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불참으로 독주가 예상됐던 한국은 16강전에서 기대에 조금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았다. 그에 비하면 일본세는 왕리청(王立誠) 왕밍완(王銘琬)까지 포함하면 8강 자리를 5석이나 점유, 모처럼 신바람을 냈다. 그러나 이창호와 박영훈 앞에 더 이상의 약진은 없었다. 가장 잘 나가는 장쉬(張栩)도, 괴초식 왕밍완의 기개도 고개를 떨구었다.
장쉬는 본인방과 왕좌 타이틀을 양 손에 쥐고 있는 일본바둑계의 중추인물. 게다가 현재 명인전에 도전 중이고, 최대기전 기성전에서도 한판만 더 이기면 도전자결정전에 진출한다. 기전서열주의 채택하고 있어 일인자는 하네 나오키(羽根直樹)의 몫이지만 세계대회 성적도 앞서는 장쉬를 실질적인 톱랭커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제1회 중환배 8강전
○이창호 9단 ●장쉬 9단
- 장소 : 대만 징화호텔
- 날짜 : 2004. 09. 18
- 결과 : 253수끝, 백4집반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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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기개 넘치는 돌진)
부분적인 수읽기에 능한 장쉬가 우상에서 날카로운 맥으로 집차지에서 우위에 섰다.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그도 이창호라는 큰 산 앞에서 끝까지 ‘반전무인’의 자세를 견지하기 어려웠을 터. 지그시 압박해 오는 위엄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패인으로 작용했다.
흑3은
가를 엿본 축머리. 백4는 축머리도 방지할 겸 이렇게 공세로 나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장쉬는 흑5로 돌진. 기개가 넘친다.
참고도1 (평탄한 길)
사실 흑으로서는 간단명료하게 매듭짓는 길이 있었다. 흑1로 다섯점을 잡아두면 무난했던 것. 백2를 허용하는 게 싫었겠지만 흑3으로 백모양의 폭을 가볍게 견제하고, 반상최대인 우하를 선점하는 수순을 가지면 위안이 된다.
냉정하게 형세판단을 해볼 때 확실히 흑의 실리가 백의 그것을 능가하는 형국이다.
실전진행1 (타협책)
<참고도1>은 불안한 리드. 후반이 강한 상대임을 고려할 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그것도 그렇거니와 실전의 판단도 나쁘지 않았다. 첨벙 뛰어든 두점을 백이 공략하기가 마땅찮다는 게 검토진의 공통된 시각이었다.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흑2가 꼬리를 내렸다. 패기만만하게 덤비다가 갑자기 타협하자는 카드를 내민 격. 행여 백8에 이어주길 기대했을까. 백3부터는 일사천리. 백진을 도려내긴 했으나 뒷문이 조금 열려 있던 곳이어서 백도 한시름 놓았다.
참고도2 (타개에 후한 점수)
두눈 딱 감고 흑1로 버티는 기상이 장쉬에게는 없었을까. 백2의 봉쇄는 흑도 두렵지만 백도 그 이상으로 겁나는 수(백2로 3은 흑A로 솔솔 빠져나간다).
흑3으로, 흑5로 이쪽 저쪽을 붙여가면 탄력을 받지 않는가. 공격과 타개 수단에는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타개하는 쪽이 수월해 보인다는 게 검토실에 모인 프로들의 감각.
장면2 (느슨한 보강)
상변 침투 이후 ▲의 끊음부터 전선 확대. 그 사이에 백은 △의 한수를 챙겼다. 우변을 단속하며 백가의 움직임을 노려보는 큰 수.
흑이 타개하는 과정에서 백8로 급소를 뻗었을 때가 깊은 생각이 필요했던 대목이었다. 장쉬는 연결하고 말았는데 백의 터전 속에서 이만한 성과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나아가 형세 또한 자신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숨어 있는 두터움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참고도3 (손을 뺄 수 있었다)
<장면2>의 흑9는 손을 빼도 무방했다. 흑1이 크고도 급한 수. 당장 염려되는 것은 백2부터 핍박받는 수지만 흑7로 키워버리는 것이 호수여서 삶에는 지장 없다(흑7로 단순히 9는 백A로 낭패).
장쉬는 흑7을 못 본 걸까. 그렇지 않으면 7 이하로 키워죽이는 것보다 1수를 더 들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후자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흑1이 빛나는 요처이므로.
실전진행2 (서서히 드러나는 우세)
장쉬가 <장면2>의 진행으로 자신의 유리를 점쳤다면 오판이다. 집으로 잘 표시되지 않는 두터움은 이창호의 재산. 그 두터움으로 한걸음씩 상대를 압박해 나갔다.
그에 앞서 백5 이하의 수순에도 생기가 돈다. 특히 A로 꼬부리지 않는 백15가 눈여겨 볼 만한 수. 이와 같은 두터운 대비가 이창호의 바둑이다. 그 두터움을 17과 21에 쏟아부으며 비로소 모든 이의 눈에도 드러나는 우세를 구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