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제천 살인사건의 탐문수사가 시작됐다. 물론 홍제천 살인사건의 탐문수사는이미 지현이 샅샅이 했다. 그것을 이번엔 호철이 다시 하는 것이다. 사실이미 다른 형사가 탐문수사 한 것을 다시 한다는 건 경찰조직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건 이미청소한 것을 누군가가 다시 청소하는 꼴이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현은 재탐문 수사를 호철에게 흔쾌히 허락했다. 자신의 표현대로 관대하게.

지현의 말처럼 용의자는 줄로 엮으면 몇 두릅은 될 정도였다. 호철은주요 용의자부터 차근차근 탐문하기 시작했다. 탐문수사는 지지부진이었다.이미 지현이 했던 탐문수사를 재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윤진우의 부모는 3년전 윤진우가 집을 나가는 순간 자식임을 포기했다고한다. 대놓고 말은 안해도 윤진우의 죽음으로 인해서 언제 닥칠지 모를 자식의 횡포에 대한 불안감에서해방됐다는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그런 사실은 주변사람들의 증언으로도 확인됐다. 윤진우의 부모는 하나뿐인 자식 때문에 항상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고 한다.그 자식이 집을 나가고 부모는 비로소 웃음을 찾았다고 한다. 부모 두 사람의 알리바이는확실했다.

윤진우에게 피해를 당한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했다.

“죽어도 싼 놈이죠. 잘 죽었어요.”

“그 새끼 언젠가는 그렇게 죽을 줄 알았어요.”

“법이 문제여요. 그런 놈은 진즉에 깜빵에 처넣어야 하는데. 어리다고 대충 훈방만 하니까 결국 그렇게 된 거잖아요. 아무리 어려도죄를 지은 건 지은 거잖아요.”

“죽은 사람한테 이런 말해서 뭐한데요 난 그 새끼 죽었다는 소식 듣고 축하주를 마셨어요. 잘 뒈졌다. 윤진우. 이러면서요.”

윤진우에게 강간당한 여자는 윤진우가 배달을 하는 중국집에서 카운터를 보는 여자였다. 나이는 윤진우보다 두 살이 많았다.

“진우, 그 새끼 아주 나쁜 새끼죠.일 끝나고 가게에서 술 마시다가 절 덮쳤어요. 그냥 당한 거여요. 신고요? 쪽팔리게 그딴 걸 어떻게 신고해요. 그냥 넘어갔어요. 그후로도 몇번 같이 잤어요. 뭐 남녀관계가 다 그렇잖아요. 그렇다고 애인이나 그딴 건 아니고그냥 엔조이여요. 나도 그리 나쁘진 않았으니까요.”

탐문수사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동안 만난 용의자나 주변사람은모두 62명이다. 62명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했고 의심 가는사람도 없었다. 마치 안개 속에서 잃어버린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 같았다. 매일 파김치가 되서 집으로 돌아오는 호철이다.

“늦었어요.”

오늘도 파김치가 된 몸으로 아파트를 들어서려는 순간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구상에서 단 하나뿐인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보자 소녀가 서있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어요.”

“왜 여기 서있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를?”

소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오랫동안 바둑을 못뒀어요.”

아마 바둑을 두자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 범인을 잡느라 이더위에 파김치가 되도록 뛰어다니는데 이 오밤중에 바둑이나 두자니. 절로 혀가 차지는 호철이다.

“오늘은 곤란해. 너무 피곤해서 말이야. 다음에 두지.”

“오늘 두고 싶어요.”

“피곤하다고 했잖아.”

호철의 목소리가 딱딱해진다. 호철의 목소리가 그러든 말든 소녀는 여전히무덤덤한 눈길을 호철의 얼굴에 두고 있었다. 바둑을 두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리애야. 아저씨는 너무 피곤해. 이더위에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온몸이 땀투성이야. 당장 샤워부터 하고 싶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바둑. 내일두자. 약속해. 내일.”

“우리 집에서 샤워해요.”

소녀의 말에 한숨이 나오는 호철이다. 호철은 알고 있다. 절대 소녀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어. 그럼 한수만 두지.”

호철은 소녀의 아파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녀의 아파트로 들어오자 거실 중앙에 바둑판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소녀는이미 호철과 바둑 둘 준비까지 해놓은 것이다.

“샤워 해요.”

“됐어. 바둑이나 둬.”

소녀의 말에 호철은 무뚝뚝한 대답으로 바둑판 앞에 앉는다. 잔뜩 화가난 표정이다. 그것은 소녀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화다.왜 소녀한테는 꼼작을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특별한 감정 같은것도 없는데 호철은 항상 소녀의 고집에 지고 만다. 소녀 앞에서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여섯 점이어요.”

바둑판 앞에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은 소녀가 지난번 치욕적인 바둑을 다신 한번 상기시키려는 듯 말을 한다. 호철은 대답 없이 여섯 개의 돌을 바둑판 위에 놓았다. 목례를 한소녀가 한점을 좌상귀에 날일자로 걸친다.

딱딱딱.

적막한 거실에 바둑돌 놓는 소리만이 들린다. 바둑이란 묘하다. 바둑돌 놓는 소리만으로도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처음 힘없던소리가 점점 활기를 찾아간다. 뭔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둑은 중반전을 넘고 있었다. 흑백 중앙전이 한창이다. 아무리 봐도 흑이 유리한 싸움이다. 좀전까지 잔뜩 화난 표정인 호철의얼굴은 즐거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 잡지 않아도 된다. 꼬리만 끊어 먹어도 이긴다.

호철의 생각대로 백은 대마를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아홉 점을 흑에게 헌납한다. 그걸로 20집을 앞서는 흑이다. 이제마무리만 잘하면 흑승이다. 하지만 백의 저항은 끈질겼다. 곳곳에서착실하게 점수를 만회한다. 20집이 반토막이 난다. 한수놓을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계가에 여념이 없는 호철이다. 일곱 집,아니 여섯 집...막바지로 갈수록 집 차이가 좁혀진다. 호철의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바둑돌을 놓는 손도 미세하게 떨렸다. 마지막공배를 흑이 메운다. 계가는 흑이 석 집을 남긴다.

이겼다. 첫 승리다.

환호성이라도 터트리려는 걸 가까스로 참는 호철이다.

소녀는 묵묵히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원래 표정이 없는 소녀지만왠지 그 모습이 안쓰럽다. 쥐가 고양이 걱정하는 꼴이지만.

“내가 운이 좋았어. 이게 마침 축머리에 있어서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못 끊었을 텐데.”

“한수 더 둬요.”

바둑 두는 사람 중에 진 사람의 재대국 요청을 거절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지.”

호철은 첫 승리를 길게 만끽하려는 듯 천천히 돌을 거둔다.

두번째 판에서는 백이 좀 더 신중해진다. 첫번째 판에서 너무 무리하다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바둑은 지지부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바둑은 하수가 불리하다. 어디선가 기회를 잡아야한다. 우하귀를두는 호철의 마음은 좌변 쪽에 있었다. 저 허술한 백 진영을 어떻게든 깨트려야 한다. 저것만 깨면 이긴다. 2연승. 생각만해도기분이 좋다. 그런 기분 좋은 생각을 소녀의 목소리가 깨운다.

“사건은 어떻게 됐어요.”

“사건?”

“공원에서 있었던 사건이요. 살인사건이요.”

“그걸 리애가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공원에서 얘기했어요.”

“아...그랬지.”

바둑에 정신이 팔린 호철은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범인 잡혔어요.”

“아직, 지금 수사 중이야.”

건성으로 대답하는 호철의 눈길은 여전히 좌변 쪽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

“왜 못 잡아요. 어려워요.”

“연쇄살인 사건 같아. 다른 관할하고 공조수사 중이야.”

“공조수사요.”

“같이 협동해서 수사 중이라는 거야. 서대문 쪽하고.”

“그쪽에서도 살인사건이 있었어요.”

“응. 작년에.”

호철의 눈에 드디어 해답이 보인다. 선치중 후행마. 역시 바둑 격언은 틀리지 않는다.

...딱!

힘차게 좌변의 호구 자리에 치중한다. 백은 이을 수밖에 없다. 좌변 백의 모양에 뚫려져 있는 구멍으로 흑 한점이 밀고 들어온다. 집을지키려면 백은 막아야 한다. 그 순간 흑은 옆을 끊는다. 백이단수 치면 흑은 두점을 늘고 백이 따라나오는 순간 아래쪽에서 한점이 밀고 들어온다. 백이 집을 지키려면막아야한다. 그 순간 흑이 밑을 끊는다. 백이 단수 치면위로 되단수를 쳐 양단수가 된다. 그 순간 20집이 넘는백집이 초토화가 된다. 결국 돌을 거두는 백이다.

2연승.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호철의 입에 함지박만하게 웃음이 걸리는 것을 감추지 못한다. 한번만 이기면 다섯 점으로 떨어진다. 두번째 대국이 끝나고 호철은당연하다는 듯이 바둑판 위에 다시 여섯 점을 깐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듯이 바둑도 기세다. 한번 기세를 타면 둑이 무너지는것처럼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세번째 판도 호철은 아홉 집을 이긴다.

3연승. 드디어 다섯 점으로 떨어지는 호철이다. 파김치가된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금은 하늘을 날 것 같다. 묵묵히 바둑돌을 쓸어 담는 소녀를 보고 호철은머쓱하게 승자의 덕담을 건넨다.

“오늘 내가 운이 좋은가봐.”

“운 아니어요. 실력이어요.”

“다섯 점 차이에 무슨 실력이야.”

“기초가 좋아요.”

“내가?”

“수읽기도 좋아요.”

“그래?”

아무리 어린 소녀의 말이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호철이다.

“바둑을 오랫동안 안둬서 그래요. 이제 곧 호선이 될 거여요.”

“설마...”

“아니어요. 정말이어요. 우린좋은 상대가 될 거여요.”

소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무표정한 시선을 여전히 내 얼굴에둔 채로.

“그날이 올지는 모르지만요.”

나는 그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닥칠 그 엄청난 비극을.

만약 아직 오지 않은 그날, 이 순간을 기억한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지금이 차라리 행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문제 하나 낼게요.”

“문제?”

소녀는 빈 바둑판 위에 돌을 놓았다. 흑돌 하나, 백돌 하나. 번갈아가면서 놓는 수가 70개가 넘었다. 분명히 문제라고 했는데 소녀는 마치 복기를 하는것처럼 긴 수를 놓았다.

“백선으로 사활문제여요.”

“사활?”

호철은 바둑판을 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사활문제야. 흑은 23개의 돌이 좌상귀에서 시작해 좌변으로 이어져 좌하귀에서하변까지 니은자 형태로 놓여져 있고 그 흑을 31개의 백돌이 둘러싸고 있다. 역시 백은 바깥쪽 흑에게 갇혀 있는 모양이다. 흑은 당연히 귀와변쪽에 집을 짓고 있고 백은 중앙쪽에 흑 한점을 잡아 한집의 모양을 하고 있다. 아무리 백선이라고 해도다른 한집을 낼 길이 없는 백이다.

좌상변 쪽에 흑을 단수를 치고 내려가면 좌상귀와 좌변의 흑은 끊긴다. 하지만좌상귀가 끊기더라도 귀쪽의 흑은 살아있다. 변쪽은 좌하귀와 하변까지 이어져 있어 백이 이곳저곳 찌를곳이 많아도 최소한 열 집은 내고 살 수 있다. 아무리 눈 씻고 봐도 백이 죽었다.

“정답은 백23수에 끝나요.”

“23수?”

백 선수면 45수에 흑이 죽는다는 거다. 이렇게 긴 사활은 지금까지 구경조차 못한 호철이다. 바둑판을 뚫어지게바라보던 호철은 백돌을 집는다.

역시 살려면 좌하귀쪽의 흑 구멍을 찌르는 것부터다. 호철은 좌하귀 2선의 두개의 구멍에 백을 찌른다. 흑은 당연히 1선으로 넘는다. 그 다음이 문제다.너무 광활해서 어디부터 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약점이 많아 보이지만 의외로 튼튼한 흑이다. 호철은 흑의 약점을 찔러본다. 그때마다 소녀의 입에서는 무덤덤한말이 나왔다.

“정답이 아니어요.”

처음 두 수에서 미로를 헤매던 세번째 수가 무려 20번째에 나온다. 하변 1선의 호구자리를 치중한다.둘 곳을 거의 다 둔 후에야 세번째 정답이 나온다. 그 후로 수차례의 시도 끝에 열세번째정답까지 맞춘다. 두는 호철로서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좌하귀에두세 집이라도 날 것 같은 흑집이 단 한집도 없이 메워졌다. 치중과 먹여치기로 만든 작품이다. 문제는 그 수순이 단 하나라도 틀리면 흑은 집이 생긴다는 것이다. 좌하귀의집을 완전히 없앤 다음에는 좌상귀와 좌변이다. 백은 좌변을 최소화하면서 한집을 내자고 한다. 흑은 백 한집을 옥집으로 만든다. 백이 살길은 좌상귀와 좌변을 끊는것뿐이다. 백은 흑 한점을 단수치고 내려가 좌상귀와 좌변을 절단한다.좌상귀는 살아있고 좌변은 일곱 집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열일곱번째 정답까지 온다. 여기까지 오는데 수십 번 돌을 놓고 들어냈다.

지금까지도 어려웠지만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과정이다. 백이 살려면 필연적으로좌변의 백을 잡아야한다. 일곱집이 난 집을 잡는다는건 불가능하다는걸 호철은 알고있다. 하지만 정답은 백이 흑을 잡을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여섯수. 여섯수만에 어떻게 저 흑을 잡는가. 백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흑을 포위하고 있다. 그 안의 흑은 위쪽에 2선으로 화살표모양처럼 다섯집을 갖추고있고 그 아래쪽 1선에 꼬리처럼 두집이 나있다.총 일곱집. 치중해도 흑이 이으면 산다. 끊어도산다.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 흑이다. 바둑돌을 놓을 자리는겨우해야 일곱개인데 수백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 늦었어요.”

소녀의 말에 문득 제정신이 돌아오는 호철이다. 시계를 보자 벌써 1시가 지나고 있었다. 소녀의 집에 온 지 벌써 4시간이 지났다.

“집에서 풀어요.”

방으로 들어간 소녀는 문제의 기보가 프린팅된 A4 용지를 들고 나온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 같았다.

“문제를 풀면 선물을 줄게요.”

“선물?”

호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다. 그 순간, 아주 짧은 순간 소녀의 눈이 슬퍼보였다. 지금까지 전혀 감정이 없는소녀의 눈이었다. 그런데 슬프게 보였다. 호철은 소녀의 눈을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검은 눈이다. 잘못 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