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혈단신으로 8강무대에 섰을 때만 해도 내심 걱정하는 팬들이 적지 않았다. 장거리 원정대국에다 약간의 슬럼프 기미,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국의 안방 텃새. 악재가 많았고, 사면이 초가였다.
그러나 이창호는 확실히 믿음과 기쁨을 함께 주는 최고의 ‘브랜드’였다. 이번만큼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며 호들갑 떨던 중국세를 차례로 뉘고, 6대 1의 승부를 1대 1로 만들며 결승고지를 밟았다. ‘번기의 지존’ 이창호, 그렇다면 우승은 떼논 당상이 아닐까.
제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 4강전
○후야오위 7단(중국) ●이창호 9단(한국)
- 장소 : 중국 닝뽀
- 날짜 : 2004. 06. 10
- 결과 : 275수끝, 흑1집반승
장면1 (강력한 돌입)
후야오위(胡耀宇)는 절대로 무리하지 않고 극도로 냉정한 기풍. 마치 예전의 이창호를 보는 듯하다. 이런 상대는 좀처럼 쓰러지지 않고 끈덕지게 버텨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잔잔하던 국면이 흑1부터 요동친다. 흑의 옥토였던 우상귀가 패인 것을 보상받기 위한 강력한 돌입. 이 수를 기점으로 이창호는 승부의 물꼬를 끌어당기는 데 성공한다.
참고도1 (흑, 활발)
<장면1>의 백1은 최강의 버팀이라 할 수 있다. 본도처럼 단순히 위에서 누르는 것은 간명하긴 하지만 싱겁다.
선수로 변의 실리를 빼앗기고 좌변 12의 곳을 허용해서 백으로서는 불만이 남는 절충일 것이다.
실전진행1 (백진 관통)
우변은 어렵지 않게 수를 낼 수 있는 자리. 흑3으로 붙여가는 수가 맥점이다. 백4로 출구가 막히더라도 흑5로 빠져나가는 수가 있어 백은 다음 착수가 고민스럽다.
백6은 예상밖의 수. 후야오위는 귀의 실리가 크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흑9 이하 버림돌 작전에 의해 우변 백진이 관통당한 모습이 쓰라리다.
참고도2 (실리가 크다)
우변이 초토화되는 아픔을 겪지 않고 정도(正道)를 걷자면 <실전진행1>의 백6으로는 1에 막는 수. 그러나 흑2로 한점을 잡는 수가 무척 크다. 게다가 백은 3의 가일수가 필요하며(손빼면 흑A부터 사는 수단이 있다), 3이 놓여도 흑B로 간질이는 뒷맛을 남겨주어 이래저래 시름이 쌓인다.
장면2 (양쪽을 독차지하다)
상변을 두어야 할지, 좌변의 큰 곳을 차지해야 할지 궁금한 장면에서 이창호는 흑1을 택했다. △의 움직임을 완전봉쇄하는 깔끔한 끝내기. 그렇다면 좌변은 당연히 백의 차지로 보였는데 후야오위는 2. 검토실로부터 경직된 수라고 일제히 비난받았다.
흑3이 매서운 일침. 두고 싶었던 두 곳을 선수로 결정지으며 질 수 없는 형세를 구축했다.
참고도3 (맞보기의 자리)
상변과 좌변은 맞보기의 자리. 어째서 후야오위가 백1로 두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는 장면이다. 혹시 신중함이 지나쳤던 건 아닌지.
1로서 백이 우세한 건 아니지만 흑이 이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전진행2 (마무리 솜씨)
흑1부터는 승세를 닦아가는 이창호의 멋진 솜씨. 공격하면서 집을 불리는 진면목이 빛을 내는 대목이다. 이러고 보니 백은 한눈도 없는 모습.
제 아무리 끈질긴 후야오위라도 이창호에게 맞서기엔 아직 역부족인 느낌이다. 저우허양과 격돌하는 결승전은 한결 편한 대국이 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