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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시절 콩 한 쪽도 나눠먹던 친구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영안실 분향소에 들어서니 거기, 아버님께서 조용히 웃고 계셨습니다. 늘 그렇게 웃으셨죠.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도 몇 남지 않은 이빨 사이로 흘흘 새어 나오는, 따뜻한 바람 같은 그런 웃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그때 그날처럼 절을 하는 제 어깰 두드리시며 ‘종수 왔구나. 잘 지내고 있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지요.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해져 많이 당황했습니다. 얼굴이 반쪽만 남은 친구 녀석이 맞절을 하고 일어서다가 제 표정을 보고는 슬며시 웃더군요. 서로의 마음을 잘 아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들이 점점 부끄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요. 어쩌면 다른 사람들 눈에 약하게 보이면 불이익을 당한다는, 어긋난 피해의식에 물든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친구는, 평생을 노동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고 많이 배우지도 못하셨지만 그가 아는 누구보다 많이 베풀며 살다 가신 분.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꼭 20년이 지났습니다. 고입 검정고시를 치르기 위해 새벽학원엘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두 친구를 만났습니다. 늦은 나이에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한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곧 친해졌지요.

시험보기 전 6개월쯤은 아예, 다니던 공장을 그만두고 시험준비에만 매달렸는데 그때 또 다른 한 친구와 함께 이 친구의 집에 얹혀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뻔뻔스러운 짓이었지요. 아버지의 노동으로 꾸려가는 친구의 집안 형편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고 방도 둘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차지한 방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여동생의 방이었습니다. 아무리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도 여고 3학년이면 감추고 싶은 것들도 많고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나이입니다. 그런 여동생을 부모님과 그 아래 남동생이 함께 쓰는 안방으로 내몰고 버젓이 방을 차지했으니 참으로 염치 없는 짓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맏아들이 원했다고 해서, 오빠의 친구라고 해서 그렇게 웃는 얼굴로 방을 내주고 가족처럼 대할 수 있는지,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전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친구는 나이 40을 두 해 앞두고 아내를 맞았습니다. 제법 늦은 결혼이었죠. 그때 사회를 보면서 우리가 가장 어려웠던, 직장을 그만두고 검정고시에 매달렸던 시절을 이야기했습니다. ‘조그만 인쇄소에 다니던 한 친구가 월급을 받는 날, 한 달에 꼭 한번 두 친구와 통닭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먹었는데, 지금은 가끔씩 제법 비싼 요리도 사먹을 수 있을 만큼 형편이 나아졌지만 어떤 비싼 음식도 세 친구가 나누어 먹었던 통닭만큼 맛있는 것은 없었다. 그때 우리가 나누어 먹었던 것은 닭 한 마리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아껴주는 우정이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친구의 아버님께서 다가와 가만히 포옹하고는 등을 두드려 주셨습니다. ‘그래, 그래···.’ 이 말씀뿐이셨지만 전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제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너희들 참 보기 좋구나. 그래, 친구란 그런 거다. 오래오래 변하지 말고 의좋게 지내라.’ 평소에 아버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니까요. 제가 가진 몇 되지 않는 장점 중에서 학력이나 재력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습관도 모두 그 시절 아버님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문객은 발인(發靷) 전날 저녁까지, 영안실 위층에 마련된 커다란 방이 미어터질 만큼 많았습니다. 고인(故人)께서, 그리고 슬하의 다섯 남매가 다 열심히 바르게 산 까닭이겠지요. 그러나 발인 당일 아침까지 남은 사람들은 고인의 친족과 상주(喪主)의 친구들뿐이었습니다. 고인께서 빈소(殯所)에서 마지막 제를 올리고 장지(葬地)까지 함께 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계셨다면 또 이리 말씀하셨겠지요. 너희들 참 보기 좋구나. 그래, 친구란 그런 거다. 오래오래 변하지 말고 의좋게 지내라.

고인의 평소 유언대로 화장(火葬)을 하고 납골공원에 유골을 안치시킨 후 유족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판의 바둑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한 판의 바둑이 끝나는 종국(終局)과 같습니다. 바둑판 위의 돌들이 모두 치워지듯 육체는 사라집니다. 그 외양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 바둑이 시작되기 전의 상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음[無]’이 아닙니다. 한 해 전의 송년칼럼에 같은 내용의 글을 쓴 기억이 납니다. 저는 사람의 죽음도, 끝나버린 한 판의 바둑도 또 다른 무엇을 채우기 위한 ‘비어있음[空]’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추수를 마친 빈 들판이 한 해의 햇살과 비와 바람을 추억하듯 승부를 끝낸 바둑판도 놓여졌던 돌 하나 하나의 의미를 추억하며 또 그것은 한 장의 기보(棋譜)로 남겨져 많은 바둑 애호가들의 양식이 됩니다. 사람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고인의 생전에 있었던 많은 일들이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제각각 다른 형상으로 남겨집니다. 명국일수록, 선한 사람일수록 남겨지는 추억의 빛깔과 향기 역시 더욱 아름다울 것입니다.

친구 아버님의 부음(訃音)을 받던 날, 홍꽃노을 사범이 운명(殞命)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돌연한 사고였기에, 꽃다운 나이였기에 유족들의 슬픔이 더욱 크리라 생각합니다. 졸렬한 글로나마 위로의 말을 대신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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