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학사에서 잡극(雜劇)이란 명칭은 당(唐)나라 학자 이덕유(李德裕)의 『이문요문집(李文饒文集)』에 처음 나오는데, 그때의 잡극이 어떠한 형태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 잡극은 송나라 시대 잡극(宋雜劇), 원나라 시대 잡극(元雜劇), 온주잡극(溫州雜劇), 남잡극(南雜劇) 등등으로 꾸준히 발전해 나갔는데, 오늘날까지도 작품성을 인정받는 우수한 잡극들은 거의 모두 원나라 시대 때에 나온 것들이다.

원나라 시대의 잡극들이 왜 어떻게 해서 이런 후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몽골족이 지배하는 원(元)나라 시대에 들어와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벼슬길이 막혀지자 재능 있는 문인(文人)들은 당장 먹고 살기 위해 희곡 집필에 뛰어들었고 그 바람에 잡극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 양적으로 풍성해지고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던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현재 북경)는 풍요롭고 번화한 국제도시로서 기관(妓館)이나 희장(戱場)등 각종 유흥 오락 시설들이 많았다는데, 한족(漢族)이나 이민족, 외래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황제와 황실 사람들까지도 잡극을 좋아하였기에 잡극의 번영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나라 시대의 잡극은 대도(大都)가 중심이 되었기에 북방 문학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고 이민족들도 관람객으로 삼았기에 이민족의 언어들도 함께 섞어서 상연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원잡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하나 있으니,
바로 중국의 세익스피어로 불리고 있는 관한경(關漢卿)이다.
그는 대도(大都) 출신으로서 수많은 걸작 희곡들을 썼는데 만년에 항주(杭州)로 내려가서 자기 작품 《두아원(竇我寃)》을 그 지방 작가가 그 지방의 특성에 맞는 언어로 다시 고친 대본을 가지고 열연하는 여배우 왕령령(汪怜怜)의 연기를 보고 크게 칭찬했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듯 잡극이 널리 퍼져나가다보니 문학예술성이 높아져서 마침내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에 들어와 불후의 대작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시내암(施耐庵)의 수호전(水滸傳)이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어느 독자 분은 필자에게 이런 항의를 해올는지도 모르겠다.
바둑을 논한다는 글에서 왜 엉뚱하게 원나라 시대의 잡극이며 삼국지연의, 수호전 얘기 따위를 자꾸 들먹이고 있느냐?고…….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이 바둑과 실제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원나라 시대의 잡극 대가 관한경은 사회 저층을 대변하는 그의 산곡 남려일지화(南呂一枝花) 불복로(不伏老) 내용 중에, ‘나는 바둑을 둘 줄 알고 공도 찰 줄 알고 몰이사냥도 할 줄 알고 연극도 할 줄…….’ 라는 문장을 넣음으로 해서 오늘날 우리는 그 당시의 하층 계급민들도 바둑을 알았거나 즐겼다는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속에 등장하는 갖가지 바둑 이야기들과 수호전에 나오는 일부 내용(무송전)을 크게 확대시켜 완성시킨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소설 금병매사화(金瓶梅詞話) 속에 나오는 바둑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오늘날 우리가 고대의 바둑 룰을 짐작케 하는 단서들을 찾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잡극을 쓰는 작가들은 과거 외래어가 섞였거나 지방색(지방 언어)이 짙은 타 지역의 작품들을 자기 지방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번역하는 역할까지도 겸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할 것은 원나라 말기 1347년, 1349년에 출간되었던 현현집(현현기경)과 원나라가 망해서 북쪽으로 쫓겨 간 후 (1368년), 명나라가 시작되는 시기쯤에 출간되었던 수호전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이 두 작품은 명나라 말기에 들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새롭게 출간되어지는 묘한 공통점을 서로 지니고 있다.

즉, 원나라 말기에 나온 현현집(玄玄集)은 명나라 1590년대 무렵 왕창조(汪昌朝)에 의해 판각본 현현기경(座隱齊先生自訂棋譜全集)으로 다시 거듭나게 되었고,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에 나온 수호전(水滸傳) 속의 무송 이야기는 명나라 말기 1600년대 초 란릉소소생(蘭陵笑笑生)이라는 정체 불명의 작가에 의해 금병매사화(金瓶梅詞話) 라는 제목으로 증편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금병매사화에 대해 중국 문학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金瓶梅词话》的作者，据卷首“欣欣子”序说，是“兰陵笑笑生”。
<금병매사화>의 작자에 대하여 권두서에 '흔흔자'가 말하길 '란릉지역의 소소생'이라는 언급이 있다 

用古名称为“兰陵”之地有二，一在今山东峄县，一在今江苏武进县，以何者为是，尚无定论。
"란릉"은 오늘날 산동성 봉현이라는 설과 강소성 무진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고, 정확한 지역이 어디인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这位“笑笑生”究为何人，也至今无法确认。沈德符在《万历野获编》中说作者是“嘉靖间大名士”，袁中道在《游居柿录》中说作者是“绍兴老儒”，谢肇淛《金瓶梅跋》说作者是“金吾戚里”的门客，皆语焉不详。
이 "소소생"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오늘날까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심덕부가 지은 <만력야획편>에는 이 소소생에 대하여 "가정년간에 살았던 유명관료"라고 기록되어있고, 애중도가 쓴 <유거시록>에는 "소흥지역의 유학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조제가 지은 <금병매발>편에는 금나라 아숙리에 사는 '문객'으로 누군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后世人们对此提出种种猜测和推考，先后有王世贞、李开先、屠隆、徐渭、汤显祖、李渔等十几种不同的意见，但尚没有一种意见能成定论。
훗날 많은 사람들이 이 소소생이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유추를 해왔다. 왕세정이라고도 하고, 이개선, 도륭, 서위, 탕현조, 이어…….등등 수십종의 설이 있을 뿐이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런데 필자는 현현기경에 대한 학위 논문을 써가면서 관련 바둑 자료들을 찾아가며 일일이 사실 검증 작업을 벌이다보니 정말 우연찮게 금병매사화에 대해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추론 하나를 세우게 되었다.

네티즌 여러분들은 얼핏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그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원나라때 발간된 현현집의 서문부를 새롭게 다시 번역하여 왕창조의 현현기경 판각본으로 완성시켜준 작가가 바로 금병매사화를 쓴 작가(소소생)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고,
금병매사화의 남자 주인공 서문경(西門慶)의 캐릭터가 바로 왕창조일 개연성이 아주 높다는 추론이다.

그 작가가 구체적으로 어느 누구를 지칭하는지, 그리고, 필자가 어째서 이런 추론을 하게 되었는지는 다음 회에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