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이창호도, 2연패 중이던 이세돌도, 그리고 신성(新星) 최철한도 아니었다.
당초 유력한 우승자로 거론됐던 얼굴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기라성의 숲을 헤치고 최후 고지에 깃발을 꽂기 위해 산 아래 선 기사는 박영훈과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첫 만남에서, 첫 우승을 놓고 숙명의 한일전을 벌였다.
제17회 후지쯔배 결승전
○요다 노리모토 9단(일본) ●박영훈 6단(한국)
- 장소 : 일본기원
- 날짜 : 2004. 07. 05
- 결과 : 265수끝, 흑1집반승
장면1 (박영훈의 묘수)
후지쯔배는 세계대회로는 유일하게 결승전이 단판승부로 거행된다. 그만큼 대국자는 압박감이 더할 것이다.
흑은 네 귀의 실리, 백은 중앙일대의 모양이 재산. 백1로 큰 곳을 차지했을 때 박영훈은 2로 삭감에 나섰다. 이 장면에서 백5의 건너붙임이 틈새를 찌르는 호수였는데, 백6의 헤딩이 그것을 능가하는 묘수. 언뜻 자살행위 같지만….
참고도1 (백의 주문)
백△는 흑1 이하로 응해 달라는 주문. 그러면 2의 곳에 자연스럽게 백돌이 놓여 A로 뛰어들어 가는 끝내기에 힘이 실린다. 게다가 말끔하게 선수로 정비. 누구나가 이렇게 되는 그림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 오기 전에 흑은 먼저 2에 찔러 백B와 교환해 놓았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우려의 소리도 나왔다.
실전진행1 (흑이 선수)
백1, 3은 어쩔 수 없는 응수. 여기서 흑4로 끊어간 것이 앞서 헤딩한 수와 호흡을 같이 하는 맥점의 연속. 그 효과는 귀중한 선수를 뽑았다는 데 있다.
백7까지는 ‘거북등따냄’이라 해서 상당한 위력이지만 지금 상황은 어차피 백집이 굳어져 있던 곳이어서 아프지 않다. 박영훈이 수읽기의 진수를 보여주며 선후수의 입장을 바꾸어 놓았다.
장면2 (끝내기 승부)
서두르지 않는 기풍에다 끝내기에서 승부를 거는 기사들답게 아직 저울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피말리는 끝내기 승부! 백1은 반상최대이며, 흑2는 백
가 또는
나의 수단을 방지하는 큰 수. 그런데 상대가 받아주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심에선지 계속해서 ‘고’를 외친 백5의 끝내기가 밋밋했다. 정해수는 어디였을까?
참고도2 (선수끝내기)
끝내기에 정평이 나있는 요다 노리모토가 상변 백1로 달리는 수를 왜 아꼈을까. 더욱이 선수이지 않는가. 그 다음에 여유롭게 백5의 끝내기를 해도 늦지 않는 데 말이다.
이 그림대로 진행된다면 백이 조금이나마 두터운 형세가 아니냐는 게 검토실의 진단이었다.
실전진행2 (회심의 역끝내기)
천우신조인가. 상대의 실착에 편승하며 실전은 거꾸로 흑이 5의 곳을 단속하는 수순을 얻었다. 1억5천만원을 손에 넣는 역끝내기! 순식간에 우승컵이 흑의 품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어린왕자’ 박영훈이 천하를 호령했다. 그의 공로로 한국은 7연패 금자탑을 쌓아나갔으며, 개인적으로도 3단을 훌쩍 뛰어넘어 신의 경지(入神)에 들어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