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는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힐끗 보았다. 누군가를 미행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티가 나게 차려 입고 들통이나 안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여자는 이 더운 여름에 머리에 스카프를 동여매고 얼굴을 반쯤 가릴 만큼 커다란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모습이다. 아마도 여자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때 기사한테 여자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한눈 팔지 말고 운전이나 잘해요.”
“아..네네..”

- 주제에 예쁜 건 알아가지고..

여자는 입을 샐쭉거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고서 저만치 앞서 가는 소나타 뒷모습을 뚫어져라 째려보았다. 남편이 타고 있는 차다.

요근래 여자는 남편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남편이 아무리 봐도 전과 다르다는 느낌이다. 생전 컴퓨터라고는 만지지도 않는 사람이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되지도 않는 타자를 치며 히죽거리는 걸 몇번이나 목격했었다. 물론 여자가 오면 당황해서 후다닥 다른 화면으로 바꾸긴 했지만..오히려 그것이 더욱 의심스러웠다. 더군다나 어제는 무슨 고민이 있는지 잠까지 설치더니 아침엔 평생 소리 한번 지르지 않던 사람이 소리까지 질러댔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저렇게 부랴부랴 어디론가 가고 있다. 결국 여자는 한가지 결론을 내린다.

- 그래. 니가 뒤늦게 그 채팅인지 뭔지 하면서 여자 하나 물은 모양인데 잘됐어. 지난번 박사장 건을 이번에 톡톡히 갚아줄 테니..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두용은 백화점 지하에 차를 주차시키고 1층 로비로 올라갔다. 로비에 올라오니 커피숍이 보였다. 다비하고 약속한 장소이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진한 커피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두용은 잠시 커피향을 후각으로 음미했다. 두용에게 수술 후 금지된 사항 중에 가장 참기 힘든 것이 커피였다. 커피를 밥보다 더 좋아하는 두용에게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는 것은 애연가가 담배를 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마시지 못하는 커피를 냄새로나마 맘껏 즐겨본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두용은 느긋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온 것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찌는 듯한 더위에 헐떡이고 있었다. 초복이 지났으니 오죽하겠는가. 날씨는 바야흐로 삼복더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던 두용의 눈이 확 떠진다.

다비가 막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하얀색 챙모자를 쓴 다비는 하늘색 원피스 차림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 속에서도 다비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

심장이 뛰었다.

두용은 심장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 진정해. 이러다가는 자네 여자한테 말도 걸기 전에 쓰러지겠어.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
쿵쿵쿵..

심장의 박동이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다비가 커피숍으로 들어오자 두용이 마치 초등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두용을 확인한 다비가 활짝 웃으며 앞자리에 앉는다.

“안녕하세요.”
“아..네.”

활짝 웃는 다비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다.

“커피 안드셨어요?”

“전 됐습니다.”

“다른 거라도..”

“아니어요. 다비 씨나 드세요.”

커피는 셀프다. 다비는 커다란 종이컵에 들은 커피 한잔을 가지고 와서 앉는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아..아닙니다. 전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해서..”

“그냥 편하게 말씀 놓으세요.”

“저요?”

“네. 저보다 한참 위이신 것 같은데..”

“그래도..”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그럼..그럴까.”

두용이 말을 놓자 다비가 빙긋 미소를 짓는다.

“한가지 여쭤볼 게 있어요.”

“뭔데..”

“아저씨, 지훈이한테 바둑 배운 거 확실해요?”

다비의 질문에 뜨끔해진다.

“그..그럼.”

두용의 대답에 다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왜그래?”
“사실 전 아저씨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어제 알았죠. 아저씨 바둑에서 지훈이를 느꼈거든요. 꼭 지훈이 바둑하고 같았어요. 그 바둑을 보니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그랬군.”

“이젠 아저씨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날 믿는다니 다행이군.”

“이제부터 방심하지 마세요.”

“뭘?”

“바둑 말이어요. 꼭 아저씨를 이길 거여요. 그래야 아저씨가 어떻게 지훈이하고 관계가 되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 아니어요.”

다비는 씩씩한 소년처럼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했다. 다비의 귀여운 모습에 두용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절 비웃는 거여요?”

“아냐.아냐.”

“꼭 비웃는 거 같은데..”

다비는 입을 삐죽거렸다.

“자. 그건 그렇고 어제 진 건 약속을 지켜야지.”

“물론이어요.”

다비는 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지훈이를 만난 다음해. 전 18살이 됐어요.”

한국기원 연구생은 18살이되면 퇴출된다. 연구생에서 나와야 한다.

다비에게는 올해가 마지막해였다.

지훈이 때문인지 다비는 바둑에 다시 흥미를 느꼈다. 그 흥미는 실력으로 나타났다. 지도를 하던 프로들도 다비의 달라진 바둑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구생으로서 프로에 입단을 하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다. 여자부 1조에서 내신 1등이 되든가 연구생 입단대회 여자부에서 1등이 되어야 한다. 3조인 다비가 1조까지 올라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부족했다. 방법은 하나. 여자부 입단대회에서 1등이 되어야 한다.

여자부 대회에 나선 인원은 총 32명. 대회방식은 풀리그. 31판을 둬야 한다. 1등이 되려면 승률이 최소한 80퍼센트를 넘어야 했다. 대회는 일주일간의 강행군으로 이어졌다.

대회가 시작되자 마자 다비는 그동안의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승률은 계속해서 85퍼센트를 넘었다. 다비의 놀라운 분투에 연구생들과 프로사범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입단대회 사상 최고 승률이 나올 수도 있었다.

마지막 날을 남기고 다비의 전적은 23승3패. 압도적이었다. 마지막 남은 5판 중에 1승만 올려도 우승이었다. 꿈에 그리던 프로입단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다비는 마지막 날 대국에 참석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다비는 그렇게 프로의 꿈을 접는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 바둑TV 진행자가 되었죠.”

“그랬군.”

“사실 아저씨하고 바둑을 두면서 반성한 게 있어요.”

“뭔데?”

“바둑진행을 하면서도 너무 바둑 공부를 안한 것 같았어요. 실력이 형편없이 줄었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바둑을 둔 것도 꽤 오랜만이구요. 가끔 인터넷에서 지훈이하고 몇 판 둔 적은 있지만 사실 바둑보다는 얘기가 더 많았죠.”

“대명이 디케인데 무슨 뜻이지?”

“사실은 지훈이가 지어준 건데 오르페우스 아세요?”

“오르페우스? 처음 듣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건데요 하프를 아주 잘 켜는 음악가여요. 오죽하면 그 하프소리에 사나운 맹수들까지 양처럼 순해졌고 다 죽어가는 초목들도 다시 살아날 정도였대요. 그 아내가 에우리디케여요.”

“아..에우리디케에서 에우리를 떼고 디케군.”

“네.”

“그럼 지훈이는..오르페?”

“와아..아저씨 대단하시네요. 그걸 금방 알아맞히고..”

“하하하.. 뭘 그 정도 가지고..”

사실 별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개콘이라도 본 것처럼 박장대소한다.

지훈이가 죽은 이후로 처음 웃어보는 다비다. 다비는 앞에 앉아있는 남자한테 왠지 친근감을 느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낯선 사람한테 본능적으로 느끼는 경계심이 있었지만 바둑을 몇 판 두면서 그런 경계심이 사라졌다. 더군다나 남자의 바둑에서 지훈을 느끼면서 다비는 남자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사람처럼 느낀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즐겁게 대화하는 남녀로 보였다. 그러나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한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로 끝난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거리야.”

남자가 고개를 들어보자 언제 왔는지 아내가 다비 옆에 버티고 서있다.

“여보..”

“여보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 죽어가는 놈 살려놨더니 이런 어린애하고 바람질이야.”

아내는 어리둥절해하는 다비의 머리 끄댕이를 낚아챘다. 순직간에 벌어진 일이다.

“악!”

“여보!!”

“이년아! 나이도 어린 게 뭐 처먹을게 있다고 다 늙어 빠진 유부남한테 꼬리를 쳐!!”

“아아악!”

“그만둬!!”

두용이 득달같이 일어나 여자한테 뛰어가려는 순간!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컥!”

두용은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진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

사람들의 비명소리, 발자국소리, 그릇 깨지는 소리. 그리고..

                           
                            쿵
                             쿵
                               쿵
                                 쿵
                                   쿵

멀어지는 심장소리.

삐이삐이삐이..
어렴풋이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시야가 뿌옇다.

점점 밝아지는 시야. 응급실이다.

의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서있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선생님..”

두용이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가슴이 저려온다.

“윽!”

“그냥 누워 계십시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아십니까?”

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몇번을 말씀드렸습니까. 1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제 겨우 4개월 지났는데 이 지경이니..”

“할말이 없습니다.”

“심박수가 200을 넘었습니다. 심장이 터지지 않은 게 기적입니다.”

“...”

두용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의사는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바뀐다.

“선생님한테 이식된 심장이 아주 우수한 모양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자진능력(自鎭能力)이 뛰어났어요. 응급조치를 취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심박수를 조절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한 건 진정제 투약하는 정도였습니다. 아마 조금만 쉬면 회복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의사는 괜찮다는 듯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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