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붓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다. 온통 비에 젖은 몸이 천근만근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은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산등성인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올라가야 한다. 그 끝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오를 수밖에 없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4월이지만 비에 젖은 몸은 뼛속까지 한기를 느꼈다. 밥을 먹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온다. 오늘도 밥 한알 입에 넣지 못했다. 어제는 먹었던가? 기억이 없다.

여자는 이미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걷고 또 걷는다. 산을 오르면 그곳에 마치 낙원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때 힘없이 걷는 여자의 발이 비에 젖은 풀에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는다. 순간이었다. 땅을 밟고 있어야 할 발이 허공에 떠있다. 몸은 어디론가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끝인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허우적대는 여자의 손을 잡는 손이 있었다.

“이 새끼야!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낭떠러지에 매달린 여자의 손을 잡은 남자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남자의 손에 매달린 여자가 밑을 보았다. 밑은 블랙홀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있다. 떨어지면 이 고통도 끝이라는 것을..

“뭐하는 거야. 새꺄. 밑을 보지 말고 나를 봐!”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여자 때문에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씨발.. 지금 뭐하는 거야. 내 팔힘 테스트 하는 거야 뭐야. 가만히 있지 말고 힘 좀 써봐!”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를 붙잡고 몸을 지탱하며 발악했다. 그런 남자와 달리 여자는 태평했다. 아니 절망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눈빛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하나씩 풀었다. 엄지, 검지, 중지.

“뭐하는 거야! 지금! 미쳤어. 너!!”

남자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우리..이제 끝내.”

“씨발..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빨리 손을 잡아!! 미끄러지잖아!!”

남자의 외침과 달리 여자는 마지막 남은 손가락마저 풀었다. 오직 남자만이 여자를 잡고있었다. 한손으로 여자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자는 나무를 잡고 있던 손을 동원해 여자의 손을 잡았다.이제 남자를 지탱해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40킬로그램이 넘는 여자의 몸을 끌어올려야 한다. 남자는 필사적이었다. 같이 떨어지든가 아니면 여자를 끌어올리든가..

남자는 절규했다.

“은서야!!”

남자의 손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 점점 남자의 손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필사적이어도 소용이 없었다. 남자의 손이 잡고 있는 건 겨우 해야 여자의 손가락 끝이었다. 그것도 잠깐, 남자의 손아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끝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끝이다. 남자의 절망은 욕으로 튀어나왔다. 

“씨...”

그 다음 “..발”을 말하기 전 남자의 팔을 덥석 잡는 손이 있었다. 여자였다.

“그래. 힘내!!”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자 한결 수월해진다. 남자가 여자의 뒷덜미를 잡아 끌어올린다. 천신만고 끝에 올라온 여자는 녹초가 된 몸을 벌렁 눕혔다. 마치 바늘 같은 빗줄기가 얼굴에 꽂혔다. 남자는 나무에 기대앉아 헐떡이던 숨을 고르고 으르릉거렸다.

“개 같은 년!”

“그럼 왜 그렇게 살렸어. 죽게 내버려두지.”

“그걸 말이라고 해!”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린아이처럼 잔뜩 부어터진 얼굴이었다.

“배가 고파.”

“조금만 참아.”

남자는 담뱃불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가면 돼. 그럼 낙원이 기다리고 있어. 차를 한대 살 거야. 벤츠로.. 최고급 양복을 입고 벤츠를 몰고 최고급 식당에서 제일 비싼 음식을 먹고 팁도 멋지게 뿌리는 거야. 아마 사람들은 우리를 왕처럼 쳐다보겠지.”

남자는 허공에 담배연기를 뿜었다. 마치 행복한 꿈을 꾸는 얼굴이었다.

“몇 시야?”

여자의 말에 남자가 꿈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았다. 

“4시 50분.”

“이제 곧 동이 틀 거야. 빨리 움직여야 돼.”

여자가 몸을 일으키자 남자는 하늘을 보며 투덜거렸다.

“씨발..하늘에 빵꾸가 났나. 대체 이 비는 언제 그치는 거야.”

“우리한테는 비가 오는 게 더 다행이야.”

“하긴 그렇지만.”

여자가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남자가 귀를 쫑긋했다.

“잠깐!”

“왜 그래?”

“들어봐.”

남자는 요란한 빗소리 속에서 뭔가를 들으려는 듯 귀에 손을 대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무슨 소린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잖아.”

“가만..”

남자의 행동에 여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앞을 보았다. 여자에게는 쏟아지는 빗속에 시커먼 나무들만 보였다. 들리는 건 빗소리뿐이다. 하지만 여자는 알고 있었다. 강민혁이라는 이 남자는 보통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손안에서 찰랑대는 동전 소리만 듣고도 개수를 알아 맞췄다. 왁자지껄한 야구장 내야석에서 덕아웃의 감독의 말까지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싱크대에서 바퀴벌레가 과자를 갉아먹는 소리를 듣고 바퀴벌레를 잡은 적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가..”

그때 여자에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 것은 빗소리를 뚫고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거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개가 짖는 소리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가 광범위하게 퍼져서 짖는 소리였다.

“개 짖는 소리야!”

“씨발.. 짭새들 똥개야.”

“틀렸어. 밑으로 내려가.”

“밑은 괜찮을 것 같아!!”

남자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찢어졌다.

“밑에는 군바리까지 동원돼 있다고!”

“그럼 어떡해.”

발악하듯 소리치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남자가 할 수 있는 대답이 없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묻는다. 여자의 물음은 마지막 확인일 뿐이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남자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비 때문에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불을 붙인 남자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꽤 오래됐지. 우리..”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 짧은 건가? 1년쯤이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이 무슨 소용이야!”

“그거 알아? 너 처음 볼 때부터 좋아했다는 거..”

“미친 새끼.”

“그래 미쳤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살수 없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도망갈 궁리나 해봐. 이 바보야.”

“미안해. 여기까지야.”

“그럼 감옥에 갈 거야?”

“아니, 난 안가.”

“안가면! 안가면 어떡할 건데..”

남자는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둠에 묻힌 남자의 표정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자의 입에 물려진 담배가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바지 뒤춤에서 검은 쇠붙이를 꺼내 들었다. 권총이었다. 38구경 리벌버.

“한발이 남았어.”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뱉으며 남자는 말을 이었다.

“난 죽을 거야.”

“강민혁! 너 제정신이야!!”

“보다시피 멀쩡해.”

“멀쩡한 놈이 그런 생각이야! 차라리 자수해!”

“낄낄낄..자수?”

남자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수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전과자에다 살인까지 한 놈이야. 그런 놈을 살려둘 만큼 이 씨발놈의 사회는 관대하지 않다구. 보나마나 넥타이를 매겠지. 넥타이를 매면 어떻게 죽는지 알아? 똥오줌 다 싸갈기면서 대롱대롱 매달려 죽는다구. 난 그렇게는 안 죽어. 죽어도 멋지게 죽는 거야.”

“아냐. 사형은 그렇게 쉽게 시키지 않아. 잘하면 무기, 아니 20년쯤 살면 돼. 우리 나이 이제 겨우 스물넷이야. 20년 살아도 40대라구.

"좃까는 소리 하지마! 난 깜빵은 안가!”

“그럼 나부터 죽여! 나부터 죽이고 죽어버려!”

“넌 살아야 돼.”

“싫어!”

여자가 남자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비에 젖은 여자의 몸이 그대로 남자한테 느껴졌다. 탄력 있는 유방. 가늘게 팔딱이는 아랫배. 마치 남자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한 아랫도리. 남자는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씨발..이럴 줄 알았으면 나한테 한번 주기라도 하지. 아마 난 너 때문에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거야.”

그때 남자의 입을 여자의 입이 막았다. 얼음처럼 차갑고 촉촉한 입술이었다. 그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남자의 살점이 침범했다. 그 살점을 여자의 살점이 다소곳이 마중한다. 두 살점이 하나로 엉겼다.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 남자는 이제 죽어도 좋았다. 이제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때 여자의 손이 권총을 든 남자의 손을 잡아 올렸다. 위로 올라온 권총은 서서히 목표물로 향했다. 여자의 관자놀이였다. 

“당겨줘.”

여자의 속삭임은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들렸다.

개 짖는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빗줄기 속으로 우의를 입은 경찰들이 보였다. 1개 중대로 보이는 경찰들은 산 전체를 일렬횡대로 훑으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경찰들의 플래시 불빛이 개미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산 전체를 대낮처럼 밝혔다. 그때 경찰견들이 미친 듯이 짖으면서 한곳을 향해 질주했다. 

“저쪽이다!!”

지휘관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모든 경찰들이 경찰견이 달리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빗소리와 개 짖는 소리. 경찰들의 군화소리. 그 소리들은 마치 불협화음처럼 산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때 그 불협화음을 깨트리는 소리가 있었다.

타앙..

한발의 총성.

그 소리로 산은 다시 적막에 잠겼다.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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