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16일 금요일 오후 5시 38분 한국기원 4층 특별대국실. 224수만에 이창호 국수가 중단 의사를 밝혔다. 도전자 윤준상 4단의 백 불계승. 잠시 정적이 흘렀다. 국수도 말이 없고 도전자도 말이 없다. 입회인 김인 9단이 기록석 옆에 선 채 기보를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후 기자들이 들이닥치고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 터지기 시작했다. 국수전 50년, 10대 국수가 탄생하는 순간은 이랬다.
한동안 말없이 손가락 복기로 일관하던 대국장은 최명훈 9단, 루이-장주주 9단 부부의 가세로 비로소 침묵을 깼다. 40분간 이어지던 복기는 이창호 9단이 바둑돌을 통에 주워 담으면서 끝났다. 그제서야 기자들이 우르르 윤기현 9단 이후 35년 만에 다시 탄생한 ‘윤 국수’를 에워싸고 인터뷰에 들어갔다.
-국수 등극을 축하한다. 어젯밤 좋은 꿈이라도 꾸었는지.
“별 꿈은 꾸지 않았다. 중요한 대국 전에는 쉬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 12시에 잠자리에 들어도 깊게 잠들지 못한다. 새벽녘에 살풋 잠이 드는데 많이 못자 좀 피곤하다. 중국 우한(武漢) 대국을 마치고 돌아와 행현연구실(일명 최철한연구실) 멤버들과 축구를 심하게 해 다리에 알이 배인 상태였다.”
-모두가 선망하는 국수 타이틀을 땄다. 소감은?
"짐을 던 느낌이다. 주위의 기대감도 그렇고 나 자신도 압박과 스트레스가 심했다. 스스로 이 기회를 잡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윤 국수는 우물우물 말을 씹다가(^^) "짐을 던 느낌"이라고 말했으나 인터뷰 후반에 뒤늦게 들어온 다른 기자가 재차 소감을 묻자 비로소 '준비된 진짜(?) 소감'을 꺼내 놓았다.
“내일이 어머니 생일이다.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했는데 가장 좋은 선물(국수 타이틀)을 하게 되어 다행이다.”
-부모님께서 오늘 아침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은 없었는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 주눅들지 말라 말씀해 주셨다.”
-세계대회 말고 개인적으로 가장 차지하고 싶었던 타이틀이 국수였는가? 솔직히 말해달라(웃음).
“원래는 그랬는데 알아보니 국수전은 우승을 해도 1단밖에 특별승단시켜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 (배시시 웃음) 국내기전은 규모가 큰 3대기전만 2단 승단 혜택을 주는 걸로 알고 있다. 입단 햇수(2001년 입단)로 보면 이미 6단이 돼 있어야 하는데 승단대국에서 성적이 안 좋아서….” (입단 동기생인 이영구와 백홍석은 6단, 5단이다.)
-이번 도전5번기에서 승부의 분수령이라면?
“1, 2국이었다. 모두 운 좋게 이겨서 2:0 유리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었다.”
-2:0으로 앞섰을 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는가.
“매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장 어렸웠던 판은?
“3국이 심적으로 가장 어려웠다. 빨리 끝내야겠다, 이기고 싶다는 생각에다 해외 대국도 처음이라 힘들었다. 바둑내용도 괜찮다 생각했는데 중반 이후 집중력이 떨어져 느슨하게 두는 바람에 졌다."
-2:0에서 2:1로 쫓겼을 때 초조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2:1이 되자 (빨리 끝내야겠다는 부담감이 사라져) 오히려 더 편해졌다. 오늘 4국을 져도 월요일(5국)이 또 있으니까 하는 심정이었다.”
-첫 도전기였는데 떨리지는 않았는가.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창호 9단이었는데.
“크게 떨지는 않았다. 2004년 LG정유배 본선에서 처음 이사범님과 만났을 때는 주눅이 들어 무척 떨었는데 점점 나아졌다. 그동안 경험도 쌓이고 자신감도 생겼고….”
-작전이 있었다면?
“이사범님이 두터운 기풍이라 전체적으로 두텁게 두려고 노력했다.”
-오늘 대국 내용은 어땠는가?
“초반은 약간 기분 나쁘다고 느꼈는데 좌변에서 잘 풀리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배운다는 자세로 이번 도전기에 임했다고 했는데 솔직히 스코어를 어떻게 예상했는가
(놀란 눈으로) “예상? 하면 안되죠~. 이겨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중국 우한에서 둔 도전3국은 이창호 9단의 홈 분위기였다. 신경 쓰이거나 혹 기분 상하진 않았는지. ^^
“예상은 하고 갔기에 별로…. 따라다니는 것만도 피곤하던데 정작 이사범님은 얼마나 피곤할까 생각했다.”
-4천만 원의 우승상금을 받는다. 어떻게 쓸 생각인가.
“내 돈이랄 수 없다. 어차피 통장으로 들어가 부모님이 관리하신다. 친구들에게 밥 살 돈만 부모님께 달라하는 정도다.
-이영구 6단, 백홍석 5단 등 ‘2001년 입단’ 동기생들이 모두 전도유망한 기대주로 각광받고 있다. 라이벌 의식이 적지 않을 텐데.
“바둑에서는 좋은 경쟁상대이자 밖에서는 좋은 친구 사이다. 오히려 제일 어린 박정환(14세) 초단이 크게 성장할 거 같다. 나이도 그렇고 실력도 짱짱하다. 아직 공식대국에서는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연습바둑에서는 한번 졌다.”
-이제 챔피언으로서 방어전을 치르게 된다. 첫 방어전으로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
“해외 대국 일정만 없다면 이창호 사범님과 다시 만나고 싶다.”
-의외다. 모든 사람이 가장 기피하는 존재가 아닌가. 자신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다시 한번 이겨 운좋게 이겼다는 인식을 떨쳐버리고 싶어서인가.
“이번 도전기 내내 이사범님과 두는 자체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윤 국수는 이제 만19세, 175 센티미터에 63 킬로그램의 건장한 청년이다. 반상에서는 반집을 따지는 치열한 승부사지만 반외에서는 축구와 수영 등 운동을 좋아하고 음악도 즐겨 들으며 중국드라마와 영화도 자주 보는 학생이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중문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물었다.
-중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니 앞서 우한에 갔을 때 물만난 고기였겠네? 중국어 실력이 고수라는 설이 있던데 실전 공부도 많이 했을 테고.
“아뇨. 한마디도 안했는데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