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호 앞에 영구는 없었다.’

몸소 부딪혀 본 사람만이 ‘강한 이창호’를 절감한다. 패기와 자신감을 가득 채워 왕위 공략에 나선 이영구는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채 황망히 물러났다. 3대 0 스코어가 말해주듯 도전1국만 200수를 살짝 넘겼을 뿐 나머지 두 판은 후반의 불꽃을 피우기도 전에 항서를 썼다.

왕위 11연패. 올 들어 십단, 국수, 왕중왕에 이어 거푸 타이틀을 따내고 지키는 이창호 왕국이다.


제40기 왕위전 도전5번기 제3국
○이창호 9단 ●이영구 5단

- 장소 : 한국기원
- 날짜 : 2006. 07. 19
- 결과 : 146수끝, 백불계승



장면 (삭감의 공방전)

실리와 모양의 대항전. ‘우주류’를 방불케한 이창호의 대모양 건설은 이영구의 철저한 실리책에 따른 상대성 전략으로 나타났다.
일찌감치 4귀를 독차지한 흑이 1로 삭감의 닻을 올렸고, 백은 2로 후방을 압박. 서로 상대방 진지를 깨뜨리는 12까지는 기세의 호흡이다. 이때 완착 흑13이 등장한다. 성공적인 포석을 발판으로 리듬을 타던 흑은 이를 기점으로 주도권을 넘겨주고 만다.








참고도1 (이창호의 모양바둑)

모양바둑을 선호하지 않는 이창호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두 판을 모양으로 승부했다.
그림은 도전1국의 초반 상황. 이른 시기에 백8의 천원을 차지한 쪽이 이창호다. 사실 이 장면에서 백8은 모양 작전의 계승이라기보다 쌍방의 요충지, 대세점이라 할 수 있다.










참고도2 (한발 깊게)

네 귀에 장만해 놓은 든든한 실리가 얕은 삭감으로도 괜찮다는 여유로움으로 표출됐다.
한줄 차이로 10집이 왔다갔다하는 중앙의 영역 다툼. 사실 흑1로 한발 깊게 들어가도 심하게 공격받을 형태가 아니었다.











참고도3 (승산 희박)

모양바둑은 형세판단이 생명. 매 국면 촉각을 곧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판단에 착오를 일으켜 경계선을 잘못 그으면 속절없이 쭉 밀려버린다.
백1로 에워싸는 것으로는 승산이 희박하다. 흑4로 1수 들이면 상변 흑진이 근사하다. 백모양이 크긴 해도 일방가로는 전체의 흑집을 못 당한다.








참고도4 (오십보백보)

검토실에서는 이 그림도 그려졌다. 백1로 타이트하게 틀어막는 수.
흑6에 백이 10의 곳을 단속하면 흑이 상변으로 손을 돌리게 돼 <참고도3>과 오십보백보. 그래서 백7․9로 선행하면 흑10으로 깎인다. 백11에 지키는 규모로는 도처의 흑집에 대항하기 힘들다.









참고도5 (속단)

중앙쪽을 두다가 돌연 귀쪽으로 기수를 돌린 영문은 무얼까.
이영구의 머릿속에서 이 구상이 맴돌았다. 당연히 백1로 받아줄 것으로 속단했고(검토진도 응당 받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면 흑2로 모양을 지울 심산이었던 것. 물론 이 스토리대로 흘러가면 흑의 페이스는 지속된다.









실전진행 (1수 허비)

흑▲는 타이밍이 어긋났고, 그 실수는 이창호의 레이더에 바로 포착됐다. 백1이 힘찬 반격. 백은 두터워지고 삭감에 나섰던 중원의 흑일단은 엷어졌다. 약해진 중앙을 돌봐야 하는 흑으로선 손뺀 백을 강렬히 추궁할 형편이 못 된다.
2부터 연결 겸 안정을 꾀하는 흑이다. 그 결과 하변 일대는 손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백집으로 굳어졌고, 귀중한 선수마저 백의 차지가 됐다. ▲로는 단순히 A에 둘 곳. 실전은 거의 1수를 놀아버린 격이다.
상대의 실수를 절대 놓치지 않고 응징의 화살을 날려보내는 것이 이창호의 강점. 적시의 반격이 결실을 거두며 상대전적을 5대 0으로 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