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저 인간 왜 또 저러냐. 남들 보는 눈도 있는데...)

"전통과 클래식이라는 사슬이 나를 묶고 있는 한, 내면 깊숙이 잠재된 창조성은 사장되고 말지.

난 말이야, 어릴 때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야. 하지만,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대표되는 클래식의 권위는 나를 억눌렀어."

"바네사 메이를 알 거야. 그녀는 4살 때 런던 왕립 음악학원에 다녔고, 6살 때 바이올린을 배운 클래식의 천재였지.

그러던 그녀가 정통 클래식 악기인 바이올린에 전깃줄을 매달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어.

클래식계에서는 매우 놀랐지만 대중은 그녀에게 열광했지.

그녀가 클래식이라는 틀에만 안주했다면 그녀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끼를 발휘하지 못했을 거야."

"뮤지컬 맘마미아로 유명한 '박해미'라고 있지. 저승에 설치된 비디오로 맘마미아를 봤는데 가창력이 대단하더군.

알고 보니 박해미 씨는 성악을 전공했다고 하지. 그런데 그녀는 학교 다닐 때 성악만이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을 두고 다양한 관심거리가 있었다고 해.

그러한 그녀를 성악동료는 슬슬 피했지만, 지금은 어떤가? 박해미 씨는 다양한 활동으로 끼와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어."

"성악이라는 틀안에 자신을 가둬두기를 거부하고 그녀는 넓은 세상으로 나온거야.

난 지금 내 앞에 그 비싸고 유명한 스트라디 바리우스가 있다고 해도 깨부수고 말겠어!

그런 용기가 없으면 예술할 생각을 말아야지!"

"이창호는 기존의 권위를 가졌던 정석과 행마의 틀을 거부했어.

그는 스승의 자택에서 수많은 책을 보았지만, 그 책을 마음속으로는 찢고 또 찢었을 거야.

그래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이9단이 스승 조9단에게 자신의 바둑을 복기 받을 때 알게 모르게 스승의 방식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왔겠지.

하지만, 이9단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온 스승의 방식에서 바둑의 진리를 향한 힌트를 얻었을 뿐 맹종하지 않았어.

그래서 이창호는 스승의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바둑 세계를 창조하여 스승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거지.

이9단이 조9단에게 바둑을 배웠음에도 조9단과 기풍이 현저히 다른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야."

"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깨부술 때 희열을 느꼈어.

기존의 틀을 거부하려는 이창호의 강렬한 몸짓에서 난 무한한 희열을 느껴.

이9단이 조9단의 방식을 따라했다면 조9단의 아류가 됐을 뿐이야.

예술이든 뭐든 한 분야에 최고가 되려면 기존의 틀을 깨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야 해.

자신을 옥죄는 사슬을 끊어내고 나래 쳐서 '훨훨' 저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야 해!"

(김수영) "강을 다 건너면 배를 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단 강을 건너는 데 배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다 건넜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던 길을 재촉할 수 있습니다. (장자 得魚忘筌)

배 안에 안주해 있으면 결코 최종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정석이나 행마법은 배와 같아서 배우고 나서는 잊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될 것은 일단 강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하듯이 기존의 정석이나 행마법은 기력향상의 한 과정으로 배울 만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배웠으면 그것을 철저하게 잊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포대인) "여러분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창호 9단의 기도(棋道)와 바둑 정신에 대해서 새롭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창호 9단 개인의 능력일 뿐입니다. 결코, 바둑의 본질은 전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왕조)

"예, 포대인"

(왕조는 곧 오청원 9단을 데려왔다)

(마한)

"오청원 9단 대령이오!"

"오청원 9단, 그대 또한 이창호 9단과 더불어 기성이라는 칭호를 듣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점을 참작하여 이9단이 바둑계를 대표하여 작두 앞에 않게 되었다.

그대는 '바둑은 조화'라는 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데 본질이 전쟁일 수밖에 없는 바둑을 어찌 '조화'라고 이르는가?"

"많은 바둑팬이 '바둑은 조화'라고 하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바둑은 겉으로 보기에 영토를 획득하려는 먹고 먹히는 싸움이 난무합니다.

그러한 바둑에 조화를 이야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바둑은 조화입니다."

"바둑의 조화에 대해서 흑백 간의 조화가 아닌 흑돌 간의 조화나 백돌 간의 조화를 이야기하면 누구나가 쉽게 수긍합니다.

훌륭한 음식이 만들어지려면 재료의 조화가 가장 중요하듯이 한판의 바둑을 두면서 포석, 중반, 끝내기가 조화되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 재료의 조화가 맛을 좌우하는 천하 진미 북경오리구이

"이러한 조화는 단지 흑돌 간의 또는 백돌 간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즉, 자기편끼리의 조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바둑의 조화란 궁극적으로 흑돌 간이나 백돌 간의 조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둑의 조화란 바로 흑백 간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즉, 나와 다른 것과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 까마귀와 백로의 조화

"인생은 연극이라고 셰익스피어는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둑은 인생입니다.

인생과 바둑 모두 조화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간세의 조화를 살펴보면, 인간의 욕심으로 조화를 무너뜨린 대가는 너무나 큽니다.

먼저, 남녀 사이의 부조화를 들 수 있습니다.

남성은 허위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통해 여성을 지배했습니다. 여성의 섬세함이 필요한 정보화 시대를 맞아 여성의 지위는 향상되고 있지만 아직 평등이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 시대를 잘못 태어나 요절한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

한국의 드라마 '이산'을 보면 일당 독재를 했던 노론에 맞서 '정조 이산'은 조화를 부르짖으며 다른 정파의 인재를 등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양반 계층의 특권이 인간의 조화를 무너뜨렸다고 보고 서얼이나 다른 계층의 권익을 위해 헌신합니다.

특권 양반 계층 때문에 조선은 격동의 시기,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은 나라를 잃기까지 합니다."

☜ 조선의 조화를 꿈꾸었던 정조 이산

"인간이 자연과의 조화를 무너뜨린 행위는 부메랑이 되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인도네시아와 아마존 밀림의 무참한 파괴는 암세포적인 인간의 괴멸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푸르른 지구는 암흑의 지구가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뿐인 지구에서 쫓겨나 우주미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세의 현자라 불리는 공자, 부처, 예수 등이 부르짖었던 내용도 사실 조화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을 人+二의 결합으로 보아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로 보기도 하는데 사람 사이에 필요한 도리는 바로 조화가 아니겠습니까?

극심한 불평등 사회에서 평등을 말했던 부처와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천대받는 병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박애를 실천했던 예수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조화를 꿈꾸었습니다."

☜ 어머니의 죄를 대신해 자신을 불사른 등신불(等身佛)

"바둑 또한 조화가 절실히 필요하고 흑백 간의 조화로운 바둑이야말로 결국은 자신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이창호 9단은 증명해 보였습니다.

기리에 어두운 아마추어의 바둑은 만방을 수시로 이기고 지고합니다.

하지만, 바둑을 업으로 삼고 정진해온 프로는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결국에는 교묘하게 흑백 간에 타협을 이루어 냅니다."

"프로 중에서도 살기(殺氣)를 띠고 잡으러 간다거나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식으로 바둑을 두는 기사보다는 흑백 간에 타협을 통해 바둑을 꾸려나가는 기사가 훨씬 승률이 높습니다.

특히 이9단의 경우는 타협을 통한 흑백 간의 조화가 확연히 두드러져서 강렬하게 싸우지 않고서도 오랜 세월 동안 당대 일류 고수들을 모조리 제압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조화란 말로만 내세우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조화를 이루어야 결국 자신에게도 이득이 됨을 이창호 9단은 바둑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당장 눈앞의 이득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기보다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노조측에서 사측을 향해 강력하게 투쟁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에서야 가슴깊이 깨닫고 있지 않습니까?

즉, 조화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자 현실입니다. 이창호 9단은 그러한 진리를 바둑을 통해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비록 내가 처음 '바둑은 조화'라는 말을 했지만, 이창호 9단은 그 말을 현실적으로 증명해 보인 기사입니다. 

포대인, 이창호 9단은 '바둑은 조화'라는 사실을 묵묵히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한 이9단을 처형하려 하시다니, 차라리 이 늙은이가 작두 앞에 않겠습니다.

포대인, 다시 한번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