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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위해 사무실 문을 나섰는데 비가 내린다. 책상 모퉁이에 세워둔 우산이 두 개나 되건만, 되돌아가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을 짧은 거리건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걷는다. 낭만은 아니다.

깊고 고요한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기분이 이럴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우울함이 가슴을 두드린다. 한 달 사이에 쉴새없이 몰려온 크고 작은 비바람에 지쳐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테이블에 녹차를 한 잔 갖다놓은 뒤 뉴스를 보고, 문화산책…. 습관처럼 이리저리 마우스를 옮기다가 바둑TV 홈페이지의 '박치문의 바둑시론(時論)'에 눈길이 닿는 순간 비로소 긴 한숨을 몰아쉰다(안도의? 나는 무엇이 불안한 것일까).

아, 산이다. 소백산(小白山)….

산을 오르내리듯 유려한 선배의 글은 소백만큼이나 넉넉해 보인다. 함께 올랐다는 일행이 모두 반가운 바둑동네 사람들인 까닭에 더 그럴 수도 있겠다. 마음이 안온해지는 것은 나도 우아한 소백로(小白路)의 동선(動線)과 맵시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그런 한때의 산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산을 생각하면 늘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진다.

지난해 여름, 월드컵의 열기가 거리를 온통 붉게 물들일 때 지리산을 찾았었다. 가까운 임선근 9단과 등반의 베테랑이라는 권성혁 사장과 함께였다. 노고단에서 일박하고(이곳 휴게실에서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보았던 것 같다. 안정환 선수의 골든골이 터지는 순간 낯선 옆사람을 부둥켜안고 환호하던 기억이 새롭다).

이때의 지리산종주는 내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느리게 걷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전까지 일관돼온 나의 산행목적은 '가능하면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알 수가 없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 것인지….

솔직하게 말하면 임 9단이 소개한 권 사장이라는 분의 첫인상은 그다지 상쾌한 것이 아니었다. '등반의 베테랑'이라는 분이 걸음은 왜 그렇게 느린지, 앞서 가는 사람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지는 것은 물론, 뒤에 쫓아오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언제나 한편으로 비켜서서 '먼저 가시죠'하고 앞길을 양보하는 모습은 '가능하면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것'만 알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권 사장이 왜 등반의 베테랑인가를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는데도, 씩씩하게 또는 약간의 비웃음을 날리며 앞서 떠난 상당수의 사람들이 우리의 시야를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멀지 않은 곳, 나무그늘이나 바위그늘에 기대앉아서 숨을 헐떡이거나 물을 마시며 쉬고 있었다. 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그 충격이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느리게 걷는 것'이 결코 '목표지점에 늦게 도착하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후로도 우리 앞에 떠난 사람들이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뒤에 자연스럽게 알게 된 일이지만, 권 사장의 느린 걸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으로 지리산종주에 나선 임 9단과 나의 속도를 컨트롤하면서, 깎아지르는 급경사는 길지 않지만 한없이 넓고 깊은 지리산의 동선까지 생각한 걸음이었다. 체력에 특별한 자신이 없던 내가 그렇게 쉽게 지리산종주를 해치운 것은 다 그런 배려 때문이었던 것을, 한동안 얼마나 뻐기고 다녔던지 다시 생각하면 부끄럽다.

느리게 걷는 미덕(美德).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느린 걸음이 내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느린 걸음은 자연을 관조하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산을 오르내린 사람들의 눈빛이 깊어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나는 오랜 세월, 제법 많은 산을 오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아는 나무나 꽃의 이름이 없었다(그저 오르고 내려가기에만 바빴으니). 평생의 산행에서 알게 된 꽃, 나무들의 이름보다 3박4일의 지리산행에서 알고 구별하게 된 꽃, 나무들의 이름이 더 많을 것이다.

산책을 하듯 느린 걸음으로 산을 오르며 가문비나무, 구상나무(나는 이 둘을 구별하지 못했었다), 개비자나무, 지리산오갈피나무, 비비추, 원추리, 타래붓꽃 등 새로운 친구를 사귀듯 꽃이며 나무들의 얼굴을 익히는 일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하지도 못했던 재미요, 즐거움이었다(지금 가면 다시 이름표를 찾으며 허둥거려야겠지만…).

삼대에 덕을 쌓아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천왕봉의 일출을, 첫 지리산종주에서 보았다는 희열도 작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느리게 걷는 법'의 미덕을 알게 됐다는 뿌듯함이 더 컸던 것 같다(새삼, 권 사장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하산길에서 문득, 이창호의 바둑을 생각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좀더 빨리, 빨리!'를 외치는 이 급박한 시대에 홀연히 나타나 느린 걸음의 무량한 공능(功能)을 보여주고 있는 이 특별한 천재는 이미 나이 20에 '바둑은 끝없이 먼 길을 가는 것'이라며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 않았던가.

어느날 훌쩍 먼 길을 떠난 사람과 불가해(不可解)한 인연과 '어려울 때면 산을 찾으라'던 선배의 말과 이창호의 바둑과 어줍잖게 이해한 느림의 철학과….

산에 가고 싶다. 머릿속에서 무질서한 떠돌이별처럼 끊임없이, 소란스럽게 부유(浮游)하는 애증의 파편들이 이제는 그만 잠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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