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속기 경쟁―.
준결승 1국에서 원 없이 싸웠던 양웅이 2국에서는 마치 사전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속기 경쟁을 벌였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듯한 현란한 손놀림은 시선을 끌어모은 또다른 구경거리였다.
대국 개시 2시간 30분, 수순은 172수까지 갔으나 정오 무렵에 끝난 단명국. 1수에 채 1분이 안 걸린 꼴로, 점심시간까지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세계대회 준결승전이라기에 무색할 정도로 유례가 없었던 속기 퍼레이드였다.
제9회 삼성화재배 준결승3번기 제2국
○구리 7단(중국) ●이세돌 9단(한국)
- 장소 : 삼성화재 유성연수원
- 날짜 : 2004. 11. 18
- 결과 : 172수끝, 백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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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미흡한 수순)
이세돌이나 구리 모두 속기파. 감각이 뛰어나고 수읽기가 빠르다. 그 반면에 가끔 경솔한 실수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오늘도 일찍부터 격렬한 충돌. 이세돌은 ▲로 끊으며 양쪽 백에 선전포고. 내 영역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추궁이라는 듯이. 그러나 백이 살아버리니 실효가 의심스럽다. 정작 문제는 그후. 흑1로 몰고, 백2에 귀의 대마를 죽이면서까지 한점을 빵따낸 흑5. 이 일련의 처리가 미흡했다.
실전진행 (커다란 상처)
실전 수순부터 보자. 어차피 귀를 살리는 방법은 사라졌다. 흑1 이하는 맛을 들이려는 수들이나 백10까지 특별한 뒷맛을 남기기 어렵다. 요컨대 깔끔하게 잡힌 것이다.
좌상으로 옮긴 11은 무거운 발걸음. 흑진이 온통 백집으로 변한 우상 전투에서 이세돌은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참고도1 (수상전 불가)
<실전진행>은 그 이후 수상전으로 몰고갈 형편이 못 된다.
흑1로 눈을 없애면 백2, 4가 수수를 늘이는 수순. 바쁜 와중에 흑5로 늦추어 받아야 하는 것이 괴롭다(흑5로 A는 백B). 12까지 흑의 수가 턱없이 모자란다.
참고도2 (상변쪽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상변 백과 싸움을 시도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4의 곳 단점이 작지 않은 약점. 흑13 다음 백A로 역공할 가능성도 크며, 하다 못해 14부터 알기 쉽게 수수를 메우더라도 도무지 수상전의 모양새가 못 된다. 흑은 B, C에 손질하고 들어와야 하므로 7수가 드는 데 비해 백은 4수면 족하다.
참고도3 (바른 행마)
축이 안 되는 곳을 몰아간 수부터 스텝이 약간 엉켰다.
바른 행마는 흑1의 뻗음. 이 그림은 백A로 움직일 때 흑B로 두점머리를 두드리는 수가 힘차다. 흑3으로 귀를 살리는 동작에 한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참고도4 (타이밍)
국면을 꼬여 놓은 주범은 서둘러 따낸 수. 귀의 형태가 결정된 다음에 끊어간 실전은 수순 미스다. 죽일 작정이라면 먼저 끊어가는 흑1이 묘미있는 수순. 지금이 타이밍이다.
백2로 잡으면 흑3의 한방. 여기에 돌이 놓이면 귀의 흑에 큰 보탬이 된다. 백은 6으로 붙여 잡으러 갈 수밖에 없다(백6으로 9면 흑6으로 완생). 계속해서 흑7에 백10은 흑8로 패. 그것을 피해 백8로 내려서면 귀는 오궁도화. 흑을 잡기까지 많은 수수를 들여야 한다.
참고도5 (훗날을 기약)
우상귀를 통째로 죽여서는 버텨 나가기가 벅차다. 일단 살려 놓고 훗날을 기약할 도리밖에 없었다. 백2로 달아날 때 7에 젖히지 못하고 3으로 돌아서야 하는 것이 <참고도3>에 비길 바가 아니긴 하지만(7에 두드려야 할 곳을 ▲에 둔 격이니까).
타이밍을 그르친 바람에 패맛도 수상전의 여지도 남기지 못한 채 잡혀버렸다. 그곳에서의 손해는 반수 정도. 반집을 다투는 일류들의 세계에서 그 손해는 여간해선 따라잡기 버거운 거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