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유명해졌더라.”
한상훈 初단을 보면, 시인 바이런의 말이 영락없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2007년 11월 14일 도쿄 일본기원에서 벌어진 12회 LG배 세계바둑기왕전에서 한상훈 初단은 온소진 四단을 꺾고 결승에 올랐다. 국내 기전에서 서봉수 九단이 1972년 初단의 단위로 4기 명인전 도전자로 나서기는 했으나 세계대회에서 ‘初단 결승 진출'은 바둑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당시 서봉수 初단의 도전권 획득은 입단한 지 1년 6개월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이 기록은 놀라운 것인데 한상훈 初단은 불과 11개월 만에(2006년 12월 입단), 그것도 국내기전보다 강자가 더 득시글거리는 세계기전에서 거둔 성과다. 게다가 처음 출전한 세계대회에서 논스톱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가히 경악스런 기록이다. 

모르긴 해도 한상훈은 바둑 역사상 최고의 루키로 기록될 것이다. 요즘 한국의 初단들이 엄청나게 세다고는 하나 채 1년도 안돼 이렇듯 초스피드로 정상까지 치고 올라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질풍노도의 기마병을 앞세워 단숨에 서역까지 치고 들어가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정복자 칭기즈칸. 로마가 400년 걸려 정복한 땅보다 더 넓은 지역을 불과 25년 만에 장악한 몽골군(軍)의 속도를 방불케 한다. 아찔한 질주에 본인조차 어안이 벙벙한가 보다.

“국내기전 8강이라면 모를까 세계대회(LG배) 8강은(이 기사는 도쿄 출정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입단할 때 목표라면, 국내 본선이나 한국리그까지는 욕심이 났다. 왕위전 도전자결정전(윤준상 국수에게 졌다) 진출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솔직히 운이 많이 따랐다고 생각한다.”

한 돌도 넘기지 못한 하룻강아지에게 지금 이룬 그 어느 것 하나 ‘망외의 성과' 아닌 것이 있겠는가. 신데렐라처럼 하루아침에 위상이 달라진 한상훈의 처지는 어머니 최연옥(50) 씨의 소감에서 더 실감나게 묻어난다. 생각지도 않은 보물을 느닷없이 손에 쥔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오히려 걱정이 된다. 거품이라면 언젠가 꺼지게 될 텐데…. 한국리그에서 보면 부족한 게 많고(4승 7패)…. 내년이 더 걱정이다. 그래서 공부 더 하라고 이르곤 한다.”

그러나 세상에 산고(産苦) 없는 결실은 없다. 승부세계에서 우연과 요행은 두세 번 반복되지 않으며 운(運)도 실력이 뒷받침되는 자에게나 따른다. 한상훈이야말로 연구생의 긴 터널을 두 무릎으로 기어나와 어느 한순간 폭죽처럼 터진 꽃이다.

한상훈은 퇴출후보였다

		한상훈은 2006년 12월 2일 107회 입단대회에서 ‘천신만고' 끝에 프로가 되었다. 입단대회 본선에서만 9번 고배를 들다 10번째 만에 입단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입단대회에 참가했으니 꼬박 6년 도전, 참가한 횟수로 치면 15번째에 거둔 결실이었다. 연구생 내신성적 2위만도 세 번. 1조 1위에게 주어지는 특별입단도 번번이 그를 비껴갔다. 1조에서만 4년 넘게 머물렀다. 입단할 때의 나이가 만18세(1988년 5월 1일 진주 출생). 만18세라면 한국기원 연구생을 졸업할 나이다. 생년월일에 따라 한상훈은 이미 2006년 4월로 정규 학년이 끝났고 1년 연장에 들어간 상태였다. 한국기원에서는 연구생 5조까지에 한해 자원(自願)할 경우 1년 더 기회를 주고 있는데 한상훈도 바로 이 한가닥 구명줄에 의지해 1년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입단을 확정지은 뒤 비로소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한상훈.

따라서 규정에 따라 다음해 9월 연구생입단대회 때까지 입단하지 못하면 이 가혹한 연령제한 규정에 걸려 퇴출되어야 할 처지였다. 얼마전(2007년 9월) 입단한 이현호도 1년 연장 덕분에 극적으로 입단한 케이스다. 이현호 初단은 한상훈과 동갑으로 김원도장에서 동문수학한 동병상련의 처지였고, 그는 한상훈보다 더 아슬아슬하게 ‘입단 서바이벌 게임'에서 살아남았다.

퇴출 카운트다운에 들어선 ‘시한부 원생'이 받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벼랑 탈출이 쉽지 않다. 하마터면 한국바둑은 한명의 유망주를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한상훈 初단이 입단 직후 눈부신 성적을 내자 자연 연구생 입단제도가 논쟁점으로 떠올랐다.

2006년 12월 입단한 뒤 3개월의 연수기간을 거쳐 2007년 3월 6일부터 프로대회에 뛰어든 한상훈이 5월 8일까지 두 달여 동안 거둔 성적이 18승 2패.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이 가운데에는 12회 LG배 본선 티켓 획득(4월 30일 대 윤찬희 初단)과 41회 왕위전에서 조한승 九단(본선 8강), 박영훈 九단(본선 4강)을 연파하며 한달음에 도전자결정전에까지 올랐다. 그러니 5월까지 승률 80%대의 고공비행을 하며 승률랭킹 1~2위를 달린 한상훈의 성적을 “대부분 예선전에서 거둔 성적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기 어렵다.

입단 초년병이 범 무서울 줄 모르는 활약을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연구생 최상위자 가운데 4~5명은 나보다 더 약하지 않다”고 한 말은 자연 파장을 몰고올 수밖에 없었다. “더 약하지 않다”는 말은 “더 세다”는 뉘앙스로 전달되었고 입단제도에 대한 개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워낙 인상 깊은 인터뷰였던지라 새삼 당시의 인터뷰 내용을 되짚었더니 한상훈은 본의 아니게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며 다소 경계(?)하는 눈치다. 그러면서 바로 잡는 것도 잊지 않는다.

“비슷한 실력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였는데, 과장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연구생 막차를 타고 극적으로 입단한 사람이니 그래도 뭔가 할 말이 있을 텐데….
입단제도에 대해 유도성(?) 질문을 던지니 잠시 주저하다 나름대로 의견을 낸다.

“한번은 딱 6점 차이로 내신성적 1등을 놓친 적도 있다. 연구생 내신은 최근 6개월의 성적으로 집계하는데 다음 기(期)로 넘어가면 앞에 것은 꽝이 된다. 이 때문에 상위권에 계속 머물렀지만 끝내 내신 혜택을 받지 못하고 퇴출된 경우가 많다. 너무 최종 기간의 성적만 따지지 말고 연구생 기간 내내 점수를 반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일정 수준에 도달한 뒤 상위권 점수를 유지하면 퇴출되더라도 보급프로 쪽으로라도 입단 혜택을 준다면 좋겠다. 퇴출된 선배들을 보면 나가도 마땅히 할 일이 없다. 다시 공부하거나 다른 분야에 뛰어들기에는 어정쩡한 나이 아닌가.”

-프로가 되니 이렇게 물 만난 고기처럼 펄펄 뛰는데 어찌하여 입단이 늦어졌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다. 연구생 1조에서만 4년 넘게 있었는데, 혹 새가슴(?)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배짱에서 밀리는 건 아니다. ^^ 부담감 탓이었다. 입단은 늦어졌지만 항상 자신했다. 자신 있었는데 안 풀렸다. --;; 내신성적 승부판이나 입단대회 승부판에서 자주 잡혔다. 마지막 순간까지 입단이 좌절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설령 퇴출되더라도 계속 도전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나란히 앉아 옛일을 회고하고 있는 스승 김원 七단과 제자 한상훈.

입단이 계속 늦어지고 있었지만 입단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은 한상훈 본인은 물론 부모와 스승인 김원 七단 등도 한결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말부터 바둑을 지도한 김원 七단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 내게 왔을 땐 바둑이 약해서 붙여줄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할 수 없이 몇 달 혼자 공부하게 했는데 어린 나이인 데도 묵묵히 자기 일에만 정진하는 타입이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기특하고 대단한 건, 집이 용인인 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도장이 있는 홍은동까지 와서 공부한다는 점이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는 얘기인데 프로한테 이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 있을까. 요즘 프로치고 어디 기재 없는 사람 있는가? 이런 바탕에서 자기 관리야말로 중요한 덕목인데 상훈이는 어릴 적부터 이에 철저했다. 이런 점에서 추호도 입단을 걱정하지 않았다. 설사 연구생에서 퇴출되더라도 일반인입단대회에서 기필코 입단할 아이라 믿었다.

상훈이나 현호나 둘 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고 둘 다 1년 연장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이 늦어져 가슴은 졸였지만 언젠가는 입단할 재목이었기에 믿음을 가졌다.

일선지도자로서 이들을 지켜본 소감을 말하라면, 입단대회는 한시바삐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국가경쟁력을 키우려면 재주 있는 아이들을 시스템 자체가 키워주는 방향으로 틀을 잡아야 한다. 문호를 더 넓혀, 한 살이라도 더 어린 나이에 입단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병역의무가 있다. 이 공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군대에 가기 전 더 많은 경험을 쌓게 하고 더 강한 상대와 붙어 자기 스타일을 정립하게 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