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재개하기에 앞서-
우선, 그동안 이 코너를 지켜봐주신 많은 분들께 송구스럽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달을 넘게 무기력하게 보냈습니다. 때로는 진부한 내용의 답습으로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대답 없는 메아리 같은 제언의 되풀이에 지치기도 해서 좀처럼 글을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두 달이 넘는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나를 돌아보고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가를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때 자신에 차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겠다는 욕심은 버렸습니다. 그저, 이 코너를 마감하는 그날까지 스스로 마음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글을 올렸다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한국기원은 지금,
무력하게 지낸 두 달 동안 작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큰 일만 꼽아도 보급기사(?) 김성룡 8단의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과 9단 승단, 부안 LG정유배 결승3국의 의전에 관한 사고, 이창호 9단의 타이틀 획득 수에 관한 논쟁 셋이나 된다. 바둑계의 화제란 게 늘 그렇듯 한국기원에 관한 또는 그 소속 프로기사에 관한 것들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한국바둑의 중심은 한국기원일 수밖에 없다는 반증이다. 이 몇 가지 화제들로써 짧게나마 한국기원의 오늘을 비춰, 재개되는 칼럼의 첫 단추를 꿰는 의미를 갖고자 한다.
적어도 남들이 보기엔, 너무 이른 나이에 보급프로를 선언한 김성룡 9단은 나와도 제법 오랜 친분을 가진 프로다. 하필이면 ‘글쟁이’로서의 무력감에 시달릴 때 타이틀을 획득한 탓에 관련칼럼 하나 못 올려 미안한 마음 크지만 이미 많은 분들이 요모조모 꼼꼼히도 챙겨 칭찬을 해주셨기에 다시 거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번 타이틀 획득을 계기로 밝혀진 것처럼 김성룡 9단이 ‘부지런하고 말재간 좋은 프로’ 그 이상으로 칭찬 받을만한 구석이 많은, 꽤 괜찮은 프로라는 것을 더 많은 분들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따름이다.
부안에서 속개됐던 LG정유배 결승3국의 의전 사고(? 이창호 9단의 위상과 타이틀전이라는 무게를 생각할 때 확실하게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역시 이미 많은 분들이 의전의 소홀함을 지적했고 한국기원에서도 신속히 팬들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한 뒤 재발 방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므로 뒤늦게 다시 그 경위나 개개인의 잘못을 들춰 힐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창호 9단의 타이틀 획득 기록에 관한 시시비비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국기원과 팬들께 각각 한마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먼저, 한국기원은 이번 일을 담당직원 한 사람의 단순한 실수 정도로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번 사고는 개인의 실수라기보다 의전, 또는 기록에 관한 적확한 규정의 미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명문화한 규정 없이 반복하다 보면 소홀해지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과거에 이렇게 해서 괜찮았으니까 계속 이렇게 해도 된다’는 타성은 빨리 버릴수록 좋다. 한국기원은,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왜 한결같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조직과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국기원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외부의 비판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혹시라도, 모든 쓴 소리를 ‘안티 한국기원 세력의 음모’쯤으로 치부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비난을 위한 비난은 걸러져야겠지만 그 본바탕은 모든 비판에 귀를 열어두는 겸허한 자세가 되어야 한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그 사후처리다. 한국기원에 명문화한 규정과 외부의 비판에 대한 겸허한 마음가짐이 갖춰져 있을 때, 비로소 실수까지도 팬들에게 즐거운 화제를 제공하는 해프닝으로 바꾸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팬들께는, 한국기원을 위한 변(辯). 한마디로 ‘한국기원은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4년 4월에 새로이 들어선 한국기원 집행부는 연구수당, 기전제도, 기사 및 기전 랭킹제, 새로운 형식의 기전 유치, 한국바둑 세계화, 타이틀전에 관한 의전, 적확한 기록의 정리 등 지금까지 정체하거나 소홀히 해왔던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의욕적인 대수술을 집도하고 있다. 200명이 넘는 소속 프로기사와 바둑계 전체의 생각을 아우르는 역사(役事)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쉽게 결정되는 일은 없다. 당연히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크고 작은 진통도 따른다.
그러나 분명 한국기원은 변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원의 주도로 진행중인 프로기사 랭킹제도 관련 토론회의만 봐도 그런 변화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미 한발 앞서 시행한 중국의 기사랭킹제도는 물론, 골프, 테니스, 축구 등 다른 스포츠의 랭킹제도와 인터넷 바둑사이트의 랭킹시스템까지 분석, 첨부한 한국기원 홍보팀의 사전 자료준비도 과거와는 분명히 달랐고 토론 인사 역시 바둑계의 주류가 아닌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귀를 기울이는 전향적인 의지를 보였다. 사족이지만, 이른 아침 거의 전 직원이 한국기원 4층에 모여 어학강의를 듣고 신입 사원들의 바둑소양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한국기원의 변화 중 아주 작은 일이다.
이번에 팬들에게 집중포화를 맞은 타이틀전의 의전절차나 기록의 문제 역시 사고 발생 이전부터 그 최선의 안을 도출하기 위해 집행부와 담당부서에서 논의중이던 일이었다. 문제는, 팬들의 눈에는 이런 한국기원의 새로운 노력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보가 부족한 팬들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제가 부각되는 즉시 성난 목소리로 ‘도대체 한국기원은 뭘 하고 있는가?’라고 비난한다. 당장 눈에 드러난 성과는 없지만, 명백하게 새로운 변화를 추진하고 있으면서도 과거와 다름없이 일방적인 뭇매를 맞아야 하는 한국기원으로서는 가슴이 까맣게 탈 일이다. 순수한 팬들께는 그런 이해를 권하고 싶다.
더불어, 그동안 한국기원을 비난할 때마다 으레 도매금으로 넘겨졌던 ‘비겁한 글쟁이들(더러는 나 역시 포함되리)’에 관한 변명도 한마디.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팬들보다 한국기원 일을 훨씬 자세히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 죄다. 늘,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의식 있는 글쟁이’를 자부하는 사람들이 침묵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들은 ‘죽일 놈’이란 말을 들어도 비판해야 할 때가 있고 거꾸로 ‘비겁한 놈’이란 말을 들어도 참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적어도, 모르는 인사들이 함부로 내던지는 말처럼 한국기원 눈치를 보거나 그나마 있는 밥술 잃을까 두려워 침묵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모든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해야 할 일이 산적한 한국기원에 한 가지 일을 더 부담시켜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진실이든, 오해든 크고 작은 문제가 야기될 때마다 팬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던 이유 역시 한국기원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기원에, 빛나는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 있고 그 실행의 의지가 있다면 적어도 한, 두 번쯤은 팬들에게 ‘한국기원은 이렇게 달라질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여기까지 달라졌다.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는 큰 그림을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기전이나 기사들의 소식을 전하는 것만이 홍보의 전부가 아니다. 팬들은 고객이다. 팬들이 ‘알 권리’라는 상품을 원한다면 그 니즈(needs)에 맞는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은 ‘주식회사’ 한국기원의 몫이다.
사심이 없는 사람은 눈이 밝다. 눈이 밝은 사람은 결코 조직을 어두운 곳으로 이끌지 않는다. 아직 능력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지만 한국기원 집행부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