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웬 술을 그렇게 마신 거야.”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머리를 감싸고 일어나는 빳떼리의 턱밑에 꿀물을 들이밀며 한마디하는 마마다.

“허과장님 딸 돌잔치 뒤풀이 한다고..”

“뒤풀이도 정도껏이지. 아예 산송장이드라. 산송장.”

“나 어제 어떻게 집에 왔어?”

“어떤 아가씨가 택시 타고 데리고 왔던데.”

잠이 번쩍 깨는 빳떼리다.

“아가씨? 누구?”

“내가 어떻게 알겠어.”

“옷차림이 뭐야?”

“그냥 수수하게 청바지 입었던데.”

어제 모난리자는 원피스, 막내는 미니스커트 차림이었다. 청바지를 입은 건 도토리다. 왜 도토리가 날 집으로 데려온 건가.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도토리가.. 혹시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닌가. 득달같이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오로에 들어가는 빳떼리다. 도토리가 없다. 도토리 전화번호는? 알 턱이 없다. 아는 건 도토리의 서식지뿐이다.

씻는 둥 마는 둥 부랴부랴 도토리의 오피스텔로 향한다. 집에서 택시로 10분거리다. 지금 생각하니 왜 도토리가 우리집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얻었는지도 의심이 든다. 혹시 이것도 계획적인 건 아닐까. 이젠 도토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전부 음모와 계획이라는 생각된다. 여자가 무섭다고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다.

오피스텔 인터폰을 누른다. 대답이 없다. 현관문을 두들기자 대답대신 옆 오피스텔에서 웬 남자가 문을 열고 험악한 인상인 얼굴을 빼꼼이 내민다. 일요일 아침 달콤한 수면을 더이상 방해하면 주먹이라도 날리겠다는 묵언의 표정이다. 아무튼 도토리는 오피스텔에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이렇게 일찍 어딜 간 거야. 아니면 어제 오피스텔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젠장, 알게 뭐야.

돌아서 가려다가 오피스텔 앞에 풀썩 주저앉는다. 어차피 이 기분에 집에 가봐야 맘이 편할 리 없다. 하여간 도토리를 만난 이후로 단 한시도 맘이 편할 날이 없다.

어제 일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뷔페에서 나와서 당구장에 갔다. 나, 구라, 모난리자, 막내, 그리고 처음처럼 허대리, 도토리, 두 편으로 갈라서 2차 내기 포켓당구를 쳤다. 우리가 이겼다. 2차에서 골뱅이 안주에 생맥주 몇 잔 빨고 노래방으로 직행. 남자3명, 여자3명, 짝도 잘 맞았다. 도토리는 허대리하고 잘도 논다. 내 파트너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막내다. 막내와 듀엣으로 노래도 부르고 블루스도 추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을 때 한쪽 구석에서 막내의 어깨를 그윽하게 안았다.

“막내야.”

“응”

“내 맘 알지?”

“무슨 맘?”

“모르면 가르쳐줄게.”

“어떻게?”

“내 속을 너한테 보여줄게.”

막내한테 진한 키스를 한다.

보이지? 내 속.

꿀보다 더 달콤한 순간이다. 서로가 서로의 속을 열심히 탐색하는 순간 어디선가 아리송한 말이 들려온다.

“쇼를 하네. 쇼를 해.”

웬지 많이 듣던 목소리. 빳떼리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화들짝 놀란다.

도토리의 다리를 붙들고 열심히 키스를 하는 빳떼리다.

제정신이 든 빳떼리가 화들짝 일어난다.

젠장. 꿈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연히 민망한 빳떼리가 도토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침부터 어딜 갔다오는 거야.”

“우리가 언제부터 목욕탕 가는 것까지 보고하는 사이가 된 거야.”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도토리의 손에는 목욕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도토리를 따라서 마치 제집처럼 들어가는 빳떼리다.

“도대체 어제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도토리가 왜 날 집에 데려다준 거냐구.”

“그럼 길바닥에 내팽개쳤으면 좋겠어?”

“우리 직원들도 있잖아.”

“그 상황에서 제정신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노래방을 나와서 두어 군데 더 달린 것 같다. 언제나 노래방에서 필름이 끊기는 빳떼리다.

“난 아침 전인데 먹었어?”

빳떼리는 도토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북어국이야.”

북어국이란 말에 빳떼리의 입이 벌죽해진다. 해장으로 북어국만한 게 또 어디 있는가. 알코올로 찌든 위 속을 깎아내는 듯한 그 시원함. 생각만해도 진저리가 처진다.

도토리는 북어국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 북어를 물에 담궈서 불리고 북어와 같이 끓일 무를 썬다. 가만히 보니 칼솜씨가 예사가 아니다. 칼솜씨뿐만 아니라 주방에서 하는 행동이 능숙하기 그지없다. 젖갈을 꺼내 갖가지 양념을 넣고 조물락조물락 무치고 두부에 계란을 무쳐 후라이팬에 지진다. 오피스텔에 가득한 요리냄새가 식욕을 돋운다. 한참 군침이 도는 판국에 음식을 만들던 도토리가 뜬금없이 한마디 한다.

“민지영인가?”

“막내? 막내가 왜?”

“걔 좋아하지?”

“무슨 말이야. 그게.”

“어제 난리더라구. 끌어안고..”

“무슨 상관이야.”

“헛물켜지 말라는 거야. 내 얘긴.”

“헛물?”

도토리 말에 발끈한다.

“걔 다른 사람이 있어.”

“뭐야. 누구?”

“그건 모르지만 어쨌든 빳떼리는 아냐.”

“그걸 어떻게 알아.”

“신은 남자에게 힘을 줬지만 여자에게는 남자보다 뛰어난 직감을 줬어. 눈빛만 봐도 알아. 빳떼리를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어.”

“누가?”

“얼굴 네모난 여자.”

모난리자가 날 좋아한다고? 어이가 없는 일이다.

“북어국 다 끓었어. 밥먹자.”

좁은 식탁에 한 상 가득 차려진다. 북어국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그러나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빳떼리는 도토리를 노려보며 입을 연다.

“확실해?”

“뭐가?”

“막내 말이야!”

도토리는 잠시 빳떼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눈을 보면 알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막내 그 여자는 빳떼리를 좋아하는 감정이 티끌만큼도 없어.”

도토리의 말은 단호했다. 언제부터인지 도토리의 말은 마치 신탁(神託)처럼 들렸다. 왜 저 여자가 하는 말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게 되는 걸까.

빳떼리는 무겁게 북어국 한 수저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북어국은 맛있었다. 빳떼리가 지금까지 먹어본 북어국 중에서 최고였다. 가장 맛있는 북어국을 가장 우울한 기분에 먹는 빳떼리다.

망중한(忙中閑). 사무실은 모처럼 만에 한가로웠다. 특별히 바쁜 일도 없고 꼭 해야 할 일도 없었다. 한달에 한두번쯤 있는 휴가 아닌 휴가인 셈이다. 직원들은 그동안 밀린 일도 정리하고 신제품 시식을 한다면서 군것질과 잡담으로 하루를 소일하고 있었다. 막내는 하루종일 수다와 군것질로 입이 쉴 틈이 없었다. 그지없이 천진난만한 막내의 모습이다. 막내에게서 눈을 뗀 빳떼리의 시선이 구라쪽으로 옮겨간다.

거래처와 통화중이다. 벌써 2시간째다. 전화로 어떻게 2시간동안 주절댈 수 있는지 그야말로 신기하기 그지없다. 아마 통화중인 거래처 상대는 녹초가 돼서 뻗어 있을지도 모른다.

도토리의 말을 듣고 빳떼리는 한잠도 안자고 고민에 고민을 했다. 도토리의 말이 맞다면 과연 막내의 숨겨진 남자는 누구인가. 그동안 막내의 행적으로 봐서 일단 외부인은 아닌 걸로 결론을 내렸다. 직장동료라면 구라뿐이다.

빳떼리는 그 사실을 스스로 부인하고 또 부인했다. 예수는 첫닭이 울기 전에 3번 부인할 것이라도 했지만 빳떼리는 기상알람이 울릴 때까지 3000번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빳떼리는 사실을 확인하기로 한다.

“구라 너 저녁에 약속 있어?”

“없는데. 왜?”

“저녁이나 먹으면서 간단하게 소주 한잔 하자고. 막내하고.”

“막내하고? 다른 사람은?”

“비밀로 해. 두 사람한테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글쎄 그건 이따 얘기하고. 내가 원통갈비집에 예약을 해뒀으니까 그리 와. 다른 사람 눈치 못채게 따로따로 퇴근해서.”

“도대체 무슨 일이야. 사람 불안하게..”

“암튼 막내한테도 얘기해 둘 테니까 이따 보자구.”

“알았어.”

원통갈비집은 회사에서 10분거리에 있었다. 갈비가 맛있어서 가끔 회식을 하는 장소다. 어둠이 내리자 갈비집은 널찍한 창이 조명으로 가득하면서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갈비집에 맨 먼저 도착한 사람은 구라다. 종업원은 빳떼리가 예약한 테이블로 구라를 안내했다. 창쪽이다.

5분뒤에 막내가 도착한다. 두 사람은 빳떼리가 올 때까지 얘기꽃을 피운다. 막내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빳떼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커피숍 창밖으로 원통갈비집이 훤하게 보였다. 먹자골목에 있는 갈비집과 커피숍은 거리가 기껏해야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갈비집 안은 개미 기어가는 것도 보일 정도였다. 커피숍은 낮은 조도(照度)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 주절대던 구라가 핸드폰을 꺼낸다. 빳떼리의 핸드폰이 울어댄다.

핸드폰을 받자마자 구라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야. 너 왜 안와.”

“아..미안,미안.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던 참인데..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좀 늦을 것 같아.”

“얼마나?”

“두어 시간..”

“새꺄. 그럼 그때까지 널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미안해. 그럼 오늘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막내하고 저녁이나 먹어. 계산은 내가 나중에 할 테니까..”

“진짜 니가 계산하는 거야?”

“사장한테 내가 전화해 둘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어. 막내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막내한테 얘기를 건네는 구라다. 다시 막내의 웃음이 터져나온다. 뭐가 저렇게 재미있는 건지..

원래 잘 웃는 막내다. 저것이 두 사람이 사귄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걸로 위안을 삼는다.

두 사람은 연신 술이다 고기다 시켜먹는다. 내가 계산할 돈으로 잘도 처먹는다. 막내가 먹는 건 고래를 잡아먹어도 아깝지 않지만 구라 저놈이 먹는 건 고기 한 점도 금조각처럼 아깝기 그지없다. 하긴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갈비집 고기를 전부 먹더라도 도토리의 예상이 빗나가기만 고대한다.

다 식어빠져서 쓰디쓴 마지막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을 때 빳떼리의 눈이 뒤집히는 상황이 보인다. 막내가 주먹만한 고기쌈을 싸서 구라의 입에 넣어준다. 당장 뛰어가서 구라의 입에 고기쌈 대신 다이너마이트라도 처박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냉정하게 생각해본다. 두 남녀가 고기를 먹는데 여자가 남자한테 고기쌈 하나 정도 싸줄 수 있다. 너그럽게 생각하자. 역시 그걸로 위안을 삼는다.

두 사람은 한 시간이 넘도록 빳떼리의 돈으로 배가 터지도록 먹고 자리에 일어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두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두 사람이 갈비집에서 나오는 걸 확인한 빳떼리가 득달같이 커피숍에 나온다. 빳떼리는 두 사람을 찾는다. 저만치 걸어가는 두 사람. 두 사람을 본 빳떼리는 절망한다. 구라에게 팔짱을 낀 막내. 그것도 부족해서 팔짱을 끼지 않은 손은 구라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고개는 구라의 어깨에 얹혀져 있다. 두 사람은 거의 한몸이 되다시피 걷는다. 이제 더이상 삼을 위안이 없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빳떼리는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사랑은 시작도 안했는데 그렇게 끝났다.

한참을 망연히 서있던 빳떼리가 무겁게 발길을 옮긴다. 딱히 갈 곳이 없다. 갑자기 집도 절도 없는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실내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온다.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넣는다. 술이 쓰다. 이럴 땐 같이 마실 친구가 필요하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친구 목록을 뒤적이다 이내 그만둔다.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해줄 친구가 과연 누가 있겠는가. 보나마나 널린 게 여자라는 둥 시작도 안했는데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는 둥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이다. 그때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도토리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여자다. 나보다 먼저 예측한 여자다. 하지만 얼굴만 봐도 울화통이 터지는 그 여자를 앞에 두고 술을 마신다는 건 죽기보다 싫다. 포기하고 쓰디쓴 소주 두어 잔을 마신다. 빈속에 마신 몇 잔의 알코올이 전신에 퍼지자 도토리에 대한 감정이 조금은 관대해진다.

그래. 죽기보다 싫을 것까지야 없지. 그래도 해장하라고 북어국까지 끓여준 여자 아닌가. 더군다나 나오란다고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밑져봤자 본전이다.

여전히 전번은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오로에 접속하기로 한다.
오로에 있기나 할지.. 그 가능성도 사실 희박하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조금전까지 죽기보다 싫은 여자가 간절한 여자로 바뀐다. 사람 마음은 역시 간사하다.

스마트폰 화면 가득 오로 화면이 뜬다.
먼저 대기실을 본다.

                             도토리

있다. 눈물이 나도록 반갑다.
쪽지를 날리려는데 도토리가 먼저 쪽지를 날린다.

-지금 퇴근했나봐.

-아니, 밖이야.

-또 술 마셔?

-혼자.

-혼자? 무슨 궁상이야.

-궁상 떠는 것 보기 싫으면 나와.

-자기 궁상 떠는 게 나랑 뭔 상관이야.

-싫으면 관둬.

빳떼리는 문자를 치면서 버럭 소리를 지른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이 이상한 놈이라는 듯 힐끗 쳐다본다.

오로를 종료하려는데 쪽지가 날라온다.

-어딘데

쓰디쓴 소주 한병을 다 마실 때쯤 도토리가 포장마차로 들어섰다. 추리닝 차림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다. 도토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빳떼리는 포장마차가 떠나가도록 소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