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적수는 국내기사. 그리고 또 하나가 내면의 적. 신진세력으로부터 줄기차게 양협공을 받아 지쳐있던 그에게 20여일간의 인터벌은 꿀맛 같은 휴식기가 됐을 것이다. 도중에 외국기사를 상대했던 CSK배는 심기를 일전하며 전열을 가다듬은 보약. 이제 이창호는 본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제8회 LG배 결승5번기 제4국
○목진석 7단 ●이창호 9단
- 장소 : 서울 그랜드 인터콘티넨탈호텔
- 날짜 : 2004. 04. 01
- 결과 : 107수끝, 흑불계승
장면1 (공부한 협공)
큰 승부 경험이 일천한 목진석에게 2억5천만원짜리는 너무 부담스러운 대결이었을까. 그답지 않게 기운 없이 패퇴하고 말았다.
포석부터 밀렸다. 아니, ‘공부하는 천재’ 이창호의 진면목 앞에 스르르 고개가 숙여졌는지도 모르겠다.
백6까지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패턴. 이 장면에서 흑7이 이창호의 공부. 처음 선보이는 협공이었다.
참고도1 (지금까지의 수)
각자 독특한 개성과 기풍을 지닌 프로지만 유행의 물결 앞에서는 그들도 적잖이 동참한다.
<장면1>의 흑7로는 본도 1에 바짝 협공하는 것이 지금까지 ‘이 한수’인양 누차 두어졌던 수. 앞선 결승1국과 3국에서, 거슬러 올라가 기성전 도전2국에서도 등장했다. 물론 정답을 매길 수는 없다. 다만 일인자 이창호가 연구한 수이기에 좀더 가치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실전진행1 (협공의 효력)
백1부터 우상의 정석선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견해가 많았다. 흑14까지 되고 보니 기착점 ▲가 안성맞춤의 위치에 놓여 있지 않는가. 요컨대 우상으로부터의 벌림과 우하 백에 대한 협공을 겸하는 일석이조의 수! 목진석의 발걸음은 여기서부터 꼬였다.
참고도2 (백의 고민)
<실전진행1>에 이어 백이 두점을 움직인다면 1에서 3이 보통의 행마. 그런데 우상 흑이 이미 ▲로 안정하고 있어 상변 흑을 4로 보살피는 수순을 가질 수 있는 게 자랑스럽다.
원래 이 정석은 백3 때 흑이 우변을 전개하고, 백이 A로 상변의 육박에 선행해야만 수지가 맞는 거래.
실전진행2 (진로수정 했으나…)
△ 두점을 움직여 나가는 건 즐거움이 없다고 판단한 백은 1부터 좌상을 키우는 작전. 하지만 흑도 8까지 쭉쭉 품을 넓히니 우상일대의 모양이 굉장하다.
거기다가 이후 목진석은 흑2~6으로 잔뜩 힘을 실어주었던 곳에서 다시 △를 살려내는 작전의 모순을 저지른다. 어쩔 수 없는 승부수였지만.
장면2 (발걸음을 서두르다)
우상에서 발목 잡힌 목진석.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려 한 백1이 다시금 명을 재촉했다. 흑2부터 선수로 좌상을 패인 것이 쓰라리다. 백3쪽에서 막은 수에도 이견을 제시한 기사가 많았다. 오른쪽 세력과 중복이라는 이유.
흑16으로 우하의 백마저 선제공격을 받아서는 백이 이기기 어려워졌다. 빈 귀를 선착한 쪽이 진다는 묘한 징크스를 되새겨주며….
참고도3 (좌상이 우선)
애써 △로 벽을 쌓아놓은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백1로 좌상을 단속하는 게 옳았다는 평판이 절대다수였다. 2로 빈 귀를 차지하면 여전히 흑이 폭넓은 형국이지만 좌상일대 백의 실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창호가 3승 1패로 우승컵을 품었다. 타고난 천재성에다 부단한 공부가 그의 머리 위에 세계대회 20번째 왕관을 얹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