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배웠을 때가 초등학교 시절이니 20년보다는 30년 쪽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정이 급하고 어질지 못하여 어렸을 때부터 뭐하나 진득하니 마쳐보질 못했으니 바둑이라고 어딜 갈까요. 지금까지 차분하게 독파한 바둑책 하나 변변히 없는 형편이고 보니 지금의 실력도 과분하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예전 바둑 텔레비전에서 '내 인생의 한수'란 프로그램을 즐겨보았었는데요. 프로기사가 자신의 인생에서 추억에 남는 한 판을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복기해 보던 프로그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 내리던 어제의 흐림은 온데간데없이 화창함으로 둘러싸인 월요일의 한낮에 오로바둑에 접속하여 생중계를 틀어놓고 차 한잔을 마시다 보니, 제 자신에게도 기억에 남는 한 판이 있었는지를 더듬어 보게 되는군요.

내 인생의 한수라...

기억이 나는군요.
철책선 경계를 맡았던 군대시절입니다.

바둑의 룰, 그러니까 축이나 장문 정도 나마 알고 있는 중대의 두 사람인 저와 바로 위 고참은 자연스레 라이벌이 되었습니다.

라이벌 없는 바둑은 김빠진 맥주요, 빤쮸 없는 고무줄이자, 김치 없는 밥상이지요.

쫄병 시절이야 시간이 없었지만 둘 다 제법 고참이 될 무렵부턴 그와 많은 시간을 바둑으로 소일했습니다.

둘 다 기력이(사실 기력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지만요) 엇비슷하고 스타일도 뚝딱뚝딱 장작 패는 폼새라 3분에 한 판, 5분에 한 판도 예사로 나오곤 했던 그때였습니다.

선작(先作) 오십가(五十家)도 대충 버티다보면 뒤집어지기 예사였고, 서로 자존심을 내세우며 패를 안받고 역전당하기도 일쑤였지요(뭐, 바둑은 져도 패라도 이기면 기분 좋더라고요).

서로 말년에 접어들고 제대를 코앞에 둔 무렵, 밤10시 취침시간이 돼도 하늘에 백돌 흑돌이 어른거리던 순간 그와 저는 의기투합, 쫄병들의 경계근무를 대신 맡아 들고 가슴 속엔 문방구표 접이식 바둑판과 양 주머니엔 바둑알을 듬뿍 집어넣고 초소로 향했습니다.

중동부 전선의 험난한 산줄기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 철책의 흐름과, 정해진 간격대로 환하게 불을 비추고 있는 투광등의 불빛은 남과 북의 가슴 아픈 현실은 뒤로한 채 장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철책로를 끊임없이 이동하는 순찰식 근무가 아닌 초소에서의 고정형 근무였기에, 둘은 총구를 북으로 돌려놓은 채 바둑판을 펼쳤습니다. (부모님은 그때도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주무셨는지...)

후레쉬를 켜지 않아도 어렴풋이 흑과 백을 구별할 수 있는 적당한 어둠과 멀리서 들려오는 대남방송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응원 삼아 그야말로 手談이 펼쳐졌습니다.

뚝딱 뚝딱 장작 패는 소리는 초소를 휘돌고, 부지런히 오가는 손놀림의 경쾌함. 그리고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탄식과 웃음.
정말 시간가는줄 모르겠더군요.

바로 마지막이 되었던 대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가운데 이른바 결승전이었다고 할까요.

초반 사귀생에 마지막 변수인 변쪽에 있던 생과사가 아슬아슬한 상대의 미생마가 살기만 하면, 천지가 진동하고 지각이 무너지는 상황이 설사 오더라도 제가 질 수밖에 없는 형세였습니다.

후절수.

후절수를 완벽히 이해하면 3급이라고 하던가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3급은 언감생심이고 두 자리도 한참인 18급 쪽에 속했던 시절이니 후절수를 알 턱이 있었나요.

이도저도 안되니 상대의 집속에 죽어 있는 돌을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움직였고 회심의 미소를 지며 수순을 진행시켜 제 돌을 따냈던 바로 그 순간.

제 눈에 들어오는 단수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후절수.
사활문제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고급전법. 즉 자기의 돌들을 특정한 수순에 의해 키워 죽인 다음, 다음 순간에 상대방의 돌을 단수로 몰아 떨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