고도5 (흑1은 불가)
백△로 붙여왔을 때 흑1은 불가하다. 당장 백2에 흑은 속수무책이다. 오른쪽 백돌과 수상전을 벌여야 하는데, 백6이면 흑이 한수 부족하다. 잠시 후 밝혀지지만, 흑이 A로 밀고 나올 수밖에 없는 사연이 여기에 있었다.
실전진행3 (흑▲가 패착)
이세돌 9단은 흑1·3으로 비집고 나오면서 반전을 이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허나 이미 돌이키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이후는 다소 길지만 외길이다. 백26에서 이세돌 9단은 돌을 던졌다. 수상전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내린 결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백△로 찔러 응수를 물었을 때, 바로 막은 흑▲가 패착이 되고 말았다. 물러섰더라면 미세하나마 여전히 이세돌이 우세한 바둑이었을 것.
참고도6 (수상전은 불가)
실전에 이어 계속 바둑을 둔다면 흑1로 잇는 한수다. 이 수를 생략하면 당장 그곳을 백이 둬 흑▲가 죽는다.
흑1을 두더라도 흑은 낙이 없다. 선수를 잡은 백이 2에 잇고 이번에는 위쪽과 수상전을 하자고 덤비면 그만이다. 흑의 수부족. 불행하게도 흑A는 백B로, 흑C는 백A로 차단이 되지 않는다. 이세돌 9단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리 돌을 거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