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은 신라 무사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신채호 이선근 등 애국주의 사학자들의 노력으로 화랑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신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화랑세기가 1989년 2월 서울신문의 지상으로 불쑥 나타났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세상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황당(?)한 것이었다. 화랑 관창의 결사정신을 본받은 애국혼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첫회부터 손사래를 쳤다. 남색이나 혼음 정도는 애교였다. 화랑세기는 다중 섹스와 한 여자가 3대에 걸친 한집안의 남자들과 섹스를 나누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더구나 등장인물들이 선덕여왕이나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 등 왕족 또는 중요 인사들이기에 독자들은 물론 학자들도 뒤로 나자빠졌다. 화랑세기는 학계의 검토를 거쳐 (노태돈 등) 여지 없이 폐지(?)가 되었다.

화랑세기가 일본식 문투와 일본학자들의 악의에 찬 신라 인식이 담긴 위서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판단이 성급했다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다시 나왔다. 이종욱이 화랑세기는 위서가 아니라 진정성이 있는 신라사 연구의 중요 자료라는 논문을 거듭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대체로 7(위서) 2(중립) 1(정본)로 학계의 의견이 맞서 있다.

나는 이 논쟁에서 바둑의 기록이 혹시 논쟁의 접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얼마전부터 했다. 그것은 화랑세기 속의 바둑 기록을 접하고부터다.

ㅡ 公晩好琴碁與天明好明兩宮置酒山宮圍碁彈. 侍妾五人係雍容泰事

용춘공이 말년에 천명 호명궁을 지어놓고 술상을 들여 거문고와 바둑을 뜯고 두게 하며 다섯명의 여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편하게 살았다.

용춘공은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다. 김용춘은 화랑세기 속에 진평왕의 두 딸 중 한명인 천명의 남편이자 선덕여왕의 애인으로 나오며 한껏 호사를 누리다가 사후에 갈문왕에 추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춘공과 선덕여왕의 밀월은 낯뜨겁다. 용춘은 선덕여왕의 임신을 돕기 위한 우량 종자의 투입(?) 역이기도 하다.

사실 선덕여왕은 화랑세기의 기록이 아니라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자유한 성적 인물로 나온다. 여근곡의 전설이나 옥문지를 입에 담은 기록 등이 그렇다. 더구나 삼국유사에 전하는 영묘사 행차시 자신을 사모하다 죽은 지귀에게 겉옷을 벗어 준 일화는 선덕여왕의 자유한 성의식의 발로다.

이 기록은 한국 고대사의 기록뿐만 아니라 한국 바둑사에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한국의 바둑의 고대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3건이 전부다. 도림기사와 당나라 고수의 내응 그리고 신충과 잣나무의 맹세 그것이다. 이중 도림 기록은 소설적 에피소드의 구성으로 일찍부터 학자들의 의심을 받아왔다. 백제와 개로왕을 폄하하기 위한 작문이 아니냐는 혐의였다.

이 점을 정식으로 거론한 사람이 이도학이다. 그는 다시 쓰는 백제사에서 도림의 기사가 김대문이 쓴 한산기 속에 있다가 삼국사기 편찬자들에 의해 삼국사기에 수록되었다고 주장했다. 김대문이 704년 실제로 한산 도독을 역임했고 당시 이 일대에 퍼져 있던 개로왕의 전설을 수집, 모아 놓은 책이 한산기이고, 따라서 한산기는 일종의 풍물지였다는 것이다. 개로왕과 도미부인 전설의 출처도 한산기였을 것이라는 것이 이도학의 주장이다.

이 주장을 근거로 김대문의 인물상을 그려보면 김대문은 신라의 풍월주와 음악 바둑은 물론 불교에도 관심을 가진 호기심 많고 재주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김대문의 눈에 비친 바둑은 호사스럽고 사치한 것이다. 도림기사와 화랑세기 기사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의 사서 속에 바둑의 기록은 매우 희소하다. 그 희소한 바둑의 기록이 김대문이라는 한 사람을 배경으로 두 건이 나타나고 있는 점은 위서라는 화랑세기를 다시 한번 살피게 하는 단초가 된다.

삼국사기 도림기사의 출처가 한산기가 수원지라면 김대문의 다른 책 속에 바둑 기록이 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더구나 바둑의 인식이 사치와 호사로 모아지고 있다. 이 점은 화랑세기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서자가 이런 면까지 생각하고 용춘공의 바둑 기록을 작문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화랑세기의 필사자인 박창화는 1889년 청원에서 태어나 1923년 일본에 건너가 33년부터 44년까지 일본궁내성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한 사람이다. 그는 44년 귀국하여 60년 고향에서 작고한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박창화의 집에서 보관해 오다가 89년 세상에 공개된다.

화랑세기는 위서라는 판정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박창화가 개인적으로 습득한 역사지식으로 여러 종의 사서를 보고 화랑세기를 창작했다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개인이 역사서를 창작할 정도가 되려면 역사의 지식이라는 것은 전문가 서너 명의 지식을 공유하지 않고는 힘들다는 것이 학자들의 말이다. 과연 박창화는  역사학자들 서너 명을 감당할 정도의 역사지식을 갖춘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 외에 그의 창작품인 몇 권의 책이 더 있다. '강역고'라는 이름을 붙인 이 책은 그의 아들에 의해서 영인본이 나왔는데 이 책의 내용은 박창화의 역사지식이 별로 높지 않았음을 증거한다. 삼국시대와 고려가 중국에 있었다는 식의 박창화 나름의 연구로 고려시대의 기본적인 정보에도 오류를 보일 정도로 그는 전문 역사학자의 범주가 아닌 사람이다. 그러나 문장은 놀라운 점이 많다. 수필이나 그런 류의 글을 썼다면 좋은 작품을 썼을 것으로 본다.

박창화가 화랑세기를 작문하기 위해서 바둑의 금기서화를 이해하고 그것을 적절한 타이밍에 끼워 넣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박창화는 개인적으로 바둑을 잘 이해했다는 점도 주변에서 찾을 수 없었다. 후손이 살아있는 이상 그 점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을 통하여 당시 신라 사회에 바둑의 유행을 증거한다. 얼마전 경주 분황사에서 발굴된 15줄 전돌 바둑판이 그것을 증거한다.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세운 절이다.

화랑세기는 박창화를  통하여 세상에 얼굴을 반쯤 내민 책이다. 이 일을 한 박창화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역사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호기심이 이룬 쾌거다. 이런 공을 박창화의 개인적 저술 등을 시비 삼아 위서로 만든 것은 연구의 정도가 아니라고 본다. 화랑세기는 위서라고 하면서 학계 안에서 화랑세기의 분위기를 활용하는 이상한 풍토까지 생겼다. 이종욱 등 몇몇 연구자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다. 나는 화랑세기가 용춘공조의 기록으로 볼때 도저히 해방기를 살았던 한 백면서생의 창작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화랑세기는 박창화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원본(?)을 가슴 떨리는 심정으로 옮겨 적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