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제가 1년 전에 오로광장에 올렸고 낭만바둑 코너의 첫 인사 때도 올렸던 글이지만 첫 인사 때 못보신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추성훈 그리고 조치훈

근성   根 뿌리(근) 性 바탕(성) 
이 말처럼 우리 민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뿌리는 깊이 박히어 한 곳에 정착하고 싶은 원초적인 생명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곳이 설령 메마른 황무지라 해도 한 방울의 물만으로 싹을 틔워 줄기를 뻗어 가며 아무리 비바람이 뿌리를 뽑아 갈 기세로 분다 해도 꿋꿋하게 버티어 냅니다.

오래전, 우리 민족의 한 갈래인 북방 유목민족은 뿌리 없이 북방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한반도에 이르러 비로소 염원하던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침략과 핍박을 받아 오면서도 꿋꿋하게 버티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근성입니다.

1930년대 연해주의 한인들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짐짝처럼 얹어져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버려졌습니다. 그곳에서 석기시대처럼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생활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그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한인들을 접할 때마다 연민을 넘어 그들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건 우리 민족의 근성을 그들에게서 절실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추성훈과 조치훈, 두 남자가 있습니다
재일 동포로서 한국인의 근성을 온몸으로 보여준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추성훈에 대해서는 오로기우 중 모르는 분도 계실 겁니다. 추성훈의 아버지는 재일 동포입니다. 그는 70년대 재일동포 유도선수 자격으로 한국의 전국체전에 출전 그곳에서 추성훈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추성훈은 일본에서 어렸을 때부터 유도를 시작하여 발군의 실력을 보였지만 중요한 시합에는 단지 그가 한국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제외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태극마크를 꿈꾸며 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한국행을 택했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고국의 땅을 밟은 젊은이 추성훈

그러나 고국은 그에게 또 다른 차별의 굴레를 씌웁니다. 용인대 출신으로 가득 찬 한국 유도계는 실력은 최고였지만 아무런 배경도 없었던 재일동포 추성훈을 비참하게 버렸습니다. 중요 시합 때마다 이어지는 편파판정으로 그는 눈물을 삼키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한국국적을 포기한 후 두 달 만에 일본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세계대회를 휩쓸던 추성훈, 드디어 부산 아시안 게임 결승에서 한국선수를 상대로 금메달을 따지만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우리는 추성훈을 한국을 버리고 일본을 선택한 '쪽바리'라고 욕했습니다.

추성훈은 격투기로 전향한 후 승승장구합니다. 한국에서 열린 시합이 끝나고 그는 고국의 팬들에게 말합니다.

"전 지금 한국사람 아닙니다, 일본국적입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 제 몸에 흐르는 피는 완전 한국입니다!!"

조국은 그를 버렸지만 추성훈은 조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삼계탕을 먹으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한국 음식이 일본 것보다 훨씬 맛있다고 말하는 한국인 추성훈.

 
그의 온몸에 배어있는 근성으로부터 나오는 투혼을 일본레슬링의 영웅이자  김일 선수의 맞수였던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링 위에서의 추성훈은 상대를 반드시 꼬꾸라뜨리겠다는 투지가 엿보인다, 그런 그가 좋다."

추성훈의 일본 이름은 추성훈에 단지 山을 덧붙인 것입니다. 국적은 비록 일본이지만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추성훈, 그의 투혼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자명합니다.

오로기우들도 잘 알고 계실 조치훈은 일본이 세계바둑 최강국일 당시 한국바둑의 희망이었습니다. 신라의 천재 최치원 선생이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갈 때 그의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조치훈 또한 일본의 명인이 되기 전까지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6세 때 대한해협을 건넜습니다.

그의 나이 11세 때 그는 입단을 결정하는 마지막 판을 두게 됩니다. 만약 진다면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위기의 순간에, 꼬맹이는 무려 50수 가까운 수읽기를 통해 상대 대마를 포획하여 입단을 확정 짓습니다.

코흘리개 어린이 조치훈은 반드시 이겨야만 살아남는 승부의 세계를 이국땅에서 너무 일찍 체험했습니다. 그의 좌우명인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말은 단순히 알량한 승부에 대한 집착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겨야만 일본바둑계에서 살아남는다는 처절한 근성이 그의 말에는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86년 기성전, 불의의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대국장에 나타난 조치훈의 모습은 그 당시 어렸던 저의 코끝을 찡하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조치훈은 일본 기사와 싸워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워 이겨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지금, 그 때의 찡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80년대 초 조치훈과 다케미야는 한국에서 본인방 도전기를 벌였습니다. 바둑이 끝난 후 조치훈은 "안에서(다케미야의 세력) 살기가 어려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일본의 어느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일본의 안에서, 그리고 한국의 안에서 모두 살기가 어렵다고... 조치훈은 한국인으로 일본 바둑계에서 살아남으려고 일본인보다 두 배로 독해야 했고 일본생활에 익숙해진 그가 한국에서 생활하기는 마찬가지로 어렵다는 것을 함축한 말이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경계인 조치훈과 추성훈
그러나 둘의 가슴에는 한국인의 열정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둘은 비록 일본 땅에 있지만 '한국인으로서 사는 것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지나온 세월을 통해 말없이 온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저에게 한국인의 근성이란 무엇인지 가슴속 깊이 각인시켜준 조치훈과 추성훈! 제 인생의 스승이자 영웅입니다.

                                                       사진 출처※월간 바둑

                      배경음악은 추성훈 선수가 링에 오르기까지의 등장음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