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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철동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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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철동이라는 거
2013-01-22 조회 11676    프린트스크랩
▲ 종로2가 관철동에 자리 잡았던 한국기원 회관 앞의 골목풍경.

   

 

1. 한국기원은 어디에 있었나

 

예전,

그러니까 90년대 초반만 해도 관철동 한국기원 옆에는 바둑의 하위문화가 즐비했다.

 

기원, 다방, 신문사, 출판사, 여관, 술집, 밥집, 등등. 저 홀로 떨어진 그런 장소, 그런 문화는 없었다. 언제나 바로 옆에 있었다. 멀어봤자 걸어서 10분 정도.

 

그랬다. 바둑은 만남과 대화 속에서 주변의 인식과 공감, 정서를 먹고 살았다.

왜 그랬을까. 시대가 그러니까, 60년대부터 경제가 활황이던 90년대 중반까지 그런 문화들이 바둑과 마찬가지로 잘 나가던 시절이라서 그랬을까. 그런 점도 없지 않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한국기원 옆에 신문사, 기원, 출판사, 술집, 다방 등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장소를 골라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것은 이미 조남철 선생이 바둑을 하나의 건전한 문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길 때부터 그랬다. 그런 자리의 중요성을 조남철 선생은 일찍이 경험에서 체득했다. 조남철 선생의 글을 보자.(바둑1974. 3)

 

"남산동 때부터 기원창립에 공이 컸던 이학진씨가 앞장서서 사동궁(寺洞宮) 15간 짜리 사랑채를 빌려내 주었다. 이때부터 한성기원을 조선기원으로 개칭했다. 오랜 만에 다시 차린 기원, 그것도 널찍한 방과 정원이 우선 마음에 들었으며 또 남산동이나 적선동 때보다도 종로 중심가에서 가까워져 찾아주는 팬들을 생각할 때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다.

 

더욱이 사동궁 안 사랑채였으므로 바둑두는 손님들도 마치 왕족이나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니 그야말로 금상첨화격이었다. 게다가 어쨌든 기원장소가 사동궁 사랑채, 따라서 시초의 한동안은 드나드는 바둑팬으로 제법 시끌시끌했다.”

 

사동궁은 예전 인사동 종로예식장 자리로 의친왕의 사저였다. 이학진 선생은 의친왕의 사위였고. 그 분 기억난다. 단아한 태도와 모습이 한결같았다. 몇 년 전에 백수(白壽 99)로 돌아가셨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 많을 것이다. 어쩐지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고 어쩐지 거리감 생기는 자리 따로 있는 거. 한국기원은 바로 그런 자리를 찾아서 1968년 세워졌던 것이다. 인간은 몸으로 활동하는 존재. 공간과 시간은 언제나 놓칠 수 없는 조건이다.

 

그 점에서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기원 1층에 유전(有田) 다방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노승일. 바둑2005. 2)

 

“1층은 유전(有田)다방이었다. 1층이 다방이었다는 사실은 회관 건립시기의 한국 문화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광복 이전에도 이른바 문화인들의 살롱 역할을 한 공간은 다방이었다. 6.25 전쟁 이후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조남철 선생에 명동에 송원기원을 열자 그곳은 문인, 화가, 교수, 기자들의 새로운 살롱으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승급심사에 매력을 느낀 수많은 대학생들도 드나들었다. 관철동에 한국기원 빌딩이 서자 송원기원의 수많은 애기가들은 이곳으로 흡수되었다.

 

(중략) 일반회원실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여럿 드나들었다.

(중략) 알고 보니 그곳에 온갖 천재, 기인, 학자들이 다 있었다.”


한국기원 일반회원실(기원)엔 바둑두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자료사진/한국기원)


 

 2. 소외의 보상책, 대화와 놀이, 기원

 

이 글 읽는 분의 연령대는 다양할 것이다. 1020대도 있지만 5060대도 있을 것이다. 이 글 쓰는 사람도 어언 60을 바라본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근대화 과정의 소외는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이었다.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올라왔을 때 느껴야했던 소외감. 60년대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 20세기 초부터 시인들의 소재로 줄기차게 떠올랐던 도시의 소외, 군중 속의 고독.

 

우리는 놀이를 즐긴다. 바둑도 등산도 영화도 놀이.

 

놀이문화는 60년대부터 폭넓게 도시인의 문화로 자리를 잡아갔다.

근대화 과정에서 주어진 소외는 삶의 고독을 가져오기에, 함께 하는 놀이는 하나의 보상책이 되었던 것이다. 바둑은 그런 보상에 알맞은 놀이였다. 승부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지만 대국 상대는 반드시 있어야하며 끝난 뒤에도 그냥 헤어지지 않는다. 바둑 둘 때의 즐거움은 현실의 소외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기원은 참으로 자연스런 발생이었다. 급속한 도시화에 힘입어 기원은 전파되었다.

기록을 보면 부산의 경우 도심 도로의 확장을 따라서 기원이 생겨나곤 했었다. 시골에서야 기원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몰리는 곳이어야 한다. 사람이 북적북적 모이는 도시야말로 개인이 군중의 고독을 씹는 곳. 소외에 힘들어하는 곳.

 

기원은 그런 곳에 자리 잡는다.

 

현재의 부산기객들은 각자의 가정이나 직장에 바둑판과 돌을 비치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현저히 늘어났으나 기기를 연마하고 흥미 있는 경기를 하자면 역시 기원에 나가야하고 또 으레히 시간만 있으면 즐거이 나온다.” (바둑1970.8. 박용규 수필 정짓가스나 기생이나 된 듯...’)

 

근대화가 가져온 소외의 일터에서 기원이 피난처가 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서로가 동질감을 느끼는 것. 술이나 음식을 먹으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그런 것. 바둑도 그런 것에 의해 놀이가 진행되는 것이다. 단순히 반상 돌의 연결이 전부가 아니다.

 

왜 그런가. 바둑이란 시간을 죽이는 작업으로 본질은 놀이.

시간을 죽이는 과정은 소외를 벗어나는 과정이다. 따라서 너와 내가 함께 어울리는 것이 바둑에 따라다닌 것은 자연스런 일.

 

그래서 알 수 있다. 바둑문화라는 것을 보고자 한다면, 다른 문화와 바둑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보면 된다. 가치는 언제나 사회적 가치인 것. 저 홀로 가치를 외치는 놀이나 문화는 없다. 그러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승부만 양산하는 것은 바둑의 문화가 될 수 없다. 그런 시절은 없었다. 승부만 양산하면 반드시 대가가 온다. 애기가들이 바둑을 떠나는 대가. 왜냐하면 바둑의 즐거움이란 것은 승부를 넘어선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둑이란 무엇이냐 할 때의 그 바둑의 정체성,

기사란 무엇이냐 할 때의 그 기사의 정체성은 바둑이 다른 문화와 어떻게 연계되고 있느냐? 그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바둑이 다른 문화를 어느 정도 흡수하느냐? 그것이 바둑의 성장인 것이다. 바둑은 바둑이 아닌 것과 연결될 때 비로소 자신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방의 문화, 술집의 문화 등 그런 하위문화에 의존해서 바둑은 넓혀져 왔던 것이다. 박치문이 쓴 관철동시대의 일부를 보자.

 

한국바둑은 이곳에서 장미꽃을 피워냈다. 1989년 조훈현이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하더니 93년과 94년엔 이 기간에 열린 8개의 세계대회를 모조리 휩쓸었다. 에어컨은 언제나 덜덜거리고, 대국 때면 거리의 번쩍이는 네온과 소음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야 했지만 그래도 이곳 관철동은 바둑꾼의 가슴을 자극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앞으로 바둑계가 얼마나 더 발전할지 알 수 없지만 관철동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 이상 따뜻한 팬들의 환호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문인과 철학자들, 애호가들이 곁에서 승부를 지켜봐주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수많은 문인과 철학자들, 애호가들이 곁에서 승부를 지켜봐주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이 마지막 문장. 이것이 바둑 정체성의 핵심이다. 바둑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을 때에는 바둑의 주변에 누가, 또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밝히면 된다.

 

 

3. 장소와 시간, 그것이 바둑의 생명을 이룬다

 

먼저 사진 하나 보자. 아래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 붙어 있다.

 

전일컵(全日盃)대회 전날 전남회관 스튜디오에서는 김인 8단과 조훈현 7단의 공개 시범대국으로 사상최초의 바둑 전야제를 가졌다.”

 


월간바둑 1978년 5월호 화보.

 

비록 어수선한 도떼기시장 같으나, 그러나 혼돈이라기보다는 생명력이 넘치는 축제라고 하겠다. 바둑의 성장과 생명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진이다. 사상 최초의 전야제라고 했지만 사실 어느 아마추어 대회를 가더라도 저런 풍경이 보통이었다.

 

저 사진 속의 풍경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그랬다. 장소와 사람, 그것은 언제나 인류의 주제였다. 과거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주제가 될 것이다. 우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시간과 공간 속의 여행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장소는 프로에게 생명의 중심이 된다.

 

1980년대 가장 큰 상금이 걸렸던 왕위전의 도전기를 살펴보자. 도전기는 어디서 치렀을까? 그리고 누가 이겼을까?

 

(1) 왕위전 도전기 대국 장소(1985-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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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89       1990-94     1995-2004

한국기원 대국실           2                24              35

여관, 호텔 등              24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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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 이겼나(1985-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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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90   조훈현

1991-1995   이창호(91) 유창혁(92-95)

1996-2004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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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대비된다는 것인데, 물론 장소와 성적을 인과관계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또한 지나친 이해일 것이다. 21세기 초 우리의 과학지식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자신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1)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989년엔 한국기원 주변에 있던 도전기의 명소 운당여관(雲堂旅館)이 도심 계획에 따라 헐렸다. 몇 년 후 경기도 남양주군 국립영화촬영소로 옮겨져 다시 재건되었는데, 그 운당이 바둑의 도전기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장소였다. 그리고 1994년엔 한국기원이 관철동에서 현재의 왕십리 주변 홍익동으로 이사를 갔다. (1)의 대국장소 변화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전기의 무대가 어디냐?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고 지금도 문제다.

 

(3) 도전기의 무대가 가져오는 차이 - 장소가 외따로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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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전기의 차이 - 내용에 호소력이 없게 된다

2) 뉴스로서의 가치 - 신문사 기자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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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도전기의 장소가 외따로 되면 전문기사는 물론이고 기자도 오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뉴스감이 줄어들고 심층적인 생동감도 사라진다.

 

앞서 말했듯이 관철동 한국기원은 조선, 동아, 중앙, 한국 등 큰 신문사와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1994년 이후 한국기원 측에선 신문에 왜 바둑뉴스를 다루지 않느냐고 가끔 푸념도 하는 거 같은데, 푸념해도 소용이 없다. 누가 신문사와 먼 거리, 주변에 술집도 다방도 부족한 거리까지 가겠는가. 바쁜 기자들이 말이다.

 

장소와 시간, 그것은 혼돈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이다.

 

바둑이란 것에는 승부가 아니라 승부가 이뤄지는 과정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과정 없이 이긴다? 그런 것은 없으며 이기고 지는 내용 없이는 의미 또한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사가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예외는 없다. 관철동은 시간과 공간의 스토리를 제공하는데 아주 적절한 곳이었다. 공간을 채우는 스토리. 현대인의 남는 여가시간을 다루는 기술로서의 정신적 공간. 그것은 여러 다양한 하위문화가 함께 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1(1967년의 국수전 도전기)

1이 좋은 수다. 다음 AB를 맞보는 급소로 좌측 백 두점의 모자와 같은 자리다. 제한시간은 7시간이었다. (1967년 제12기 국수전 도전1. 백 국수 김인 : 6단 윤기현)

▼ 제한시간 7시간 바둑. 김인-윤기현, 국수전 도전기

 

2(기회는 시간에서 오고 시간으로 흘러가다)

제한시간은 10분이고 40초 초읽기가 3개 주어진 바둑이다. 어디서 두었는가.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두어진 것이다. 눈부시고 어수선한 조명 속에서. 1이 실수인지 백4 이후 백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 제한시간 10분바둑. 이창호-김지석, 한국물가정보배 결승

 

4 이후 <2-1> 1일 때 백2 이하 백12까지 두었으면 흑이 졌을 것이다. 그러나 흑1 때 백은 실전에서 2가 아니라 A에 두어 아쉽게도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2009년 제5기 한국물가정보배 결승2. 9단 이창호 : 5단 김지석)

▼ <2-1도>

 

짧은 제한시간 속에서 실수가 많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1>보다는 <2>가 수준도 높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는 감동은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저 대국을 반상의 내용만으로 이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둑은 반상 흑1 착점이 아니라 그 이전 대국의 배경에서 먼저 출발한다. 그것이 대국이다. 반상 흑1은 첫 착점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돌의 흐름도 유행도 달라지기에 내용의 차이가 현저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도전기의 즐거움과 흥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주어지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며, 그 의미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활동하는가, 그것에 의존한다. 사진을 보자. 시대와 배경의 사진을 보자.


이창호-조훈현 사제대결. TV 대국(스튜디오)


이창호-조훈현 사제대결. 28기 최고위전 도전4국(운당여관)

 

   

위 사진 두 장은 서로 다른 공간이다. 다른 공간 속에서는 바둑의 내용은 물론이고 이야기도 달라진다.

 

아쉽게도 1994년에 한국의 바둑은 그런 공간을 스스로 던져버렸다. 물론 이미 1994년엔 한국기원 주변의 상황이 많이 변하여 유흥 술집이 늘어가는 등 바둑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기원은 보다 넓은 홍익동 건물이 아니라 좁더라도 도심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되었다.

 

한국기원이 이야기의 소재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은 바둑의 성장에 참으로 아픈 약점이었다. 관철동이 유흥지역이 되었다 해도 가능하면 그 근처에 있어야 했다. 신문사나 시인 묵객 등 이야기를 생산하는 중간 관리자로부터 멀어져서는 아니 되었다.

 

 

4. 홀로 존재하는 문화는 없다

 

20052바둑에 최백산 선생 인터뷰가 실렸다.(“한국바둑잡지사의 산증인 최백산”)

 

그가 67년 본지 창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수필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문인으로서 바둑을 어느 정도 뒀기 때문이었다. 기력은 7급 정도였지만 문인 중에서는 중상위급이었다. 그 당시 바둑글을 전문적으로 써본 사람이 희귀한데다 일본의 소식과 기보를 입수해 사용하다보니 일본어 번역이 필수적이었는데 그는 일본어 번역에도 능했다. ...

 

본지 초창기 시절 바둑용어가 정립되지 않은데다 인쇄활판의 자모(字母)가 부족하고 바둑필진이 적어 고전했다. 여기에 바둑자료가 적어 고민했다고 한다. ... 그래서 국사편찬위원인 김용국 선생을 찾아 호소한 끝에 위기사(圍棋史)를 연재하기도 했다.”

 

필자 선정과 자료의 발굴에서 장소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장소가 좋으면 한국기원은 월간지를 만드는 데 훨씬 힘을 덜 들일 수 있다. 내용도 좋아진다. 기원에 출입하는 문인들은 다들 자신도 모르게 참여하여 글의 기품도 올려준다. 좋은 바둑책 출판의 대명사인 현현각이 한국기원 5층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문인들이 스스로 만든 한돌기원이 한국기원 5분 거리인 청진동에 자리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불과 6평 기원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작가들 만남의 장으로 문인들이 자비로 만든 기원. 그런 모임이 한국기원 바로 옆에 있었다.

 

예전엔 금융, 법조, 언론인 대항전이 열리곤 했는데 그것도 가벼운 우연이 아니었다. 금융과 법조, 언론의 핵심 장소가 어디에 있던가. 바로 한국기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바둑열이 강하고 또한 많은 바둑인구를 포용하고 있는 법조, 금융, 언론계 중 각 그룹별로 강자들을 골라 8명으로 팀을 구성, 서로의 실력을 비교했던 19741월호 바둑에 실린 대국을 하나 보자.

 

3(언론인 첫 승리)

3단 장유석(국민은행 조사부대리) : 4단 서병현(동아방송 제1뉴스부장)

바둑을 보고 짐작해보자. 당시의 수준과 그 외 몇 가지.

▼ 한국기원 총재배 직장인바둑대회

 

좌상귀에서 큰밀어붙이기라는, 어려운 정석이 나왔음을 알겠다. 그러나 뒷마무리는 다소 부족했다는 것이 형태에서 드러난다. 1을 보면 두터움을 알고 있다는 것이 짐작되는데, 바둑을 오랫동안 두어온 힘이 있겠다.

 

5A도 좋은데, 여기 백5는 싸움바둑 지향적인 것으로, 역시 기원에서의 단련 없이 둘 수 없는 태도라 하겠다. 5 이후는 알파벳 순서로, E를 보면 흑 또한 기원의 수련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급소이기도 하지만, GF에 두어 먼저 자신을 지키는 태도를 뒤로 하고 공격했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

화초바둑을 넘어선 기원바둑이다. 기원바둑은 어디에서 오는가? 기원이라는 장소에서 온다. 기원바둑은 화초바둑과 다르다. 스스로 몸으로 배운 것이기에 세월의 무상에 흔들리지 않고 바둑에 지지를 실어준다. 그것이 기원바둑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대세가 있다. 신문 매체의 퇴조와 인터넷의 등장. 사회의 세대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의 하부구조는 60년대는 물론이고 90년대와 비교해서도 많이도 변했다. 사회의 바둑 유행은 이제 쉽지 않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취미가 바둑 못지않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한 것. 그 노력에는 인간과 사회의 이해가 개입되어야 한다. 바둑이라고 예외가 아니며 아니, 다른 어떠한 문화보다도 더욱 더 사회에의 이해가 바둑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충실에 필요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둑이란 것이 시간을 버리는 놀이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정신과 몸의 혼연이 필요한 놀이라는 것에 있다. 바둑은 또 사회 속의 놀이기에 사회를 이해하지 않고서 바둑을 넓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쉽다. 한국기원이 홍익동으로 이전한 것은 참으로 아쉽다. 홍익동에 가보시라. 몸에 주어지는 기운이 관철동과는 크게 다르다. 그래서인가. 그래서 이전 이후 10년도 되지 않아 스포츠로 정체성을 전향하는 계기를 얻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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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수꽁짱 |  2013-01-22 오후 12:49:2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바둑사도 변천이 심하군.  
高句麗 |  2013-01-22 오후 2:36:5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승부만 양산하면 반드시 대가가 온다 오늘날의 바둑쇠퇴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승부는 늘었지만 바둑문화는 많이 쇠퇴했죠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이 바둑을 접할 기회도 없고 컴퓨터게임 때문에 바둑에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이고 전채적으로 보면 한국기원의 경영미숙때문에 바둑인구가 줄어드는 것이라 봅니다  
高句麗 |  2013-01-22 오후 2:39:3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현재 한국기원에는 아마추어들이 이용하는 기원이 없더군요 그것 또한 프로기사와 아마팬들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한 것이 되기도 하고 조남철 선생님이 운영하던 방식과 지금 한국기원이 운영하던 방식과 비교하면 지금 한국기원이 얼마나 운영을 미숙하게 하는지 느껴지네요
정신이나 자세 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조남철 선생님에 비해 많이 떨어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바둑팬이 줄어드는거라 봅니다.  
하얀솔 |  2013-01-23 오후 4:50:5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1994년 이후 신문에서 바둑뉴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멀어진 이유는 한국기원(결승전 장소)가 신문사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강남구 도곡동에 있고 프로구단 서울 홈구장은 목동과 잠실에 있지만, 프로야구 소식들은 시시콜콜 신문에 실립니다. 놀이문화로서의 바둑이 경쟁에 뒤쳐져있기에 신문(언론)의 관심도 줄어들었습니다.  
하얀솔 |  2013-01-23 오후 5:00:3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결승전 장소로서의 적합성은 바둑팬의 접근성이라는 시각에서 따져봐야 합니다. 한겨울 백담사 결승대국처럼 도전기(결승전)의 장소가 외따로 되더라도 전문기사/기자들은 어떻게든 오긴 옵니다. 반면 바둑팬들은 아예 가볼 엄두도 안나겠죠. 바둑팬 입장에서는 이런 결승전은 호소력 없는 <딴 세상>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얀솔 |  2013-01-23 오후 5:12:0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과거 관철동은 시간과 공간의 스토리를 제공하는데 적합한 공간이었겠지만, 현재는 아닙니다. 종로2가 (관철동) 거리 성격이 현재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게 2002년 종로서적 폐업입니다. 종로서적은 단순한 대형서점이 아니었고, 지식문화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이런 종로서적의 폐업은 종로2가(관철동)이 더이상 문화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하얀솔 |  2013-01-23 오후 5:25:4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예전 금융/법조/언론인 바둑 대항전이 열릴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해당분야 바둑팬이 많아서이지, 한국기원이 금융/법조/언론 핵심장소가 한국기원과 10분 거리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요즘 20~30대 금용/법조/언론계 종사자 중에는 취미가 바둑인 분들 찾기 어렵습니다. 한국기원이 관철동에 그대로 있었다한들 금융/법조/언론인 바둑대항전 열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高句麗 |  2013-01-26 오전 7:10:22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물론 그것도 있지만 관심이 있으면 거리가 멀어도 됩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면 관심도 멀어지죠 가까운 곳에 있으면 한번 갈거 두번 세번 가게 되고 그게 관심으로 이어지고 먼데 있으면 열번 갈거 5번도 안가게 되고 그게 관심이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고 같은 값이면 거리가 가까운게 더 좋은것은 기본 상식이죠  
高句麗 |  2013-01-26 오전 7:12:3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리고 눈에 자주 띄면 자연히 관심으로 이어지고 먼데 있으면 그 만큼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관심이 없어지죠 그래서 사람이 자주 오가는곳 술집근처에 기원 연것은 전략상 좋은 선택이라 봅니다 그래서 장소가 중요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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