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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화창한 날씨의 오후. 여름이 일찍 오려는지 다소 더운 느낌이 든다. 한국기원에서 십단전 예선을 마친 이민진 5단을 만나 서지수 선수의 숙소가 있는 방배동으로 향했다.
“서지수 선수 정말 예쁘던데 심하게 비교되면 어쩌죠?”라며 내내 엄살을 피우는 이민진 5단. 항상 구김살 없고 밝은 그녀의 모습은 주변사람들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가졌다.

방배동의 시실리라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잠시 지나자 서지수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로 보기는 기자도 처음이다.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생긴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생머리를 자르고 갈색 단발머리로 나타난 서지수 선수.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여전사 '캐리건'이 연상된다.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잠깐 동안 흐르는 어색한 침묵. ‘아. 오늘 인터뷰가 쉽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바둑과 스타의 여전사가 만나다


기자- 먼저 궁금해 하실 팬들에게 요즘 근황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민진(이하 이)- 저야 뭐 아시잖아요. 대국하고 공부하고 그러는 거죠. 이거 녹음되고 있는 거죠? 사실 요즘 좀 놀긴 했는데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써 주세요. ^^;

서지수(이하 서)- 저도 비슷해요. 이벤트나 행사 있으면 나가고 아니면 숙소에서 선수들과 연습을 하죠. 요즘 대회가 별로 없어서요. 그런데 바둑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이- 처음에는 우연히 시작했어요. 왜 바둑 두면 머리 좋아진다는 얘기 있잖아요. 부모님께서 그 말 듣고 학원에 보내주셨어요.

기자- 이민진 사범은 스타를 즐겨 한다고 하셨는데요. 서지수 선수는 혹시 바둑을 둘 줄 아나요? (‘아름다운집’님 질문)

서- 바둑은 여자기사들이 남자들과 대등하게 경쟁한다고 들었어요. 저는 아직 남자 선수들에게 도전하는 수준인데요.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신 거 같아요. 그런데 제가 바둑에 대해 잘 몰라서 어쩌죠?

이- 저는 스타 크래프트(이하 스타) 좋아해요. 동료기사들이랑도 가끔 해요. 남자 프로기사들이 한때 스타를 많이 해서 같이 PC방 가면 저는 할 게 없었어요. 그러다가 오기가 생겨서 배웠죠. 서지수 선수가 TV에서 경기하는 모습도 많이 봤어요. 역시 보던 대로 갸름하시네요. 같이 사진 찍기 싫어지는데요?

서- 제가 팔이 너무 굵어서 이런 옷만 입고 나와요. 피부가 너무 좋으셔서 저보다 훨씬 어린 줄 알았는데 언니시네요(이민진 5단은 84년생, 서지수 선수는 85년생이다). 저는 이 사범님처럼 생얼(화장 안한 얼굴)로 못 다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약간의 립서비스(?)를 주고 받으며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고 격의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지수 선수는 상당히 내성적인 편이라고 한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누군가 다가와주길 바라는 성격이라고. 항상 화려한 무대에 선 서지수 선수만 생각했기에 다소 의외였다. 걱정과는 달리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는 금세 바깥의 포근한 날씨처럼 풀려버렸다.


프로는 미쳐야 된다


기자- 이민진 사범은 초등학생 때부터 바둑을 했었죠? 서지수 선수는 어땠나요?

서- 17살 때 스타를 처음 배웠어요. 1년이 지나고 프로게이머가 되었죠. 조금 지나서 여자부대회에서 성적을 내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내가 재능도 있고 잘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남자 게이머에게 지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 노력 부족이에요. 여자들끼리만 하는 대회에서 매번 우승하다 보니 자만심만 생기고 실력은 늘지 않았던 거죠. 바둑은 여자부가 따로 있나요?

이- 프로기사를 뽑는 입단대회는 따로 있어요. 하지만 프로가 되면 같이 경쟁해야 되죠. 여자대회도 있기는 하지만 규모가 크지는 않아요.

서- 바둑에 대해 너무 모르고 나와서 죄송해요. 예전에 아버지에게 배우려고 하기도 했는데 너무 어렵더라고요. 장기나 오목은 가끔 하는데……. 그래서 바둑은 머리 좋은 사람들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그런데 저 보니까 조금 의외죠? 하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로 머리가 좋아야 되겠죠. 쓰는 머리가 다른 거 아닐까요? 저는 스타 잘하시는 분들의 발상이나 전략을 보면서 감탄하곤 하는데요?

기자- 바둑은 30여 명의 여자기사들이 활동하고 있어요. 아직 남자기사들에 비해 조금 약하다고 평가 받고 있지만 점점 기량이 향상되고 성적도 좋아지고 있죠. 스타는 어떤가요? 요즘 다른 여자 게이머들을 보기 힘들던데요.

서- 현역 선수는 저뿐이에요. 협회에 등록된 선수는 저와 이종미 선수 두 명이고요. 이종미 선수는 요즘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다른 일도 병행하고 있어요. 따로 연습을 하지는 않는다고 들었어요.
여자부 대회가 생긴다면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있지만 현재는 실력차이가 너무 커요. 팬들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죠.

이- 바둑은 입단대회를 통해서 프로를 뽑는데 프로게이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서- 예전에 여자부는 따로 프로가 되는 조건도 없었어요. 그냥 대회에 참가하면 프로자격을 주었죠. 남자들은 커리지 매치를 통해 준프로 자격을 받고 활동할 수 있어요. 그러다가 드래프트를 통해 팀에 스카우트 되면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이죠.

기자- 분위기를 조금 바꿔 볼까요? 20대 초반이니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인데요. 요즘 관심사가 뭔가요? 두 분이 나이도 비슷하니까 공통의 관심사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서- 프로게이머는 모두 게임에 미쳐야 되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지면 바로 도태되죠. 팀에서 가장 어린 친구가 17살인데 모두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요. 어리지만 이들이 다 동료이자 경쟁자죠. 저는 친구들이랑 여행 한번 가보지 못했어요. 쫓기는 듯한 기분, 내가 쉬면 뒤처진다는 기분이 들어서 항상 불안해요. 바둑도 비슷하지 않나요?

이- 네. 일단 입단 전에는 비슷해요. 도장에서 쉬지 않고 공부하죠. 학교도 가지 않고 말이에요. 저도 중학교 고등학교는 모두 검정고시로 패스했어요. 부모님도 처음에 많이 걱정을 하셨어요. 그래도 학교는 다니면서 해야 된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입단하고 나서는 조금 달라요. 스타처럼 팀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철저히 개인이 알아서 해야 되니까요. 스케줄을 관리해 주는 사람도 없고 코치도 없어요. 혼자서 모든걸 해결해야 되죠. 어떻게 보면 자유스러워서 좋아 보이지만 자기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면 역시 금방 뒤처져 버려요.

서- 나도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인정받기 전에는 어른들에게 불량학생처럼 보여졌죠.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어요. 그러다가 한창 주목을 많이 받으니 조금씩 나아지더라고요. 학교 홍보도 많이 되니 교장선생님도 절 알아보시고 격려해 주시고 하셨어요. 운이 좋았죠. 남들과 조금 다른 인생에 대해 후회하신 적은 없나요?

이- 후회하지는 않아요. 다만 졌을 때 그 기분은 정말 비참하죠. 서지수 선수도 아시죠?

서- 역시 승부욕이 있으시군요. 저도 지는 건 못 참아요.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지기 싫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었어요. 스타를 하기 전에는 항상 제 성적이 좋았는데 역전됐죠. 하하.

기자- 서지수 선수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하네요.

서-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존재감도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항상 쌍둥이 언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스타일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어요. 반대로 언니는 사교성이 많고 성격도 활달해서 친구들이 많았죠. 언니가 친구들을 사귀면 같이 묻어가곤 했어요.


뛰어난 기사는 절대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기자- 프로생활을 하면서 여자이기 때문에 느꼈던 고충이 많을 것 같습니다. 서지수 선수에게 먼저 물어보고 싶은데요? (‘사다리’님 질문)

서- 예전에 예선에서 어떤 선수가 “다음 상대가 지수다.”, “운 좋게 한 판 건졌다.”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오기가 생겨서 ‘내가 프로생활을 하는 동안 너한테만은 절대 지지 않는다.’라고 다짐을 했죠.
숙소에 있는 저희 팀원들은 저를 여자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한 명의 팀원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다른 선수들 중 일부분은 여자라는 이유로 저보다 강하지도 않으면서 무시하고 지면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정말 그래요. 진짜 실력이 뛰어난 기사들은 제가 여자라고 절대 대충 두지 않아요. 객관적으로 제가 전력이 약하지만 그들은 저를 만나도 최선을 다해요. 남자지만 저보다 센 거 같지 않은 기사들이 괜히 지면 부끄러워하고 무시하고 그러죠.

서- 정말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네요. 스타도 그래요. 진짜 잘하는 선수들은 연습할 때 저한테 져도 핑계를 대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네가 잘해서 내가 졌다.” 하고 인정해 주는 편이죠.

조금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