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굵직한 빗방울이 창문을 넘어 침범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비를 쳐다보며 담배 한대를 피워봅니다.

담배연기는 거센 빗속을 가르며 퍼져나갑니다.

그 퍼져나가는 연기 속에 추억이 떠오릅니다.

바둑을 처음 배웠을 때가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시절 태옥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어머님은 식당일을 나가시느라 그의 집은 늘 저를 포함한 친구들의 아지트가 되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태옥이가 꺼내들던 문방구표 접는 바둑판과 싸구려 바둑돌. 바둑이라는 것이 있다는 얘긴 들었지만 바둑판과 바둑돌을 보긴 처음이었습니다. 가족과 친지 중에 바둑두는 분들을 정말로 한 분도 보지 못했었거든요.

태옥이는 그 당시에 권투도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려운 가정형편상 정식으로 돈을 내고 다녔던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하며 도장 형들에게 간간이 배우는 정도였습니다.

아마 그때 태옥이는 그 도장 형들에게 바둑이란 것을 배웠었나 봅니다.

축이 뭔지도 장문이 뭔지도 단수가 뭔지도 모르는 저에게, 대강의 룰을 가르쳐준 후 시작된 태옥이와의 첫 대국.

축을 모르니 대각선의 끝까지 나가 수북이 죽어나갔던 돌들과 패모양에서 태옥이가 딴 후 제깍 낼름 따버리다 핀잔 먹은 일, 또 계가할 때 그나마 남은 몇 집을 채우고도 두 주먹은 남았던 제 사석들이 기억의 저편에 남아있습니다.

그후에도 몇 차례 더 대국을 하긴 했지만, 워낙에 생각하길 싫어하고 성정이 급하여 바둑에의 흥미를 더는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끝나고 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추첨으로 번호를 뽑으면 읍사무소에서 확성기를 통해 몇번 몇번은 어떤 중학교 하는 식으로 학교가 결정되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태옥이와 같은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상의 흑돌보다도 더 시커멓던 교복색깔과 학교마크가 새겨진 황금색 단추, 옆구리에 끼는 군청색 가방. 챙이 유난히도 딱딱했던 모표 달린 모자. 목에 채워 걸어야 했던 호크 덕분에 교문 앞 선도부원에게 기합받던 일들도 추억으로 남는군요.

중학교에 입학하자 태옥이는 예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데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하고 자라 어두운 그늘에 젖어있던 그였지만, 정 많은 성격에 운동도 잘하고 의리도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 늘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점점 학교 내에서 불량으로 꼽히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술담배도 예사로 하는 등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나의 관계도 친구라는 개념이 무너질 쯤인 중학교 3학년 무렵, 태옥이는 당시 어울리던 친구들과 교회를 턴 죄로 소년원이란 곳에 들어가게 됩니다. 학교는 당연하게도 그를 퇴학시켰고요.

그렇게 태옥이와 저와의 인연은 끝나 보였습니다.

그후로 전 평범하게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태옥이란 친구가 있었다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져 가던 대학 1학년 시절. 한두 달에 한번씩 내려오던 고향길에서 그를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읍에서 시로 승격된 고향의 허름한 기원에서 나오던 초라한 행색의 청년. 바로 태옥이었습니다.

쭈뼛쭈뼛 말도 못붙이던 내게 "너 00 아니냐?" 하며 반갑게 손 내밀던 그.

술 한잔 하자며 끌고 갔던 순두부집에서 막걸리를 나누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소년원에 갔다온 뒤로도 두세 번을 더 들락거렸고, 어머니와는 거의 의절한 채 현재 기원에서 숙식을 해결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사범 비슷한 걸 하면서 손님들 상대도 해주고 내기바둑도 두며 돈푼이나 얻어 쓰는 모양이었습니다.

바둑에 흥미를 못 느꼈던 저와는 달리 태옥이는 초등학교 이후로도 꾸준히 바둑공부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었고, 특히 소년원에 가서 바둑책을 많이 보았다고 하더군요.

하여간 그때 제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리 행복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며칠은 잠은 못잔 듯한 움푹 패인 눈과 까칠하게 자라있는 수염, 반팔 셔츠 사이로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서툰 솜씨의 참을 인자 문신, 땟국물이 흐르는 건빵바지 등 많은 것들이 그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는 듯 보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했다는 내 말에 몇번이나 부러움을 보이던 태옥이는 또 보자는 말을 인사로 또한번 제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또 한동안 세월은 흘러갔습니다.

전 군대를 제대하여 복학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한 여인의 연인이 되어 가까스로 조그마한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한두 번 쓰라림도 맛보고 그럭저럭 삶을 알아갈 때쯤 고등학교 동창모임에 참석하러 여자친구와 함께 고향엘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의 풋풋함은 덜한 대신 좀더 현실적이 되어 있었고, 조금은 진한 삶의 냄새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술과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누군가의 제안으로 고향에 하나밖에 없는 나이트클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제법들 술에 취해 웃고 떠들고 춤솜씨도 뽐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유난히 술을 못 이기던 친구와 옆 테이블의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버렸습니다. 이런저런 고성이 오가고 자칫하면 주먹까지 오고갈 상황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다가왔습니다.

바로 그였습니다. 태옥이.

시비를 걸던 옆 테이블 청년들은 그를 보자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고 사태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태옥이는 그때도 나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언제 내려왔냐?"
동창들과 여자친구에게 몇 마디 소개를 해주고 그와 단둘이 빈 테이블에 마주앉았습니다.

태옥이는 몇 년 사이 아주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영업부장이란 직함에 어울리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양복과 살이 통통히 올라 기름진

얼굴에서 예전에 기원 앞에서의 태옥이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전 그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그도 굳이 답하려 하지 않았고요.

요즘도 기원 자주 가냐는 내 질문에 바둑돌 만진 지 오래 되었다며 빙그레 웃음짓는 얼굴에서 잠깐이나마 어렸을 때의 친구모습이 보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또 태옥이와의 짧은 만남은 끝이 났습니다.

그후로도 드문드문 고향 친구들에게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만, 애써 찾으려 하진 않았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전 더이상 태옥이에 대해 알려고도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년이 흐른 오늘. 끊임 없이 쏟아지던 빗속에서 그가 떠올랐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그가 가르쳐준 바둑 때문이었는지...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었는지...

순수했던 어린 날의 좋은 기억만으로 태옥이를 떠올리기엔 이미 저도 세상의 때에 찌든 사람이기에 무언지 모를 아쉬움만 남는 밤입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또한번의 만남에서 태옥이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지, 그에게 보여지는 내 자신은 또 어떻게 비쳐질지......

비는 아직도 그치질 않고 잘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