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전쟁!'
아홉 해째를 맞은 삼성화재배 8강은 한국과 중국이 4자리씩을 균등 분할, 팽팽한 힘겨루기 양상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중국세의 대단한 약진. 과거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정상으로 발돋음했을 때의 기세를 방불케 한다.
한국은 새 세대 4천왕으로 불리는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송태곤이 출정, 중국은 구리 저우허양 왕레이 왕시 등 용호(6소룡+10소호)의 연합부대. 공교롭게도 상대국에 가장 위협적인 인물인 이창호와 콩지에는 중도탈락했다.
제9회 삼성화재배 8강전
○이세돌 9단 ●왕레이 9단
-장소 : 울산 현대호텔
-날짜 : 2004. 10. 06
- 결과 : 138수끝, 백불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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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균열의 원인)
이세돌은 삼성화재배와 인연이 깊지 않다. 지난대회의 8강진출이 최고 성적. 그에 비하면 준우승 경력이 있는 왕레이는 나은 편이지만 일류로 도약하려면 우승맛을 봐야 한다. 현재 중국랭킹 3위.
냉정하게 돌아보면 이 바둑은 초반 하변의 공방에서 승부가 갈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가로 뛰어 백 한점을 크게 공격하고 싶기도 한데 흑1의 양걸침 이하 실리를 차지하는 구상은 기풍이라 치자. 백8이 큰 자리. 흑나와 비교할 때 그 가치가 피부에 와닿는다. 여기서 왕레이는 백이 손뺀 좌하를 9로 추궁하려 했는데….
실전진행1 (발빠른 백)
백1의 붙임이 이세돌의 감각. 어차피 오른쪽 흑이 강하므로 한껏 굳혀주어도 불만없다는 판단이다.
붙여간 수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 몰라도 흑2에 백3의 이단젖힘이 백1의 가치를 배가시켜 주는 호착. 과연 번뜩이는 감각이다. 착점에 갈피를 잃은 왕레이는 4에서 6, 8로 정돈했는데 이세돌은 다시 한번 손을 빼서 9로 디밀고 들어갔다. △와 호흡을 맞추며 흑을 압박하는 한 세트의 수. 이 일련의 수순에서 미세하지만 승부에 균열이 생겼다.
참고도1 (산뜻한 정비)
백1에 대해 흑2는 상대에게 리듬을 주지 않으려 할 때 가끔 등장하는 수지만 이 장면에서는 ‘절에 간 색시’와 다를 바 없다. 백3에 흑4가 불가피해 백이 선수.
백5로 지켜두는 정도로 1수 손뺀 곳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산뜻하게 정비된 모습이다.
참고도2 (제자리걸음)
흑에게 시원스러운 대응책이 보이지 않는다. 아래쪽의 백을 잡기에 급급해 하다가는 전체적인 대세를 잃는다.
제자리에서 몇 집을 추가하는 사이 백이 등이 철벽으로 변한다. 이쪽 저쪽 활용을 당해서 ‘잡으나 마나’. 우상의 요처도 백이 선착하게 되므로 도저히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그림이다.
참고도3 (대동소이)
〈참고도2〉의 변화로, 백7 때 흑8의 저항은 먼저 들여다보는 백11이 따끔한 일침(단순히 15는 흑에게 손뺄 여유를 준다). 이 수의 효과로 백은 귀중한 선수를 뽑을 수 있다.
흑12로 16에 두거나 하면 백12로 귀쪽 흑 두점이 크게 떨어져 나가므로 안 될 노릇. 그래서 12로 방비하면 백13, 15를 활용해서 앞 그림과 대동소이하다.
참고도4 (흑, 파탄)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살펴보자.
흑6으로 잇는 변화도 부질없다. 백7, 9면 귀의 흑을 돌봐야 하고, 백13에는 흑14가 절대. 그나저나 백15를 당해 가운데 흑 다섯점이 잡혀서는 파탄난 거나 다름없다.
참고도5 (차분한 진행)
이상의 참고도에서 보듯 흑에게 신통한 수단이 없다. 따라서 기세로 맞서기보다 차분하게 우상을 받아주는 편이 무난했던 것 같다. 백2로 대비하면 흑3이 족히 20집짜리는 되는 큰 수. 어느덧 4귀생으로 실리지향적인 왕레이의 기풍과도 어울리는 진행이 아닐까.
실전진행2 (무모한 도발)
아마도 왕레이는 〈실전진행1〉 백3의 호수를 머릿속에 넣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변에서 생긴 균열은 미세했지만 정상급 대결에서는 좀처럼 극복하기 힘든 틈이기도 하다. 그 이후는 일방적인 흐름. 흑1부터 양곤마를 자초하는 무모한 일을 벌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나 이세돌의 매서운 받아치기에 오래 버티지 못했다. 번뜩이는 감각으로 138만에 항서를 받아낸 완벽한 승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