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전에서 점화됐던 불길이 그 세력을 더욱 넓히며 기성전으로 옮겨붙었다. 이창호와 최철한―. 2004년 한국바둑계는 온통 이 두 기사의 기운에 휩싸여 있다.
국수전에 이어 기성전에서도 뜨거운 승부를 펼칠는지. 왠지 예전 같지 않아 보이지만 여전히 최강인 이창호. 그를 상대로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야심만만한 청년 최철한. 반상은 첫판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15기 기성전 도전5번기 제1국
○ 최철한 6단 ● 이창호 9단
- 장소 : 한국기원
- 날짜 : 2004. 02. 27
- 결과 : 209수끝, 흑불계승
장면1 (정면 충돌)
백1의 양걸침에 대한 이창호의 흑2는 사전에 연구가 돼 있었던 듯. 큰 승부임에도 손길이 쉽게 나왔다는 게 그걸 방증한다.
최철한도 백3부터 직접적인 행동으로 맞섰다. 선악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강인하다. 서로의 돌을 맞끊으며 초반부터 기세싸움이 대단하다. 누구의 힘이 세고, 누구의 수읽기가 강할까.
실전진행1 (성급한 활용)
포위당한 백이 수습해야 할 입장이다. 최철한은 백1, 5를 아낌없이 활용했는데 이것이 성급한 결정이었다. 하등 서둘 이유가 없었던 것. 백5로는 경우에 따라 A에 두는 게 득이 될 수도 있다.
이쪽을 강화시켜 놓으면 백7로 붙여가는 수에 힘이 실린다고 여긴 듯하나 흑이 8로 슬쩍 발이 빼어 버리니 김이 샌다.
실전진행2 (뒷북치는 인상)
이제 와서 백1부터는 어쩔 수 없지만 뒷북치는 인상이 짙다. 백7의 맥점 구사를 위해 좌변에 흑집을 제공한 것도 애석하다.
흑10으로 백 두점도 제압된 모습. 최철한이 의욕적으로 변화를 꾀하려다가 도리어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
참고도1 (뒷맛의 경중)
그럼 어떻게 두어야 했을까. 오른쪽은 건드리지 말고 먼저 백3으로 응수를 물어보는 게 올바른 수순이었다. 흑이 실전처럼 4로 늦추면 백5, 7로 뚫는다.
이 그림은 실전과 달리 장차 백A 등 뒷맛이 적지 않다. 그 뒷맛 경중(輕重)의 차이가 초반의 명암을 갈라놓았다.
참고도2 (늦지 않은 활용)
흑4로 막는 변화. 이에 대해서는 백5, 7로 탄력있게 호구잇는다. 결코 때가 늦지 않은 활용으로 거의 선수. 흑10으로 보강하면 백11의 끊음이 강렬하다.
흑12라도 13으로 응하면 백은 자체로 살아 있어 이 싸움은 아무래도 흑이 버거워 보인다.
참고도3 (나쁘지 않다)
또 하나, 백3 때 흑4로 끼우는 변화도 생각할 수 있다. 이것에는 백5부터 다 들어준다.
19까지 원래 흑진이었던 하변이 지금은 백집이 더 난 모습. 이렇게 실리를 벌어들이는 편이 실전보다 한결 나았다고 복기 때 판명됐다. 이 공방에서 실패한 백은 이후의 국면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장면2 (회심의 펀치)
하변 공방에서 점수를 잃은 백이 반전을 노려볼 곳이라면 우상일대. 최철한은 편법을 동원하며 분란을 획책했는데,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흑1, 3으로 몰고이은 것이 강수. 백4는 이렇게 버티지 않고서는 달리 대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흑89에서 91이 회심의 펀치(상변 흑은
가의 내려섬이 선수여서 완생인 것이 자랑). 이 콤비블로를 얻어맞은 백은 전체가 기우뚱거렸다. 검토실은 종국이 가까워졌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런데….
참고도4 (죽었을 것이다)
<장면2>에 이어서 흑1로 씌웠더라면 백대마의 운명이 어찌됐을까. 수많은 그림이 검토됐지만 백이 사는 참고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중에서 한 예가 본도. 흑에게도 약점이 많지만 아슬아슬하게 백을 잡을 수가 있다.
이 대목에서 이창호는 무려 45분을 투자했다. 본국 최장의 기록. 그렇게 오랫동안 공을 들이자 모두들 잡으러 가는 줄로만 알았다. 다만 국수전 도전4국에서 대마사냥에 실패했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마무리 확인 절차를 반복하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실전진행3 (확실한 길로)
이창호는 끝내 잡으러 가지 않았다. 흑1, 3. 관전자들로선 맥이 풀리는 수일지 몰라도 이것이 오늘날 최강의 승부사 이창호를 만들어놓은 바탕이 아닐까. 승전고를 울리는 때가 조금 늦추어질 뿐이지 승리에는 변함이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맛이 나빠서…." 국후 고백은 이 한마디였다.
국수전 도전기와 함께 되풀이되고 있는 흑번필승의 전개. 그 사슬을 누가 먼저 끊을지도 시리즈의 쏠쏠한 재밋거리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