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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서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번 LG배 결승3번기 사태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2020년 11월 2일 삼성화재배 결승1국이 한국기원과 중국기원 간 온라인대국으로 열렸다. 코로나 탓에 비대면 인터넷으로 치른 이 대국에서 흑을 든 신진서 9단이 21번째 수를 1선에 두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마우스 미스였다. 초반 포석단계에서 1선 착점은 한 수 포기한 거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실수. AI는 10집 손해로 계산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신진서 9단이었다. 잠깐 어리둥절해하던 그는 기원 담당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자신의 마우스 미스를 받아들이고 바로 대국에 임했다. 신진서 9단은 이 바둑을 허망하게 졌다.

“마우스 미스일 확률은 없었다. 바둑판을 띄운 큰 모니터가 옆의 노트북과 연결돼 있으니까 노트북에서 USB로 길게 끌고나온 마우스 케이블이 노트북의 터치패드를 건드려 벌어진 일”이라는 걸 신진서 9단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터치패드에 케이블이 끌린다는 사실을 빨리 알았어야 하는데 실수하고 나서 알게 됐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고 바둑을 두는 선수나 대회를 개최하는 한국기원이 (더) 신경 써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것도 승부의 한 면이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태도는 4년 뒤 낸 자서전에서도 볼 수 있다. “초반이었지만 너무 치명적인 착점이었기에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이 어려워 패하고 말았”지만 “결론은 내 과실이었다”고 싹싹하게 인정하면서, 정작 그 다음판(결승2국)에서 프로로서 멘탈을 잡지 못한 채 반집패를 당한 자신을 오히려 더 자책했다.

그때 신진서 9단과 삼성화재배를 다툰 중국기사가 커제 9단이었다.
결승3번기에서 첫판은 누가 기선을 잡느냐, 이에 따라 승부의 흐름이 절반은 결정되기에 무척 중요하다. 그렇기에 어찌하여 신진서 9단은 마우스 미스가 났을 때 강하게 어필하고 <이의제기 버튼>을 클릭해 “한수 물러 다시 두는 게 마땅하다” 요구하지 않았을까?
관전자로서는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때 심판의 처사 또한 매우 못마땅했거니와 상대 대국자인 커제 9단이 “이건 말도 안되는 수이니 한 수 물러 다시 두자”며 쿨하게 대응해 줬더라면 더 멋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잠시잠깐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신진서 9단은 이 모든 상황을 안고 가는 게 승부사로서의 자존심인 양 대처했다.

“일단 충격이기도 했고…. 마우스 미스가 결국은 (내) 실수인 부분이 있으니까 사실 (이의제기 버튼 누르기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5년 뒤 LG배 결승3번기에서 불거진 커제의 ‘사석 반칙패’ 논란
제29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결승3번기가 ‘사석관리 룰 위반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결승2국(경고 누적 2회, 커제 반칙패)과 결승3국(커제 기권패)이 연거푸 정상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과 중국의 바둑룰이 다르고 계가방식에 차이가 있다 보니 사석(잡은 돌) 처리, 간수에 대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피차 오랜 기간 문화적 관습과 습관으로 자리 잡은 관념이라 한국과 중국의 입장차이가 현격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대회진행에 자못 미숙한 점이 있긴 했으나) 엄연히 주최국이 정한 룰에 따라 치른 대회결과를 무효로 하고 재대국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거 상당기간 좀 시끄럽겠구나 싶었다. 이럴 때는 팩트를 보도하는 것조차 오히려 논란을 부추길 수 있어 신중을 기하게 된다. 주관적 견해가 들어가는 논평은 더욱 그렇다.

양국 팬들 사이에, 특히 피해를 봤다고 여길 중국바둑팬들 사이에서야 일파만파 파문이 번지는 것은 예상했던 바이다. 누구나 자국선수를 응원하게 돼 있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기사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기에 열띤 공방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데 냉철한 상황판단으로 멀리 내다보며 중심축을 잡아줘야 할 중국바둑의 어른격 인물들까지 일제히 격렬한 목소리를 내더니, 급기야 ‘바둑외교단절’을 연상케 하는 중국바둑협회 명의의 성명발표와 연이은 갑조리그 용병금지 조처를 보고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길 빌지만, 마치 ‘무역보복’과도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결정이 양국 바둑발전에 정녕 도움이 되는가?

○● 중국바둑협회 성명 “LG배 결승3국 결과 인정 불가” ☜ 관련기사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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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중국바둑계의 전례 없는 격한 반응은 ‘한중바둑 35년 우호관계, 양국의 신뢰관계’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바둑폐국정책으로 회귀하겠다는 시그널로 보여 실로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만에 하나라도 결코 일어나선 안될 상상이지만, 향후 자국의 여론압박이 더 거세지면 ‘한국이 주최하는 세계대회 전면 불참’ 같은 초강경 후속조처까지 불사하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위태롭고 불안한 조짐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 여겼던 애초의 생각을 접고 귀성길을 미룬 채 같잖은 글이나마 급히 올리게 되었다.





한중 바둑우호 35년은 2인3각처럼 어깨동무하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기자는 1988년 월간바둑 잡지에 입사한 이래 햇수로 38째 바둑현장을 봐왔다. 중국바둑은 1993년 한중수교가 맺어지기 이전인 1990년 후지쓰배 8강전(서봉수 9단 대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 베이징에서 열릴 때부터 취재하기 시작했으니 양국의 관계발전을 고스란히 목격한 셈이다.

세계바둑이라 칭해봐야 한중일 세 나라, 여기에 대만까지 가세해 동아시아의 네 나라가 이끌어가는 판국에서 중국은 한국과 더불어 바둑최강국을 자처하던 일본을 맹렬히 협공하는 형제와도 같은 친밀감을 공유하며 발전했다. 솔직히 1980년대까지 일본바둑이 최강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은연중 한국과 중국바둑을 아류(亞流)로 보는 듯한 기분을 지울 길 없었고 어쩌면 이러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서도 양국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이렇게 상호 협력과 존중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2010년 무렵까지는 한국이 앞장 서 세계기전을 창설하며 주도했고 이후로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중국이 다양한 세계기전을 선보이며 이끌고 있다. 이 가운데 바둑계의 프리미어리그(EPL)라 일컫는 중국 갑조리그가 자리했다. 일본바둑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건재하긴 하지만 어느 순간 세계무대에서 한발 처지고 말아 지금은 한중 두 나라가 치열하게 장군과 멍군을 부르는 형국이 되었고, 이마저도 신진서 9단과 같은 소수의 한국기사를 제외하면 중국기사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나, 행성이 서로의 중력과 인력으로 공전과 자전을 유지하듯이 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천체란 없다.

중국바둑 일인자들…내 기억 속 그들은 호걸 대인배였다
일찍이 중국에 해외취재를 갈 때나 한국에서 중국의 거장(巨匠)들을 마주할 때마다 바둑에서뿐 아니라 그들의 인품에서도 마치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올리는 정화수(井華水)와 같은 품격을 느끼곤 했다. 우칭위엔(呉清源) 선생의 맑고 선승(禪僧) 같은 이미지가 그랬고 천주더(陳祖德) 9단의 호수마냥 잔잔하고 온화한 성품이 그러했다. 녜웨이핑(聶衞平) 9단은 한국팬이 좋아하는 대륙의 영웅이었다.

어디 앞선 세대뿐이랴. 하필이면 이창호시대에 선봉에 선 탓에, 밤하늘의 별처럼 더 오래도록 빛났어야 마땅했을 쿵제(孔杰) 9단의 깨끗한 매너와 고귀한 품모는 어떠하였으며 논어와 장자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는 철학자연(哲學者然)한 스웨(時越) 9단. 그리고 번잡한 데 매달리지 않았던 창하오(常昊) 9단의 선 굵은 행보도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이세돌시대를 끊임없이 괴롭힌 구리(古力) 9단의 이미지는 한국인에겐 가히 기사(棋士)라기보다는 그지없이 사람 좋은 도인풍(道人風)에 가까웠다.

한국사람들이 중국을 ‘대륙’으로, 중국인을 ‘대륙인’으로 칭하는 건 단지 땅덩어리가 넓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만이 아니다. 적어도 기자 개인은 사고(思考)의 깊이와 언행의 무게가 결여된 ‘바둑만 한 냥’보다는 바둑은 설령 그에 못 미칠지언정 ‘사람 한 냥’의 승부사를 선호한다. 승패를 다투는 반상의 승부는 유한한 것이나 감동과 영감을 주는 승부사의 행적은 후대에까지 자주 소환되기 때문이다. 기자가 누차 ‘그 시대의 일인자는 곧 그 시대의 권력’이라고 말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영향력 있는 리더(지도자)의 말과 행동은 메시지의 전파력이 크기에 더 진중해야 한다. 수읽기를 거듭한 끝에 그래도 이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들면 그때 비로소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균형감각을 갖고 순간의 울분과 감정을 잠시 죽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 이번 사태처럼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가 돌발했을 때 그래도 무게추를 잡아주는 어른 역할을 해주어야 할 존재다. 35년 한중바둑 우호가 이 일로 하루아침에 단절되는 불상사는 절대 없어야겠기에 거는 기대다.



한중 두 나라는 반상의 도반임을 잊지 않았으면…어른들의 역할이 필요할 때
마샤오춘(馬曉春) 9단 같은 경우는 결승2국 반칙패에 누구보다 격분하며 곧장 "한국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바둑도 역사에 남을 일이다"라고 정치적인 상황까지 끌고와 비아냥대면서 "만약 내가 커제였다면 내일 경기를 바로 기권하고, 앞으로 한국에서 열리는 어떤 대회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것"이라고 부추겼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은 정말로 뻔뻔하다. 진정한 바둑팬이라면 특히 삼성과 LG 등 한국제품에 대해서 불매운동으로 커제를 지지해야한다"고 국수주의적 감성에까지 호소하고 있다.

또 이때를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갑조리그에서 한국용병과 자국선수가 받고 있는 출전료를 거론하며 차제에 용병제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들도 터져나오더니 화답하듯 중국기원은 실제 그런 공문을 갑조리그 각 팀에 보내 실행에 나섰다.

중국팬이나 동료기사들이 격분한 건 이해한다 치자. 대회 스폰서까지 나서 목소리를 드높인 건 실망스럽다.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을 후원하는 니장건(倪張根) 회장은 열렬한 바둑애호가로 한국에게도 참말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분조차 SNS인 웨이보 계정을 통해 “이런 말도 안되는 룰이 어디 있느냐. 규칙보다 우선하는 것은 바둑정신이다. 다음 몽백합배부터는 변상일 선수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니 마음이 무겁다. 대회 스폰서가 이러면 이것은 한 선수에게 대놓고 출전을 금지하겠다는 사형선고와 같은 것 아닌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이러면 안된다. 중국바둑계에 대인배의 품격은 다 사라진 것인가. 한중 수교를 맺은 1993년 이전 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라면, 적어도 바둑계의 리더군(群)만큼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생각이나 행동과는 달라야 한다. 다들 한곳을 향해 분노할 때 냉정하게 이성을 발휘해 최선이 아니면 차선, 그도 여의치 않으면 차차선책이라도 찾고 설득해 이끌어가는 어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변상일 9단도 피해자…마녀사냥은 비겁하다
중국인들은 유독 ‘의리’를 중시 여긴다고 한다. 변상일 9단을 ‘비매너 기사’로 낙인찍고 몰아세우는 이유는 그가 심판에게 커제의 사석룰 위반을 일러바쳤다는 것 때문으로 보인다. 이 또한 한국과 중국의 문화차이에서 기인한 과도한 오해가 작용하고 있다.

사건을 단순화하여 살펴보자. 원인제공을 한 사람은 커제 9단이다. 한국의 사석 룰에 대해 백 퍼센트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더라도 한국이 주최하는 대회에는 한국룰에 따르고 중국이 주최하는 대회에는 중국룰을 적용해온 게 그간 원칙이었다.

한국기원은 몇 차례에 걸쳐 개정한 사석룰에 대해 중국기원에 고지했고 그들도 선수들에게 단단히 유념할 것을 당부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은 바로 고치기 힘든 것이어서 바둑에 몰입한 커제 9단은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에 사석을 놓고 말았다. 불만은 컸으나 경고 2회 누적으로 반칙패를 당한 결승2국이나 기권패로 불미스럽게 마무리하고 만 결승3국에서도 사석룰 위반에 대해서는 끝까지 꼬투리를 잡지는 않았다. 룰은 룰이니까 인정을 하지 않을 순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엄연히 규칙을 위반한 것이니까. 룰의 개악(改惡)을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중국바둑팬들은 한국이 개정한 사석룰이 엉터리 같은 것이었다며 거세게 성토하고 있으나 커제 9단이 결승3국에서 문제 삼은 건 심판의 개입 시점에 대해서였다. 천신만고 끝에 대마사냥으로 대역전 한방을 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는데, 바로 그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서 한국심판이 개입해 한국기사가 유리하도록 도왔다는 이유였다. 변상일 9단이 둘 차례에 대국을 일시 중단시키는 행위는 그가 더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와 같다며 공정치 않다고 큰소리로 항의했다. 왜 자기가 둘 차례에 개입하지 않느냐는 거다.

그러고선 결국 대국장을 박차고 떠나버렸다. 끝내 선수가 대국장에 복귀하지 않아 심판은 ‘기권패’를 선언했다. 엄밀히 말하면 경기장을 나가버렸으니 ‘몰수패’가 맞다.

심정은 이해하나 이 항의 또한 ‘기권의 명분’으로 삼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이다. 심판이 반칙을 발견한 이후 휘슬 타이밍을 가려서 불라는 얘기였는데, 김지석 9단은 이에 대해 커제 9단이 바로 반칙을 인정했으면 경고와 동시에 벌점을 부과하는 시간은 10초면 충분했을 것이고 “오히려 중단시간이 길게 소요된 이유는 커제가 판정에 불복하며 항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중국바둑협회가 “LG배 결승3국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고, 커제 9단은 이튿날 시상식을 보이콧한 채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커제 9단의 울분은 이해하나…
중국에 돌아간 커제 9단은 자신의 웨이보 계정 프로필을 ‘세계바둑 8관왕’에서 ‘9관왕!’으로 수정했다. 자기가 진정한 우승자라는 것이다.
그는 2020년 삼성화재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신진서 9단의 마우스 미스가 발생했던 바로 그 대회다) 중국기사 중 구리 9단이 보유하고 있던 세계대회 최다 8회 우승과 타이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이번 대회에, 그것도 7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던 변상일 9단을 맞았으니 신기록 달성에 자신했을 터, 절호의 기회를 놓친 그 분한 마음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 같은 치기 어린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는 것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우리 같은 바둑기자들의 입장에서는 밋밋한 스타일의 스타보다는 커제 9단처럼 어그로(aggro 억지주목)를 끌어주는 뉴스제조기가 좋다. 상대를 뒤흔들기 위한 심리전이나 위트 수준에서 비꼬고 무시하는 언사로 자극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팬들도 재미는 있어 하니까. 그렇지만 상대에 대해 존중하지 않고 천둥벌거숭이마냥 무례를 일삼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사석룰을 위반하도록 한 것이 변상일 9단이었던가?
결승2국이 반칙패로 끝나고 커제 9단은 웨이보에 주절주절 심경을 쓰기를, “변상일은 ‘실력’이 아니라 ‘시력’이 좋은 기사”라고 비꼬았다. 심판에게 손짓을 해 알린 것을 마치 고자질이나 한 행위마냥 조롱한 말이다.

그렇다면 23년전 제26기 일본 기성(棋聖)전 도전5국의 일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류시훈 9단이 만약 정상적으로 계가했다면 6집반을 이긴 바둑이었는데 마지막 공배를 메우는 과정에서 무심코 자충을 두어 흑돌 6점이 창졸간에 따먹히고 거꾸로 불계패 당한 사례 말이다. "바둑을 다 두었다는 의사표시가 서로 있었다"고 생각하는 류시훈 9단과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는 왕리청 9단의 말이 달랐다. 그들도 무아지경이었을 테고 국면은 다 두어 번갈아가며 공배를 메우던 상황이었다. 그런 장면에서 상대가 무심결 돌을 메워 단수 형태가 되자마자 심판(입회인)에게 알려 흑돌 6점을 들어낼 수 있는지 물어본 왕리청 9단에게도 실력이 아닌 도둑질로 1승을 훔친 비매너 기사라 비판할 것인지. 아마추어들의 시선으로야 모양새 빠지는 승리라고 입에 올릴 수 있겠으나 냉철한 프로세계에서는 룰대로 했을 뿐 아니겠는가.

그토록 경멸해마지 않는 변상일의 행위에 대해서라면 사이버오로의 다음 기사도 한번 볼 것을 권한다. 커제 자신의 수읽기 흐름만 끊어진 게 아니라 상대방 또한 이러한 사석룰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 LG배 결승2국 때 심판에게 커제 선수의 사석이 돌뚜껑 위에 놓여 있지 않음을 알린 순간이 있었다. 당시 어땠나?
“사실 벌점을 (커제 선수가) 처음 (위반)했을 때부터 집중이… 좀 혼란스러워서 집중이 안 됐다. 그런데 사석이 보여서 집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변상일, 이슈됐던 룰에 대해 의견 밝혀 ☜ 관련기사 클릭



한국기원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이 문제를 풀어야한다
어쨌거나 꽃가루 행차로 대미를 장식해야 할 결승전과 시상식이 바둑사에 다시없을 파행으로 끝났다. 일부이긴 하나 중국에서도 우승, 준우승을 따진들 무슨 소용? 대회가 없어지면 그만인 것을…, 이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중국바둑협회는 강한 성명에 이어 실제 이 사태로 기인한 후속조처를 단행했다. 갑조리그 용병 채용 금지는 한국기사들을 타격하기 위한 느닷없는 (그리 볼 수밖에 없는) 결정이라는 걸, 삼척동자도 안다.

이번 사태로 그들이 굳이 그렇게 하는 게 커제 9단을 위로하는 길이고 중국바둑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라 생각하여, 한국을 그렇게 대하고 앞으로 실제 그렇게 가겠다면 뭘 어쩌겠는가. 달랜다고 막아지겠는가. 변상일 9단 한명이 앞으로 몽백합배에 참석하지 않겠노라 약속하면 해결될 일인가 이게?

부디 당부하노니, 이에 한국기원과 한국팬들께서는 맞불을 놓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 35년간 긴밀히 쌓아온 양국의 동반자 관계를 생각하고 바둑의 장래를 우선 생각한다면 한국기원은 중국기원과 중국바둑팬들께, 더불어 멋진 승부를 보지 못한 한국바둑팬들과 후원사에도 먼저 진심으로 공개사과할 것을 제안한다. 어쨌거나 대회운영이 원활치 않았던 건 사실이고 이에 따른 책임이 있으니까. 그 선으로 부족하다면 그들이 진짜 원하는 바를 물어보고 그건 그때 가서 대처할 일이다.

아울러 이 기회에 사석룰을 비롯해 바둑규정 전반에 걸쳐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가령 몇가지만 얘기해 보자. 계시기를 백쪽 오른쪽 사이드 테이블에만 두고서 반드시 착점한 손으로만 누르게 함으로써 흑쪽이 행여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버튼을 누를까봐 요다 노리모토 9단처럼 테이핑을 하고 대국하는 진풍경을 보는 것도 볼썽사나웠고, 또 백쪽 사이드에 두는 것만으로도 흑쪽은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니 공정치 않다.

세계대회는 억대의 상금이 걸린 대회다. 준결승, 결승전만이라도 예전처럼 전문계시원을 두어 선수들이 좀더 바둑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명국을 생산할 수 있도록 배려함직하다.

모든 스포츠는 관전자의 재미도 생각해야 인기를 끌 수 있다. 그런데 바둑은 합리와 공정이라는 구실만으로 룰을 그때그때 선수들의 목소리에 우선해 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번 사석룰 개정만 해도 그렇다. 사석에 의미를 두지 않는 중국기사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와 일란성 쌍둥이 룰을 적용하고 있는 일본기사들에게 물어보라. 모름지기 프로기사라면 누가 돌통 뚜껑에 놓인 사석을 일일이 헤아려 가며 형세판을 하는가.

심판 수급의 문제로 정히 현역기사가 심판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국가대항 성격을 띠는 세계대회만큼은 언어소통자 우선으로 배정하든지 아니면 앞으로는 제3국 심판이 주관해야 이번 같은 뒷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미디어시대라지만 그간 바둑TV(K바둑 포함) 제작 편의로 맞추다 보니 살릴 관행조차 버리고 스스로 무미건조해져 버린 면은 혹여 없는지 돌아봤으면 좋겠다.



이겼지만 졌고, 졌지만 이겼을 때가 있다
주제 넘는 일이기는 하나, 기자가 커제 9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그의 선배인 쿵제 9단이 이미 했기에 옮겨본다.

"때로는 이겼지만, 사실은 졌다! 졌지만 이긴 것이기도 하다. 바둑 경기에서 기품과 기도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며, 심지어 승패 자체보다도 고귀한 것이다. 줄곧 커제의 대담한 성격을 높이 평가하며, 그가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고 스스로를 만들어 가기 바란다. 인생의 길은 멀고도 멀기에 구경을 하면서 가자. 힘내기를 바란다."

일찍이 18세부터 세계바둑을 호령하기 시작한 커제 9단은 분명코 위대한 기사다. 축구로 말하면 손흥민 선수만큼이나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승부사로 기록될 것이다.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으면 ‘찰칵 세리머니’를 한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런데 그의 이런 트레이드 마크를 ‘쉿 세리머니’로 대신할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2020-2021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23골)을 차지한 다음 시즌에서 탈장과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여파로 잠시 주춤했을 때 레스터전에서 보인 쉿 세리머니다. 전 시즌 득점왕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골 침묵이 이어지자 “30세의 선수가 드디어 에이징 커브(Aging Curve)가 왔다”느니 “손흥민시대는 갔다”느니 숱한 언론과 팬들로부터 비난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그가 가진 실력과 활약에 비해 유독 평가절하 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그 배경에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깔려 있다. 그럴 때마다 손흥민 선수는 말보다는 득점과 실력으로 번번이 건재를 입증해 보였다.

2022년 9월 레스터전에서는 이례적으로 벤치에서 시작했고, 후반 14분에야 교체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경기장에 들어가자마자 13분 만에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6대2 대승을 견인했다. 폭죽 터뜨리듯 3골을 몰아친 이날 손흥민은 관중석을 향해 ‘쉿 세리머니’를 보였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SNS에 딱 한 줄로 대신했을 뿐이다.

13분 21초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에 다시 한번 알리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프로란 이런 것이다. 긴 말과 변명, 반외에서의 신경전과 심리전보다 남들이 의심할 때 만천하에 보란 듯이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오직 실력이다. 이게 승부사의 방식이다. 이번 아픔을 딛고 커제 9단도 반드시 그리할 것이라 믿는다. 조만간 커제 9단의 쉿 세리머니를 볼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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