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바둑의 요체는 싸움

김지석은 탤런트 빰치는 미소년이다. 장담컨대 앞으로 성적을 내면 소녀팬들이 가장 많이 따라다닐 기사다. 유창혁 9단도 그렇고 대체적으로 곱상한 외모의 기사들이 보기와는 달리 무시무시한 공격바둑을 즐기는 걸 보면 그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듯하다.

김지석 바둑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지독한 싸움바둑'이다. 인파이터라도 한방의 살인펀치를 휘두르는 조지 포먼 스타일이라기보다는 탱크처럼 끊임없이 밀고들어가는 조 프레이저 스타일에 가깝다. 맷집(끈기)도 좋고 배짱도 두둑해 싸움꾼으로서 갖출 건 다 갖춘 셈이다. 일찍이 여섯 살 때 ‘전신(戰神)' 조훈현이 ‘자기류'라고 인정한 바둑이니 전투실력이 여간할까.

전단(戰端)을 만들어가는 지석의 싸움감각을 보자. 올해 국수전에도 처음으로 본선무대에 명패를 내밀었는데 가뜩이나 상한가를 치고 있는 한상훈과 맞붙어 더욱 관심을 끈 예선결승이다. 한상훈도 수읽기가 세고 싸움이라면 마다않는 역전형의 기사인데 저돌적인 면에서는 한수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백△로 전개한 장면에서 흑은 보통 2에 거는 게 일반적인 발상인데 김지석은 흑1로 젖혔다. 그렇다면 백은 2로 굳혀 불만이 없는 모습.
초반 넓고 넓은 곳이 반면인데 흑1이 그토록 급했을까? 흑▲의 폭이 넓어 백가로 갈라치는 게 눈에 거슬려 선공을 택한 것일까.

“우하귀 자체가 크고 상대가 침착한 스타일이라 받을 줄 알았다. 안 받아주면 실전처럼 싸우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김지석의 이 한마디에 그의 장단점이 모두 녹아 있다. 

한상훈의 김지석 바둑에 대한 평이 재미있다.

“전투적인 면으로 비유하자면, 강동윤은 ‘반 보만 물러나라'고 강요한다면 박정환은 ‘한 보 이상 물러나라'는 식이다. 김지석? 김지석은 ‘물러나라가 아니라 아예 붙자'이다.”

리그성적 4승 2패로 공동선두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맞이한 판이다. 한국바둑리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으나 한국바둑리그는 단체전이다. 승부세계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개인전이다. 김지석이 지금까지 개인전에서 가장 좋은 면을 보인 기전은 명인전이다.

2007년 강원랜드배로 부활한 명인전은 우승상금 1억 원의 국내 최대기전인 데다 타이틀 보유자를 새로 가리기 때문에 리그 2위 안에만 들면 챔피언 결정전에 나설 수 있으므로 지석으로서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다. 나중에 흑이 팻감을 잘못 쓰는 바람에 이기기는 했지만 하마터면 실족할 뻔했던 바둑이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는다.

“확실히 이겨 있었으면 패를 안했을 것이다. 약간 이긴 정도라 보았기에 확실히 끝내려고 달려들었다. 또 수가 된다고 보고 결행한 것인데 착오가 있었다.”

수읽기를 할 때 싸움과 타협의 기로에서 어느쪽을 먼저 생각하느냐고 묻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수줍은 목소리로 “싸움!”이라고 말한다. 이게 이창호 바둑과의 차이랄까. 반집만 좋아도 돌아가는 이창호에 비해 김지석은 약간 좋은 정도로는 칼을 뽑는다.

최규병의 김지석론

2007한국바둑리그의 소속팀 영남일보의 최규병 감독 평을 들어보자. 최규병 9단은 김지석을 거침없이 2지명으로 뽑은 사람이다. 기대도 크거니와 애정이 넘친다.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그도 신동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 최9단의 한마디 한마디는 김지석 바둑에 대한 총평이자 조언이었다.

-2지명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결과적으로 대박(우승)을 터뜨린 셈인데.

“다른 팀 2장에 비해 지명도는 지석이 낮을지 모르나 그 당시는 성적도 괜찮았고 작년 한국리그 활약도 좋았다. 이제 입단한 지도 좀 되었으니 기세를 타는 상황이라고 봤다.
무엇보다 한국바둑리그는 속기전이다. 순간적인 수읽기 능력과 결단력을 1차적으로 요하는 기전이다. 지석이는 수읽기가 강하고 배짱이 좋아 속기전에 맞는 기사다.
대방 노블랜드와의 첫 게임에서 주장 박영훈을 잡은 것이 기세를 타고 자신감을 얻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7한국바둑리그에서 김지석은 10승4패의 뛰어난 성적으로 영남일보의 우승을 견인해 MVP에 뽑혔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김지석 4단.

-기대가 컸던 신동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윤준상이나 강동윤에 비하면 지석이는 신인왕전에서조차 우승을 못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신인층이 두텁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돌이도 입단 5년쯤 되어서야 슬슬 성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프로들은 큰 차이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을지 모르나 이창호, 이세돌 급의 기재들은 많다. 따라서 최소 3~5년 정도의 각고의 수련 없이는 정상권으로 갈 수 없다.

지석이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개인적으로 3년 정도 더 연마 기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군입대, 대학진학 등 여러 가지 변수가 남았다. 특히 군문제가 걸린다. 이창호를 비롯한 이세돌, 박영훈, 최철한 등 정상급 기사들은 군면제를 받았고 이건 기사생명에 큰 플러스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지석은 아직 나이가 있으니 두고 보아야겠지만 주변이나 가정에서 이러한 변수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도 굉장히 중요하다.

정상권으로 치닫다가 도중에 주저앉은 사람도 많은 게 승부세계다. 약간의 재주와 명성만으로는 정상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세돌도 꾸준히 정진했기에 이창호 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김지석을 이세돌류로 보는 사람이 많다. 비교한다면?

“지석이도 모험을 즐기는 바둑이니 이세돌류이긴 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끌고가는 힘이 아직은 약하다.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기는 좋은데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바둑의 철학이랄까, 정신적인 깊이가 아직 어리다는 느낌이다. 덜 여물었다는 건 한마디로 공부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요즘의 이세돌 바둑을 보면 뭔가 깊이가 느껴진다. 바둑이 자유자재,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인상을 받는다. 화성(和聲)도 대위법도 없는 단선율의 음악(monophony)과 다성음악(polyphony)이 있듯 똑같은 수도 그것만의 효능을 넘어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좀더 추상적인 수가 있는데 지금 이세돌의 바둑이 그렇게 물이 오른 상태다.

김지석도 이세돌만큼 수련을 쌓고 부침을 겪으며 단련해야 가능하다. 이세돌이 32연승을 올리며 ‘무서운 아이'로 수면에 떠올랐을 때가 2000년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정상에 이르기까지 수년이 더 걸렸다. 자기관리에도 철저해야 한다.”

-김지석은 앞으로 이세돌에게 어느 정도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할 것인지?

“이세돌이 긴장할만한 상대임에는 분명하다. 자기처럼 전투적이지 어리지…. 그러나 누구나 이세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다 한번 이길 수는 있지만 넘어서기까지는 부단히 공부해야 가능하다. 거듭 얘기하지만 김지석은 이제부터 시작이며 도약이냐 정체냐는 오직 자기 손에 달렸다. 적어도 3년 뒤면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2007년은 김지석이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준 해였다. 78승31패로 다승 4위, 71.56%로 승률 7위, 상금도 1억 원을 돌파하며(1억 1,400여만 원) 국내기사 중 열 번째로 많이 벌었다. 그렇지만 2008년 2월 현재 한국랭킹 15위로 차세대 주자로 손꼽히는 강동윤(6위), 이영구(8위), 한상훈(9위)에 비하면 좀더 분발해야 할 처지다. 이제는 뭔가 인상적인 한방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김지석의 기재를 누구보다 일찍 발견하고 아꼈던 조훈현 9단조차 이 바둑신동의 대성 여부에 대해 느낌표(!)에서 물음표(?)로, 지금은 말줄임표(……)로 바뀌어온 눈치다. 어릴 적엔 상당한 기대를 갖게 했으나(느낌표) 한동안 의문을 갖게 했으며(물음표) 지금은 더 두고 볼 일(말줄임표)이라는 뜻이다. 생각보다 늦었다는 것이다.

기재가 있다면 누구나 열심히만 하면 정상급 언저리까지는 다다를 수 있다. 거기까지가 목표라면 모르되 이창호나 이세돌 급의 최정상이 목표라면 더욱 분발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리라. 눈에 띄는 신예들 가운데  1989년생인 김지석이나 강동윤, 1993년생인 박정환은 아직 어리다는 점에서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김지석은 한국바둑의 미래다. <김지석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