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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상의 경계: 철학과 감성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걸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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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상의 경계: 철학과 감성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걸까(1)
2011-04-27     프린트스크랩


착상의 경계(境界): 철학과 감성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걸까 (1)


들었다. 글과 뜻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며 안개처럼 모호할 때가 많다고 들었다. 그리 볼 때, 앞으로 쓰게 될 여기 이 글의 한계 또한 너무나 뚜렷하여 미리 아쉬움을 드러내는 것이 편하겠다. 그것은 글의 내용에서도 보인다. 예컨대 기억으로 머물던 것이 있었다. 대비(大飛)라는 표현과 관련된 것으로 이리 기억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중국에서는 이런 수를 대비(大飛)라고 불렀습니다.” 오청원이 검토실에서 다음 (기보 1)의 흑2를 보고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옛날에는 이런 수(법으)로 오씨에게 곧잘 당했다.”고 사까다와 후지사와(藤澤朋齊)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니, 오 9단은 “이미 지금은 그런 기운도 없어졌습니다.” 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기보1

기보1은 바로 그 장면도. 흑2(실전 흑37)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이다.

이상이 기억이었는데, 오늘 막상 책(“일본명인전전집 4”)을 찾아보니 대비(大飛)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청원이 그 개념을 사용했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책에서 본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런 글이 없었던 걸까. 좌우간 이 글의 기억과 설명의 신뢰성에 한계가 큰 것을 알겠다. 참고로 “현현기경”에 붙여진 “32자석의(字釋義)”에 보면, 오늘날의 날일자 행마를 비(飛)라고 하고 눈목자 행마를 대비(大飛)라고 불렀다.

다행히 논점은 “대비”라는 말에 있지 않으니, 좀 더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아마 이 글이 말하고 싶은 것은 착상에 대한 것이었나 보다. 수법의 모호함, 수법에 대한 안목, 착상의 배경, 뭐 그런 거.

다음 (기보2)의 백3은 어떤가. 오늘 인터넷 오로에서 관전하며 얻은 것인데 대단히 예리한 수법으로 맥점이라 불러도 좋겠다. “수법의 발견” 책에서는 이에 대해서 쓴 적 있는데, 아마 “날붙이기”에서 다루었던 듯하다.


  기보2

잠깐 두 기보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고 넘어가자. (기보1-1)과 (기보1-2)는 백의 응수에 대해 흑이 대답할 수 있는 적절한 그림이다. 


  기보1-1

(흑1은 평범한 착상. 아쉬운 것은 아래 위의 흑이 바쁘게 중앙으로 뛰어나가야 하는 과정에서 백은 자연스럽게 한칸 한칸 우변의 흑세력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흑이 불만이다.)



  기보1-2

(기보1-2를 보자. 흑이 두려운 것은 백3 급소로 붙여올 때이다. 여기서 흑에게는 좌상귀 흑을 버리는 착상이 좋다. 중앙과 우변이 대단히 넓어 이 그림은 흑에게 유리하다.)



  기보2-1

(기보2에 대해서도 잠시 쉬어가자. 기보2-1 흑1에 대해서는 백이 세력을 얻어서 충분하다.)



기보2-2

(기보2-2 역시 백으로서는 만족할 만한 그림이다.)


그런데 저 (기보2)의 백3은 과연 생각해서 얻을 수 있는 맥점인가? 아마도 저 수를 깊이 공부해두지 않았다면 실전에서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수법의 착상은 실력에 의해서 제한받는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런가. 그렇다면 수법의 이해가 부족한 하수의 경우에는 수법의 착상에 제한을 받게 된다는 걸까. 5급은 3급에 비해서 착상에 제한을 받을까. 3급은 2급에 대해서 역시 제약을 상대적으로 더 갖게 되는 걸까. 실력이 높을수록 착상은 다양해지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발상의 자유로움과 풍요는 구별해야 할 것이다. 또 착상의 깊이와 넓이가 실력이라는 변수에 의해서 대부분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착상”과 “수법”을 서로 달리 보는 태도에 우리를 습관적으로 얽매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두려움, 아쉬움이 없지 않다.

수법의 착상과 선택은 그 본질이 자유로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식의 자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이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자유”와 “미,” 그런 개념을 쓰면 인간에 대한, 역사에 대한, 사회에 대한 진실처럼 쉽게 인정받는 - 또는 인정해야만 하는 부담감을 갖는 - 그런 경향을 조심해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본주의적 입장에 서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경향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과연 인간은 그러한가. 어려운 주제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적어도 반상에서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우린 이 문제를 검토할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와 있는가.

그와 관련, 후지사와(藤澤秀行) 선생의 인터뷰를 하나 보자.

“단순한 승부만이 아니며 그 감정에 알맞은 수를 강구하는 과정이 바둑의 좋은 점인 동시에 소중한 점이라고 보고 있다.”

(바둑에도 리듬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둑 한판의 흐름이며 그 속의 수단이며 또한 기분의 움직임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바둑의 흐름이 빗나가면 아무리 좋은 국세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후지사와 선생의 경험에서 보면, 착상의 배경에는 반상의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바둑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리 말할 수 있을까. 보다 큰 배경. 뭔가 막연하게 다가오는 그 어떤 감정을 반상의 표현으로 바꾸어야 하는 그런 거. 잘 모르겠다. 그냥 철학이라고 할까. 선생은 조치훈과의 7번승부를 앞두고 “바둑의 철학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후지사와 선생의 안목이 곧 반상에서의 인간의 깊이에 대한 판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누가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 주장할지라도 그것이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그런 이해라고 말하기는 실로 어려운 것. 그건 그것이고 이건 이것이다.

여하튼 (기보1)의 흑2와 (기보2)의 백3은 수법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수법이란 것이 개인적인 요인에 의해서 크게 좌우되는 것인가. 기풍이나 대국 당일의 기분, 생활의 리듬, 뭐 그런 것들에 의해서 말이다. 삶의 철학, 대국의 비중, 바둑에의 의미 부여, 뭐 그런 거 등등.

아니면, 수법이란 것이 반상의 논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일까. 반상의 논리를 공부만 하면 개인차에 관계없이 누구나 도달하고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일까.

어떠한 배경을 뒤로 해서 우리는 수법을 착상하는 걸까. 궁금하지만 차근차근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 보자. 단, 이 글은 깊이 있게 논의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 인식이라는 것, 발상이라는 것, 그런 것들을 폭 넓게 다루는 전문가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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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령산 |  2011-04-27 오후 1:56:37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경계 =주변인=
잘 읽었습니다.  
하이디77 |  2011-04-28 오후 7:18:1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기본적인 바둑의 원리(돌의 모양 등)를 이해하고 나서야 행마도 나오고 사활도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밭전자 행마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옥집이나 버리는 수법을 통해서 서서히 이해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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