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랜드배, 출범 두 번째 해에 최고의 품격을 갖추다
청룡, 백호, 봉황의 3개 세대별로 나뉘어 겨루는 독특한 시스템과 최고의 상금. 국내 최대기전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이 두 번째 해를 맞았다. 출범 첫해에는 시니어기전 창설을 고려한 만큼 시니어세대인 봉황부에 대한 배려가 컸으나 대회기간중 수렴된 바둑계 안팎의 여론을 반영하여 두 번째 해부터는 출전 기사 전체의 균형을 고려하여 더욱 짜임새 있는 기전으로 발전하게 됐다.
새롭게 변화된 대진시스템은 연령별 4개 토너먼트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로 구성되는데 이것은 고대인들이 동서남북 4개 방위를 수호하는 신수(神獸)로 믿어온 동방청룡, 서방백호, 남방주작, 북방현무의 사신(四神)에 근거한 것으로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의 품격을 크게 높였다는 의미를 갖는다(고구려 강서고분 벽화로 유명한 사신도를 생각하면 되겠다).
새롭게 바뀐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의 주목할 만한 두 가지 특징은 누천년을 내려온 동양정신의 정수를 잇는 게임답게 음양오행에 입각한 4개 방위의 신수를 접목하여 고색창연한 전통을 첨단 무선 통신시대로 계승, 발전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남방주작으로 여성부 토너먼트를 신설함으로써 다소 어그러졌던 기전의 균형을 바로잡아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데 있다.
나는 여자가 좋다
기전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여자를 거론하는 건, 요즘 표현대로 조금 생뚱맞은 짓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가 좋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여자고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도 여자이며 내가 가장 좋아한 사람도 여자다. 그렇지만 오해는 없기 바란다. 국민가수 조용필 씨가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고 열창하기 훨씬 이전부터 세상의 반은 여자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남녀평등이라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나는, 여성 숭배자도 아니고 여권신장운동에도 앞장서본 적이 없는 보통 남자일 뿐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사랑했으며 가장 좋아한 여자는 나의 어머니다. 그렇지만 엄마에게 의지하고 엄마의 눈치를 보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마마보이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그런 오해도 없기 바란다. 나는 살아오면서 나의 어머니처럼 삶의 안과 밖이 일체하고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공부라고는 서당 훈장이셨던 외할아버님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우친 게 전부였지만 그 어떤 지식인보다 바르게 사시다 가셨다. 김장철이면 리어카를 끌고 시장바닥의 푸성귀를 주워 모아 겨울을 났지만 가난하다고 부끄러워하거나 부유한 이웃을 부러워한 적도 없으며 부족하다고 남의 것을 탐하는 일도 본 적이 없다.
몫도 좋지 않은 시장구석에 옥수수 광주리를 놓고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객행위 한번 하지 못하고 어쩌다 찾아온 손님에게 손해를 볼 만큼 덤을 빼앗기는 여린 마음의 여자였으면서도 아이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삶을 비통해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강한 어머니였다. 어느날인가 학교수업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손해만 보다 치워버린 옥수수장사 대신 파출부 일을 나가시던 어머니가 어두운 방안에 홀로 계셨다. 무엇을 하셨던가.
나는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어머니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미명 아래서 제 역할을 마친 천자문 달력을 보고는, 다 써버린 노트 위에 굵은 색연필로 그 천자문을 따라 그리고 계셨다. ‘어두운데 불도 안 켜고 뭐하세요.’ 나는 그렇게 물었고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으시며 ‘일도 없는데 놀면 뭐하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순간 왜 그토록 가슴이 벅차올랐었는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머니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시들어가는 꽃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남자 열보다 여자 하나를 가르치는 게 낫다
남자 열보다 여자 하나를 가르치는 게 낫다. 무엇을? 물론, 바둑을 이름이다. 1999년 조치훈 9단에 의해 깨질 때까지 37년간 불멸의 금자탑으로 남아있던 일본 최고(最古) 타이틀 혼인보(本因坊) 9기 연속 제패를 기록한 故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선생의 말씀이다. 실은,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어머니이야기를 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두 결혼하고 아이를 둔 어머니가 된다. 그때부터 여자의 역할은 한 개인으로부터 한 가족의 중심으로 바뀐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여자들의 사회진출이 다양해지고 여자들의 경제적 위상 역시 크게 달라졌지만 아직까지 가족의 중심에서 육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쪽은 여자일 것이다. 다카가와 선생이 하신 말씀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아이들에게 끼치는 어머니의 영향력. 동아시아 특히, 한국이나 일본의 가족문화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독립할 때까지, 인격이 형성되는 거의 모든 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한다. 이쯤 되면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바둑을 배운 이후 아주 가끔씩 어머니가 생전에 바둑을 두셨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더라면 어머니는 절대로 내게 ‘무뚝뚝한 놈’이란 말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나에게 바둑을 가르쳐주시고 손으로나마 자주 대화를 나누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국기원 4층 여성바둑연맹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모습이니까. 거기에는, 대화가 차단된 가정을 뛰쳐나와 도박판을 기웃거리거나 또 다른 일탈행위로 신문, 방송을 오르내리는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어머니가 있다. 전국 각 지역의 학교나 문화센터에서 바둑을 가르치고 사회봉사활동에 앞장서며 틈틈이 서로 어울려 맑은 삶의 수담(手談)을 나누는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다.
제2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개막식에도 그런 미래의 어머니들이 많이 보였다. 유충식 한국기원 부이사장님은 축사 도중 특별히 프로기사 공식커플 결혼발표 1호를 기록한 이상훈, 하호정 사범을 언급했고 앞줄에 앉은 하호정 사범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 때 그 몇 좌석 뒤에 앉은 새치기 1호커플 김영삼, 현미진 부부가 활짝 웃고 있었다. 바둑은 인생의 은유다. 바둑판 위에 놓이는 흑백의 돌과 같은 남자와 여자. 삶의 조화(調和)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제2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주작부(여성 토너먼트) 신설에 힘써주신 한국기원과 윤기현 국수님 그리고 어려운 기업환경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대규모의 기전을 더욱 알차게 이끌어주신 전자랜드 홍봉철 사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