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집은 신의 몫’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리고 반집을 이기면 ‘실력’이요, 반집을 지면 ‘운명’이라고.
이창호가 가공의 수치 반집에 눈물을 삼켰다. 상대가 ‘한국킬러’로 악명을 떨치던 콩지에(孔杰)였기에 팬들의 가슴은 더욱 허전했으리라.
그러나 어쩌랴. 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상사(兵家常事)인 것을. 전력을 다한 추격전은 승리 이상의 감동을 선사하지 않았는가. 콩지에의 승리가 중국바둑계의 활성화로 이어지고, 나아가 세계바둑계가 중흥하는 기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2회 도요타ㆍ덴소배 8강전
○콩지에 7단 ●이창호 9단
-장소 : 일본기원
-날짜 : 2004. 08. 25
-결과 : 285수끝, 백반집승
※ 기보가 보이지 않는 분들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장면1 (성급한 침입)
1라운드는 이창호의 판정승. 수읽기 대결의 백미였던 상변의 공방에서 정밀한 솜씨를 뽐내며 우세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기쁨이 오래 가지 못했다.
백1로 한쪽 문을 닫았을 때 흑2로 침입한 수가 너무 빨랐다. 타개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등한시했다. 이 대목에서 상변에서 벌어놓은 포인트 이상을 까먹고 말았다.
참고도1 (요처, 흑1)
흑1이 무엇보다 욕심나는 요처라고 검토진은 입을 모았다. 이 수 자체만으로 20집 가치는 족히 된다는 것.
좌하는 흑세력을 견제하며 백2로 넓히는 정도일 것이다. 그 돌이 놓여도 귀는 오른쪽과의 연결을 엿보며 A로 침입하거나, 또 B로 붙이는 맛 등의 노림이 있어 완전한 집이라 할 수 없다. 다음의 실전진행을 보면 흑의 잘못이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실전진행 (형세 반전)
14까지가 <장면1> 이후의 실전진행. 원래 좌하 백모양은 20집이 약했는데 흑에게 침입을 당했어도 10집 정도는 보장된다. 그렇다면 흑은 10집 가량 깨뜨렸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보다 더 아픈 손실을 입은 것이 오른쪽 세력이 무용지물로 전락했다는 점. 형세가 급전직하했다.
참고도2 (수순)
타개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흑3으로 먼저 끊어두는 수순을 빠뜨린 것. 지금이라면 백4로 이을 수밖에 없고, 흑5부터 9로 넘으면 흑세력은 아직 위력을 지니고 있다.
흑3의 결정을 미룬 것은 장차 A에 흑돌이 놓일 경우 귀의 끝내기가 달라지기 때문. 일류기사들은 아주 미미한 부분까지도 항상 신경을 쓰는데 이 장면에서는 맛을 너무 아낀 결과가 됐다. 반면 <실전진행1> 백6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장면2 (끝내 등 돌린 반집)
맹렬한 추격전으로 극미의 형세. 아니, 흑1이 놓인 시점에서는 오히려 흑쪽에 서광이 비쳤다.
그런데 아뿔사, 그동안 혼신을 다바친 따라잡기로 인해 기력이 바닥난 것일까. 이 바둑의 운명은 이미 신이 점지해 놓은 것일까. 백2를 외면한 흑3이 끝내기 달인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흑3은 후수4집짜리. 그에 비해 백4는 선수3집. 손에 땀을 쥐게 했던, 16강전에 이어 다시 한번 간절히 소망했던 역전극은 여기서 접혔다.
참고도3 (아쉬움이 큰 끝내기)
왜 흑1로 늘지 않았을까. 백2, 4의 젖혀이음을 적시에 당하는 게 싫었던 걸까.
냉철하게 판단해 보자. 흑이 좌상을 단속하면 6의 자리는 백의 차지가 될 터. 그러나 흑에게는 9, 11로 중앙집을 살찌우는 큰 수단이 남아 있다. 이 그림이라면 흑이 지는 일은 없다고, 너나 할 것 없이 길게 내쉬는 한숨 소리로 검토실 공기가 냉랭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