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교.(합니까. 그렇습니까.)”

경상도 버전으로 (교)는 중간 존대어고 윗사람에게 간혹 시비어도 된다.

“응.”

어머니는 퇴원 준비하고 막간을 이용해 병원 샤워 실에서 들리는 두 부자의 짧은 대화

과연 지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50키로도 안 나가는 몸 구석구석을 바디 샴푸로 문지르며 S는 생각에 잠긴다.

여름날씨에 오랜 투병으로 등창에다 앙상한 몸은 온갖 상처딱지와 잡티들로 엉망이다

말을 잘 못하는 상태에 반 수족 불수라 물소리에 못 듣다 뒤늦게 손짓을 보고 다가가니

“머리는 좀 시원하게 감아도.”

몇 번을 되묻고서야 겨우 소통이 되었다

한 달여 동안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닦기만 하고 제대로 감지 못했으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S는 주문이 내심 가관이다

그래도 요즘은 부탁을 하지만 얼마 전까지 명령이었다.

가족을 버렸다 병들고 다시 찾은 지 30여년에 천륜의 면책권은 다 누리려 했었다.

마음으론 몇 번을 내다 버렸지만.

내가 알아서 하도록 있으면 혹시나 미안한 마음이 경기할까봐 그런가.

“그럽시다.”

내가 부처는 아니지만 키우는 쥐새끼도 끌어안고 24시 응급실을 찾는 세상에 천륜인데 뭐.

부와 명예를 얻지 못한 삶 나에겐 저승길 변명거리라고는 이것뿐이다

철들기 전부터 노래했던 할머니 100수 호강을 비바람 겨우 피하고 세끼 공양만으로 때우며

마지막 10년의 치매고개를 가까스로 넘었을 때 못해드린 것만 떠올랐지만

어머님은 건강하시다 자는 잠에 가시기를 매일 새벽 목욕재계 후 감로수 올리고 삼배로 빈다.

와중에 운명의 태클에 걸려 떨어진 천륜 그 깊고 넓은 애증의 강.

무심하게 발가락 사이사이를 씻다가 갑자기 울컥한다.

(내가 왜 이래야 되나.)

원수의 발가락 때를 후벼 파는 마음은 혼자만이 아는 일이고 각고의 인내가 필요하다

대가 없는 일에 누가 무슨 논리로 그를 알겠는가.

미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의 정의는 논리가 아니라 감성이다

사람을 깨우치고 소통하고 간혹 그 이상의 이유로 달변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건 하나다

인간 본연의 심성에 호소하는 것이고 이끄는 대로 또 좋은 곳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S는 갑자기 샤워기를 얼굴에 들이민다.

이미 온 몸이 젖었다

샤워기를 들이민 S도 몸을 맡긴 당신도 상념으로 눈을 감았다

합의하지 않은 묵언의 시간.

그것은 수많은 양해의 이야기를 절제하는 시간이다

“옷 벋고 하지.”

S는 언뜻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방금 들어 온 어머님의 말인지 아버지의 말인지 구분을 못했다

어쩌면 두 분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40전에 버림받은 한을 접고 아들의 도리에 생계가 걱정되어 뛰어 든 억지 춘향의 모정

죽여 버리고 싶은 삶을 부여잡고 있는 가식적 도덕성.

그리고 매번 한계를 느끼는 인내와 가난을 변명하는 자부심.

S는 무지한 이의 산물이 되어 버린 술과 담배만 늘어가고 악몽에 시달린다.

20대 초반에 시작하여 이제 50허리가 꺾인 중늙은이에게 몰려오는 무기력감에서.

그 모순과 현실과의 갈등을 어떤 논리로 해석하겠는가.

버티는 이유는 감성이다.

죄책감은 양심에서 나오고 그 양심은 인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논리가 인간을 발전시켰다면 감성은 인간을 지켜왔다

술자리에서 친구 선후배들과 넋두리를 해봐도 모두 자신의 입장에 대한 합리화와 변명이다

요양원에 보낸 사람은 요양원으로 보내는 게 당신과 자신과 가족을 위해 최선이고

그것이 도덕성과 현실을 고려한 행동이라고 자신을 질책했고

일찍 부모를 여읜 이는 경험하지 않아 좀 더 추상적 도덕성을 내세워 나보다 앞서갔다

가보지 않은 사람과 동행하기도 어렵지만 혹여 동변상련을 만나면 그날은 거의 둘 다 죽는다.

S는 결국 술만 마시게 되는 것이다

애증의 강을 허우적대는 그에게 지푸라기도 없고 가라앉으면 마시고 떠오르면 숨을 쉰다.

가족 간이라도 희생은 갈등을 부른다.

남은 것이 얼마지 않은 사람과 많이 남은 사람의 우선권에 대한 이견이다

이것이 논리와 감성의 대립이고 시대적 착시며 이는 실리를 챙기고 대세의 압박을 받는다.

나무와 꽃과 향기를 위해 개간하고 가꾸면 숲은 자연히 유지되는 것으로 아는 사람들은

토사의 유출로 들이닥치는 산사태를 모르고

무지한 모습으로 흙을 부여잡은 잡초는 순리를 따를 뿐이지만 그 어떤 명분에 짓밟혀도

집요하게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미안한 사람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의 길을 찾지만 미안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한다.

부모를 자식으로 입양하지 않으면 도리는 못한다.

부모가 늙으면 자식으로 키워야지 공양하려면 이미 가식의 늪으로 빠져 버린다.

S는 그것이 소신이요 변명이다

나를 바라보는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 죽음으로도 담보할 수 있는 말.

모두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껏 나를 사랑한 사람들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그들을 조금만 더 사랑해주고

지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나머지를 모두 받치고 싶다

그러나 양해 받지 못하는 사랑에게 미운털이 박힌다.

하지만 그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지 않고는 조금 더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그것이 돌아온다.

나의 대본은 악역이고 애드리브는 운명과의 패싸움이다

혹여 내가 당신께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신뢰를 잃더라도 나를 오해하지 말고

모두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S는 그것이 가장 두렵고 지켜야 할 로프를 피멍으로 잡고 있는 잡초의 외로움이다.

샤워 실에서 옷을 입히기도 어려운데 와중에 변을 봤다

간호사에게 벌써 두벌의 환자복을 가져왔으니 면목도 없고 해서 기저귀만 채웠다

흠뻑 젖은 사내가 기저귀만 찬 팔순 아들을 들쳐 업고 병실로 향한다.

우리보다 더한 사람들 못한 사람들의 무언의 격려와 양해로 무사히 침실에 눕혔다

후~우

아버지의 한숨에 덜컥 겁이나 바라보는 S에게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