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달려!! 달려!”

경마장은 그야말로 광란의 분위기였다. 오늘의 마지막 경주이며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아니 오늘뿐만 아니라 이번 달에 가장 이목을 집중시키는 경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전한 10마리의 경주마 모두 그 이름만으로도 경마꾼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베팅머니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낚시터 사건 이후 끝날 것 같은 두용과 다비 두 사람은 다시 인터넷으로 바둑도 두고 가끔 아내의 눈을 피해 만나는 사이가 됐다. 두 사람은 이성적으로 갖는 특별한 교감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이해에 의한 존재였다. 두용은 아내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마음을 다비에게 느꼈고 다비는 지훈의 빈자리를 두용으로 인해 채웠다. 오늘도 정기검진을 핑계로 나온 두용은 다비를 만나 우연히 경마 얘기를 하다 뜻하지 않게 경마장을 찾은 것이다.

사실 두용에게는 경마장이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경마장 근처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오래 전에 결심했었다.

두용은 젊은 시절 경마에 미쳐 벌은 돈을 전부 경마장에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결혼할 여자를 만났다. 두용이 33살 때 일이다. 결혼이 눈앞에 닥치자 경마장 근처에도 안가고 돈을 모았다. 결혼을 하려면 그래도 눈비라도 막아줄 단칸방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혼을 3개월 앞두고 두용은 신혼살림을 차릴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을 모았다. 그런데 한순간 눈이 멀어 그 돈을 경마장에 날리고 말았다. 물론 여자는 떠났다. 여자가 떠나고 난 후 두용은 결심했다.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경마장에는 발걸음 하지 않겠다고. 10년전의 일이다. 그 10년전 결심이 다비로 인해서 깨졌다.

그렇다고 해서 경마장에 앉아있는 자신이 그때의 자신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눈이 시뻘개져서 자신이 찍은 경주마를 바라볼 뿐이었는데 지금은 탁 터진 경마장의 분위기와 질주하는 경주마들을 시원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첫 경마장 나들이에 즐거워하는 다비를 바라보며 즐기는 마음이 더 컸다.

다비는 자신이 찍은 말을 목청이 터져라 응원했다.

5마리의 경주마가 막 코너를 돌아 홈스트레치(home stretch)로 진입하고 있었다.

연승단식. 다비는 1,2등 두 마리의 경주마를 맞히는 마권을 구입했다. 1등은 두용이 선택해줬다. 7번, 백두산. 언제나 우승후보에 오르는 무적의 경주마다. 기수도 최고였다. 최고의 경마와 최고의 기수.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1등으로 꼽는 말이다. 문제는 2등이었다. 다비는 하루종일 3번을 고집했다. 경주마는 보지도 않고 3번을 택했다. 이번에도 3번이다. 블랙킹. 사실 10마리의 경주마 중 바닥권으로 분류된 말이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말을 선택한 것이다.

“3번 달려!! 블랙킹!!!”

다비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예상했던 대로 7번, 백두산이 1등으로 치고 나갔다. 그런데 예상외로 블랙킹이 홈스트레치 직선주로에서 선두권에 끼어 있는 것이다. 결승점까지는 200여 미터, 칠흑같이 검은 블랙킹이 3등으로 달리고 있는 ‘영산강’을 젖히고 눈처럼 하얀 ‘눈보라’를 바짝 쫓고 있었다.

흑과 백의 싸움.

2등과 3등의 다툼.

천국과 지옥.

경마장은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광란(狂亂). 다비도 그 중에 하나였다. 결승점이 눈앞이다.

1등 백두산. 그 뒤로 2등과 3등이 거의 동시에 들어온다. 그러나 블랙킹이 눈보라보다 머리 하나가 더 빨랐다. 경마장은 함성으로 폭발했다.

“이겼다!!”

다비는 감격에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두용을 와락 끌어안았다. 다비의 느닷없는 포옹에 두용은 당황스러웠다. 같이 끌어 안을 수도 그렇다고 떼어 놓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두용이었다. 그저-다비야, 너 지금 나를 안고 있어-라는 뜻을 “축하해.” 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비는 두용의 말에 머쓱해서 포옹을 풀고 말을 돌렸다.

“배당이 얼마여요?”

“620배.”

“620배면 얼마야?”

다비가 눈을 휘둥그래하며 말을 했다.

“5천원 베팅했으니까.. 310만원. 세금 제하면 250만원쯤..”

계산기로도 한참을 계산해야 할 숫자를 암산으로 즉각 해내는 두용이다.

“꺄악!”

다비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비명을 지르며 다시 두용을 끌어안으려다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거둬들였다.

집에 가는 동안 내내 다비는 차안에서 경마얘기였다.

“속이 다 시원해요.”

“그렇게 재미있었어?”

“네, 사람들이 경마에 빠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그래서 다비도 경마에 빠지겠다는 거야?”

다비의 말에 덜컥 겁이 난 두용이 정색해서 말했다.

“한번 빠져볼까요?”

다비가 짓궂게 대답한다.

“그러기만 해봐. 아저씨가 혼구녕을 내줄 테니까.”

“깔깔깔..아저씨 무서워서 경마도 못하겠네. 걱정 마세요. 경마장 가도 아저씨하고만 갈 거니까.”

두용은 힐끗 다비를 보았다. 티 하나 없이 밝은 모습이었다. 처음 봤을 때 핏기 하나 없이 절망의 늪에 빠진 듯한 다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3개월. 겨우 3개월 만에 다비는 그렇게 변했다. 기뻐해야 할 두용은 가슴이 아팠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 망각(忘却). 망각이 없는 인간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아픔을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두고 산다는 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다.

인간은 그래서 잊는다. 세월 속에서..

다비의 마음속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문지훈은..

아내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사람 같았다. 김군을 잃은 후부터다. 두용이 들어와도 아내는 응접실에서 멍하니 TV에 눈을 두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둥 누굴 만났냐는 둥 바가지를 긁었을 텐데 일언반구 한마디 없다.

“나 왔어.”

“응.”

두용의 말에 아내는 여전히 TV에 눈을 고정시킨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두용은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피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머리는 맑았다. 머리 속에 활짝 웃는 다비의 얼굴이 그려졌다. 두용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이상 만나서도 생각해서도 안되는 여자다. 자신을 살려준 남자. 그 남자의 심장이 지금 자신의 몸 속에서 뛰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남자의 여자에게 이성적 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여기서 멈추자. 더 늦게 전에 보내야 한다. 더 아프기 전에 헤어져야 한다.

- 문지훈. 다비, 아니, 자네 여자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자네의 존재에 대해서..

계절은 허무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더위를 피해 바다로 계곡으로 달려갔던 사람들이 이제는 감기를 걱정해야 하는 계절이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하늘은 눈이 시도록 파랗고 산은 온통 단풍으로 불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가올 동면의 계절을 앞두고 마지막 나들이에 몸살이 나고 있었다. 다비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째 다비의 문자는 가을을 찬양하는 글로 가득했다. 그것은 단풍구경이라도 가자는 암묵적인 압력이었다.

두용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고민해왔던 계획을 결행하기로 결심한다.

이 가을은..두용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잔인한 계절이 될 것이다.

- 우리 단풍구경이라도 갈까?

- 꺄악..♥♥

두용의 문자에 다비는 비명을 질렀다.

- 어디로 갈 건데요.

다비의 들뜬 마음이 문자에 그대로 전달됐다.

- 가까운 곳이야.

- 언제 갈건 데요.

- 지금. 내가 다비 집 앞으로 갈게.

- 기다릴게요. 빨리 오세요.

확실히 딸이 달라졌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다가 뛰듯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딸을 보고 다비의 엄마는 생각했다. 엄마가 다비의 방으로 들어가자 다비는 이 옷 저 옷으로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 이 옷 어때?”

“정말 예쁘다. 작년에 바둑리그 진행할 때 입었던 옷이잖아.”

“응. 근데 너무 정숙하지 않아?”

“좀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엄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다비는 입었던 옷을 벗고 옷장 안에서 다른 옷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어디 가니?”

“응. 바람 쐬러.”

“누구랑?”

“친구.”

엄마는 알고 있다. 그 친구란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어떤 사람이니. 몇 살이야. 직업은 뭔데..라고 묻고 싶은 엄마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지금은 그저 딸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고맙기만한 엄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무슨 상관인가. 공연히 딸한테 부담만 될 것이다. 엄마는 부지런히 몸단장을 하는 딸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전화를 받은 다비가 뛰듯이 아파트에서 나왔다. 다비를 본 두용의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타이트한 검은색 터틀넥 미니드레스를 입은 다비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늘따라 왜 저토록 아름다운가.

두용은 눈을 질끈 감았다.

굳이 그래야만 하는가. 양심 따위는 버려도 좋지 않은가.

이 세상에는 파렴치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장애인을 성추행하는 인간, 의붓딸을 성폭행하는 인간, 자식이 보는 앞에서 엄마를 강간하는 인간, 그래, 그들은 이미 인간임을 포기한 짐승이라고 치자. 내 아내를 보라. 아내는 결코 짐승이 아니다. 너무나 평범한 여자다. 이 평범한 여자는 남편이 버젓이 있는데도 마치 발정난 암캐처럼 수시로 다른 남자를 찾는다. 남편인 내가 눈치를 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10살이나 어린 직원도 그녀의 먹이가 됐다. 양심 따위는 이미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그것에 비하면 난 차라리 순수한 편이다. 내게 심장을 준 남자의 여자. 그 여자를 좋아해서 안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것이 죄가 된단 말인가. 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다.

- 난 저 여자를 좋아한다. 그것이 죄가 된다면 내 심장에 칼을 꽂아라!

“왜 이렇게 늦었어요?”

다비가 막 차에 올라타며 애교 있게 핀잔한다. 그녀에게서 향기가 났다. 아름다운 향기다.

“늦기는..빨리 왔는데..”

두용은 다시 핑도는 눈물을 감추려고 침을 꿀꺽 목구멍으로 넘기고 대답을 했다.

“어디 갈 거여요?”

다비의 들뜬 목소리다. 역시 아름다운 목소리다.

“가까워. 30분이면 갈 거야.”

두용은 차를 출발시켰다.

소나타는 용인 외곽도로를 달리다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차 한대 겨우 지나 갈 수 있는 좁은 비포장도로였다. 소나타가 덜컹거리면서 10여 분을 달리자 갑자기 눈앞에 확 트인 공간이 나왔다. 거기에 그림같이 지어진 2층짜리 전원주택이 있었다.

“꺄아..”

다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참말 예뻐요.”

전원주택은 마치 동화나라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붉은색 지붕에 붉은색 벽돌로 지은 주택이었다. 붉은색 주택은 뒷산의 붉은 단풍과 환상적인 풍광을 연출해냈다.

“이거 누구 집이어요? 아저씨 집?”

“이제 친구 집이지.”

“말투가 과거형이네요.”

“반은 내 몫인데 친구한테 넘겼어. 작년에..”

두용은 친구와 함께 3년 전에 투자목적으로 전원주택을 지었다. 두 사람은 전원주택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누구나 보면 탐날 수 있도록 최고의 설계에 최고급 자재를 사용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전원주택은 지은 지 3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팔리지 않았다. 바로 좁은 비포장 진입로 때문이었다. 아무리 집이 좋은들 진입로가 그 모양이니 그림의 떡일 수밖에.. 결국 두용은 심장병 치료비용의 압박 때문에 작년에 친구에게 자신의 지분을 헐값에 넘겨야 했다. 대신 전원주택이 팔릴 때까지는 두용이 언제든지 사용하라고 했다. 두용은 자신이 이곳을 사용할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채 1년도 안돼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다비는 집구경을 하면서 연신 재잘거렸다. 재잘거리는 그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비가 행복하면 할수록 두용의 가슴은 무거워졌다.

“우리 커피 한잔 할까?”

“커피요? 사람도 안 사는데 커피가 있어요?”

“아마 있을 거야. 그 친구가 가끔 오거든.”

“혹시 그 친구 분 지금 오는 거 아녀요?”

다비가 갑자기 걱정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왜? 뭐가 걱정이야.”

두용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누가 걱정한대요? 주인도 없는데 공연히..”

다비가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두용은 알고 있다. 다비의 걱정을. 그것은 둘만의 이 비밀을 다른 누군가로 인해 깨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비밀, 남녀간의 비밀, 단 둘만의 비밀. 그것은 너무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두용도 역시 설렜다. 그러나 그 설렘은 촛불처럼 흔들렸다. 앞으로 자신이 결행해야 할 커다란 임무 앞에서..

“진짜 커피가 있네.”

다비는 일회용 커피를 찾고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다비가 커피를 끓이는 동안 두용은 식탁에 앉아서 창밖을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단열과 방음이 잘 된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눈으로 바람소리를 들었다. 창밖의 나뭇가지들은 활처럼 휘었고 붉은 단풍잎들은 만국기처럼 갈가리 휘날렸다.

두용은 생각했다.

내 목소리가 저 바람에 전부 묻혀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허황된 바람이었다.

“아저씨 커피 드실 거여요?”

다비의 말에 두용은 대답했다.

“응.”

바람은 절대 두용의 목소리를 싣고 가지 않았다.

“커피 안 마시잖아요.”

다비가 두용의 앞에 커피 한잔을 놓으며 말했다.

“마시고 싶어.”

두용의 눈앞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이 놓였다.

“아..맛있다.”

다비는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탄성이 섞인 말을 뱉었다.

두용도 커피잔을 들었다. 천천히..아주 천천히.

병원에서 절대 마시지 말라는 커피다. 지금 그것을 마시려고 한다.

지금 이 마당에 커피 한모금, 커피 한잔이 무슨 대수인가. 이것이 독약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두용은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커피잔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 커피 한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아..이 향기로움.

뜨거운 커피가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려가자 두용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했다. 그 감격은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을 용암처럼 올려보냈다.

용기였다.

“할말이 있어.”

두용은 잔을 놓으며 입을 뗐다.

“뭔데요.”

막 다시 커피를 마시려던 다비가 눈을 반짝이며 두용을 보았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라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그런 다비의 눈을 두용은 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과 슬픔에 가득한 눈.

두 눈이 허공에서 만난다.

차마 다비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두용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밖에는 바람이 모든 것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14편에 계속)


본 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 표절을 금합니다.


1편부터 보기 <==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