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동에 도착한 건 9시 훨씬 넘어서였다. 넘치는 차량 물결 속을 몸부림치면서 뚫고 왔지만 1시간이 넘은 시간이 걸렸다. 코란도도 호철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불광동에 와서도 낙원이란 이자까야를 찾는데 20분이 걸린다. 정말이지 눈을 부비고 봐야 겨우 보일 정도의 코딱지만한 술집이었다. 시계는 이미 10시를 넘고 있었다.

다급히 술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호철은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코딱지만한 술집 안에는 남자 손님 두명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민지현인지 뭔지 하는 여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먼길을 왔는데 그새를 못참고 가다니.

웬만해서 화를 안내는 호철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울화통으로 머리가 폭발 일보직전이었다. 누구든 걸리면 요절을 내버릴 생각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부라리고 봐도 요절낼 상대가 없다. 호철은 마치 길 잃은 오랑우탄 같았다. 그때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길 잃은 오랑우탄을 엄마 품에 안긴 오랑우탄으로 바꾼다.

“강호철씨.”

돌아보자 잔뜩 취해서 눈이 풀린 여자가 생긋 웃으며 서 있다.

“민지현씨?”

“맞아요. 마침 화장실을 다녀오던 참이라.”

호철이 보기에 이 여자가 강력반 형사가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 제법 큰키에 검은색 바지, 검은색 슈트, 가슴까지 단추를 풀어헤친 새하얀 브라우스. 거기에 검은테 안경을 끼고 있다. 경찰이라기보다는 대기업 회장 비서쯤으로 보였다.

“이쪽으로.”

민지현이 앞장서서 비어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자신이 마시던 테이블인 모양이다.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은 안주와 술병들이 놓여 있었다. 이미 두병째 소주가 반쯤 비워져 있다. 혼자서 한 병 반을 마신 여자다.

호철에게 묻지도 않고 여자는 주인에게 소주잔을 달라고 해서 술이 넘치도록 따른다.

“자, 먼저 한잔 하지.”

대뜸 반말이다. 겨우해야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한테 반말이라니. 다시 길 잃은 오랑우탄이 되려고하는 호철이다. 하지만 참자. 아쉬운 놈은 나니까.

“원샷.”

지현의 선창에 눈깜짝할 새에 술잔을 털어내는 두 사람이다. 빈잔에 소주를 따르며 지현이 넋두리처럼 말을 이었다.

“한달에 한두어 번 이래. 우리 직업이 워낙 스트레스가 많잖아. 달리 스트레스 풀 길도 없고. 동료들하고 같이 마시면 그것도 스트레스 연장이야. 술 마시면서 무슨 얘길 하겠어? 또 일 얘기잖아. 그렇다고 사회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 마시는 거지. 뭐 가끔 클럽 같은 데도 가긴 해. 스트레스 푸는 걸로는 그만한 데가 없지만 똥파리들이 문제야. 남자들 말이야. 남자 같은 남자면 얼마나 좋아. 요즘 남자들은 한결같이 계집애들 같아가지고...주제에 껄떡대기는...그러다 한대 터지기라도 해봐. 징징 짜는 꼴이란...”

“저어...”

끝없이 이어지는 지현의 말을 자르는 호철이다.

“뭐?”

“홍제천 살인사건.”

“아, 맞아. 그것 때문에 왔지. 한잔 마시고 얘기해.”

다시 또 원샷이다.

“연쇄살인이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2일날 공원에서 오상복이란 사람이 나무를 등지고 살해당했습니다. 7번과 8번 늑골을 관통한 자상으로 인한 장기손상과 과다출혈이 사인입니다.”

“늑골은 건드리지 않고 깨끗하게?”

지현의 질문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호철이다. 자기만 꼬박 존댓말을 쓰는 것이 내내 비위가 상하는 판국에 ‘네’라는 대답은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호철의 생각이다.

“흉기는?”

“길이 25센티의 양면날 칼입니다.”

“살해자의 예상 키는?”

“165에서 170센티.”

“왼손잡이지?”

“네.”

기어코 ‘네’가 나오는 호철이다. 스스로에 화가 난 호철이 벌컥 소주를 들이킨다.

“범인 족적은 찾았고?”

“260미리 나이키 운동화.”

엉겹결에 나온 ‘네’라는 대답에 스스로 부어터진 호철이 말 꼬리를 잘라먹는다.

“내 경찰 인생중 가장 큰 치욕이야. 유일한 미제사건이니까. 아니, 미제는 아니야. 잠시 보류해둘 뿐이지. 그 새끼 잡기만하면...”

“피살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죽어도 싼 놈 이었지. 21살, 윤진우. 고등학생 때 퇴학당하고 제 부모까지 두들겨 패고 집에서 뛰쳐나온 놈이니까. 피살 당시 중국집에서 배달을 했어.”

지현은 말을 끊고 가늘고 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를 내뿜는 지현을 호철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담배 피니까 이상해?”

“아무래도 요즘 시대가...”

“이거 위장용이야. 우리 직업이 직업인만큼 예의 없는 놈들을 많이 만나잖아. 특히 여자를 우습게 보는 시대에 뒤떨어진 놈들이 의외로 많아. 그럴 때 담배를 딱 꼬나물고 뭔가 험악하게 보이려는 게 내 나름대로의 컨셉이야. 뭐 그렇다고 썩 효과가 있는 건 아냐. 내가 담배를 피건 코딱지를 파건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습게보고 덤벼드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그러다 나한테 뒈지게 터진 놈들을 줄을 세우면 연병장 한 바퀴를 돌고도 한 10명쯤 남을 거야.”

호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되먹은 여자인가. 생긴 거하고 말투나 행동은 영 딴판이다. 세상에 이렇게 딴판인 인간도 있나 싶다.

지현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윤진우 그놈은 주변에 원한 산 놈들이 많았어. 돈을 뜯긴 놈, 두들겨 맞은 놈, 오토바이를 강탈당한 놈. 애인을 뺏긴 놈, 강간을 당한 여자, 용의자를 줄로 묶으면 몇 두릅은 될 거야. 하지만 전부 허당이야. 용의선상에 오른 놈들 전부 알리바이가 확실했거든.”

“가족관계는?”

“아까도 말했지만 오래전에 집을 나온 놈이야. 3년도 넘었어.”

지현이 겨우 반만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왜? 그쪽은 가족 쪽에 문제가 있나?”

“아직은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말씀드리죠.”

“남자가 쪼잔하기는...”

지현의 그 말에 아까부터 품었던 앙금이 터진다.

“계속 듣고 있자니 귀가 간지럽습니다. 원래 말투가 그렇습니까? 아무한테 반말하는 거 말이죠.”

“천만에. 아무한테나 하지 않아.”

“그런데 왜 반말이죠? 보아하니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그래. 아마 내가 어릴 거야. 난 삼땡이니까.”

어이가 없는 호철이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스스럼없이 반말이라니.

“하지만 나이가 밥먹여주는 건 아니잖아. 경찰경력 몇년 차야?”

“7년.”

“난 13년. 계급은 경사고. 자긴 기껏해야 경장쯤일 텐데. 그렇지 않아?”

갑자기 할말이 없어지는 호철이다.

“나한테 경례 붙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엉덩이를 백번은 걷어 차였을 텐데 그냥 넘어가는 걸 고맙게 생각해. 술이란 건 사람을 이렇게 관대하게 만들거든. 그래서 좋아.”

지현의 말에 공연히 술잔만 만지는 호철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풀죽을 건 없어. 정 억울하면 자기도 말 놔. 괜찮지?”

“그러...지.”

그렇다고 해도 억울한 건 여전하다.

“근데 몇 살이야?”

“서른다섯.”

“나보다 두 살 많네. 난 한 열 살쯤 많은 줄 알았는데.”

도대체 뭘 먹어서 이렇게 싸가지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결혼은?”

“지금 미팅하는 줄 알아?”

“깔깔깔...”

호철의 말에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 지현이다.

“그런 자리라면 좋겠어. 그랬다면 내가 애프터를 신청했을 텐데. 자긴 내가 어때? 괜찮지 않아.”

“노쌩큐야.”

호철이 소주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남자가 무뚝뚝하긴. 어쨌든 오늘을 기억해둬야겠어. 민지현, 모처럼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다. 오늘이 며칠이지?”

“5월10일입니다.”

지현이 혼잣말처럼 묻자 뒤쪽 작업대에서 생선을 손질하던 주인이 부하처럼 대답한다. 보아하니 민지현이란 여자는 이 가게 단골쯤 되는 것 같다. 저런 성질 더러운 여자가 단골이라니...그동안 주인이 받았을 핍박이 부하 같은 대답에서 절절히 묻어난다. 그나저나...

-5월10일.

문득 5월10일이란 날자가 귀에 익는 호철이다.

-5월10일? 오늘 뭔가 약속이 있었는데. 뭐지? 무슨 약속이지?

잠시 머리를 굴린 호철에게 기억 하나가 잡힌다.

-맞다! 오늘 유리애란 소녀와 약속이 있었다. 지금 몇시지?

시계는 이미 11시를 넘고 있었다. 9시 약속이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마치 테이블을 엎을 기세로 일어나는 호철이다.

“나 먼저 가.”

“남자가 매너가 왜 그래. 여자를 혼자 놔두고.”

지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따갑게 때린다. 그러든 말든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뛰어나간다. 이미 술을 마신 호철은 애마인 코란도를 버리고 택시를 잡는다. 11시가 넘은 거리는 아까와 달리 한산했다. 아무리 한산해도 아파트까지는 30분은 걸린다. 도착하면 12시가 다된다. 밤거리를 달리는 택시가 한없이 늦게 느껴지는 호철이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시계는 이미 11시40분을 넘고 있었다. 부랴부랴 오긴 했지만 갑자기 발길이 무거워지는 호철이다. 약속보다 2시간 40분이 지났다. 이 시간에 가야하는지 망설여진다. 호철은 고개를 들어 소녀의 아파트를 찾았다.

105동 1304호.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불이 켜진 창문을 보고 용기를 내 아파트로 들어선다. 마치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 같은 발걸음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양 옆으로 아파트가 있는 구조다. 호철은 1304호 현관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쉽게 벨을 누를 용기가 없었다. 몇번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벨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는 호철이다.

“오셨어요.”

현관문을 연 소녀는 여전히 무심한 눈길로 호철을 빤히 바라보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그...그래.”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호철이다. 소녀는 인터폰으로 현관문 밖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호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미...미안해. 내가 좀 늦었어.”

“술 마셨어요.”

“응...그래. 조금.”

“들어오세요.”

소녀가 입구를 비켜주자 호철은 안으로 들어서며 버릇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철의 아파트 구조와 같다. 방 두개에 거실, 주방이 있는 24평형이다. 거실은 그야말로 심플 그 자체였다. 하얀 2인용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거실장 같은 가구도 없었고 TV나 오디오도 없었다. 벽에도 흔한 액자 하나 없이 하얀색 그대로였다.

주방에 있는 식탁에는 갖가지 음식이 차려져있고 가운데에는 케이크가 놓여져 있었다. 그것을 본 호철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늦게 온 것이 더더욱 죄스러웠다.

“미안해. 부랴부랴 오느라 선물도 준비 못했어.”

“선물은 괜찮아요.”

“이 음식을 전부 혼자 만든 거야?”

“혼자했어요.”

차려진 음식은 그야말로 음식 종합선물세트처럼 보였다. 갈비찜에 잡채, 전, 샐러드, 연어 까나페, 닭꼬치구이, 밀병쌈, 거기에 소시지 볶음, 떡볶이도 있었다. 떡볶이를 보고 웃음을 터트릴 뻔한 호철이다. 아마 어린소녀라 무슨 음식을 해야하는지 모른 모양이다.

“이걸 혼자 다 만들려면 고생했을 텐데...”

“고생 안했어요.”

“그래. 먼저 케이크에 불을 켜야지.”

호철의 말에 불을 끄고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이는 소녀다. 열여덟 개의 초. 불이 붙은 초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점점 주변이 밝아졌다. 그 밝기에 소녀의 모습도 어둠속에서 드러났다.

소녀의 모습을 본 호철은 가슴이 멍해졌다. 소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소녀는 두번 만나는 동안 그저 예쁜 여자애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지금 소녀의 모습은 예쁘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자였다. 잠시 잃었던 넋을 소녀의 말소리가 깨운다.

“다 붙였어요.”

“응...그래. 그럼 축가를 불러야지.”

호철이 생일 축가를 부른다. 마치 호세 카레라스 같은 감미로운 미성이다.

축가가 끝나고 소녀가 촛불을 끄자 주변은 다시 어둠에 묻혔다.

“성인이 된 거 축하해. 꼭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좋은 건 아냐. 책임져야할 일이 너무 많거든. 경제적인 책임, 가족에 대한 책임, 사회에 대한 책임, 온통 책임뿐이지.”

어둠속에서 혼자 말하는 호철이다.

“뭐해?”

“보고 있어요.”

“뭘? 나를?”

“...”

소녀는 잠시 말없이 앉아있다 불을 켰다. 식탁 위의 음식들이 다시 정물화처럼 드러났다.

“먹어요.”

“그래. 뭐부터 먹을까.”

호철은 갈비찜을 들었다. 이미 식어빠진데다 간도 맞지 않은 갈비찜을 맛있게 먹는 호철이다.

“맛있어요.”

“응. 어린애치곤 제법인데. 미안, 이제 숙녀지.”

“노래 잘 불러요.”

“나?”

소녀는 빤히 호철을 바라보았다.

“원래 성악을 할 생각이었어. 사정이 안돼서 포기했지만.”

“음악 좋아해요.”

“내 유일한 취미지.”

“결혼은 했어요.”

특이한 날이다. 하루에 결혼했냐는 말을 두 여자한테 듣는다.

“아직.”

“왜 안했어요.”

“글쎄, 아마 하고 싶은 여자가 없었을 거야.”

“사랑한 여자 없었어요.”

“없었어.”

“누구랑 살아요.”

“혼자 살아.”

이 늦은 시간에 이런 어린 여자애와 이런 대화를 하는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호철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하지만 마음과 달리 물 한잔을 마신 호철의 말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리애가 질문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야. 왜 혼자 사는 거지? 부모님은?”

“죽었어요.”

소녀의 감정 없는 말이 마치 남의 얘기하는 듯했다.

“두 분 다?”

“엄마, 아빠 다 죽었어요.”

“언제?”

“오래됐어요.”

“그럼 어떻게 생활해?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아파트나 생활비 말이야.”

“유산이 있어요. 이모가 관리해요.”

“학교는 왜 안다니는 거야?”

“...”

소녀는 더 이상 대답을 않고 호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 소녀와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한 호철은 습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호철의 눈에 특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소파 옆에 하얀 천으로 덮힌 사각형의 물건이다.

“저건 뭐지?”

“바둑판이어요.”

“바둑판?”

“바둑판이어요.”

소녀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바둑 둘 줄 알아?”

“둘 줄 알아요.”

호철은 바둑을 둔다는 소녀가 생경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소녀는 바둑하고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 호철에게 소녀가 똑같이 묻는다.

“바둑 둘 줄 알아요.”

“응. 조금.”

호철은 군대에서 바둑을 배웠다. 대대장이 바둑광이었다. 바둑은 전략의 기본이며 정신적 수양과 더불어 집중력과 침착함을 함양하는데 더 없이 좋은 스포츠라는 게 대대장의 지론이었다. 덕분에 대대원들은 시간 날 때마다 바둑 배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호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열성적인 건 아니었다. 분위기가 그러니 단수정도는 알아야겠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에 불을 지핀 사람이 바로 위 고참이었다. 고참은 대대 최고수였다.

“곰탱이가 무슨 바둑이야. 니가 한달 안에 축을 배우면 내 손에 장을 지지지.”라면서 비아냥댔다.

그 말에 호철은 눈에 불을 켰다. 축, 장문은 당연히 하루 만에 익히고 패, 환격에 귀곡사, 오궁도화, 매화육궁을 마스터해갔다. 호철은 바둑을 배운 지 일년 만에 한달 안에 축을 배우면 자기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고참을 꺾고 대대 최고수가 된다. 그걸로 호철에게 바둑은 다시 시들해버린 취미가 돼버렸다.

“얼마나 두어요.”

“조금, 바둑둔 지 하도 오래돼서.”

“한수 둬요.”

“지금? 너무 늦었잖아.”

소녀는 대답대신 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수 두기 전에는 절대 집에 갈 수 없다는 걸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한수만 둬.”

호철의 말에 소녀는 일어나 흰 천이 덮힌 물건을 들어 거실 가운데 놓고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종교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한 진중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소녀가 조심스럽게 흰 천을 거둬내고 바둑판이 드러나자 호철은 감탄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둑판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세월의 윤기가 흐르는 바둑판은 은은한 담황색에 가로 세로 19개의 바둑줄이 일정한 굵기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최고의 재질에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바둑판이었다. 군대시절 대대장이 목숨만큼 아끼던 바둑판도 이런 것이었다. 바둑판 재질로는 최고라는 비자나무로 만든 바둑판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대장이 목숨만큼 아끼던 바둑판도 이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좋은 바둑판이야.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아빠 유물이어요.”

“그럼 바둑은 아빠한테 배웠어?”

“아빠가 가르쳐줬어요. 아주 어릴 때.”

“어떻게 둬야하지? 서로 급수를 모르니...”

“처음이니까 호선으로 둬요.”

“그러지.”

호철이 흰 돌을 한웅큼 쥐었다.

소녀의 희고 섬세한 손가락이 검은돌 하나를 바둑판에 놓았다.

호철이 쥔 돌은 열한 개. 홀수를 맞힌 소녀다. 소녀가 흑이다.

흑을 쥔 소녀는 단정하게 목례를 하고 돌 한개를 들었다. 그것을 우상귀 화점에 놓는다. 돌 놓는 소리가 청아하게 밤공기를 깨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