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가능한가

어느 순간 개안(開眼)하듯이 우리의 바둑 실력도 그렇게 늘 수 있는가?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다.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했을 그런 것. 물론 궁금한 것을 풀려면 논리가 있어야 한다. 체험이 덧붙여지면 더욱 좋을 것이고.

예전에는 그런 경우 있을 수 없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은 그로부터 벗어난다. 논거가 충분치 않을지라도 중요한 주제이기에 감히 예비적인 수준에서나마 살펴보고 싶다.

I. 안목과 자세

(사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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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은 된 이야기다. 전국적 지명도가 높은 어느 정치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매우 여유 있었는데 - 허리를 쭉 펴서 목도 반듯이 세우고 시야도 편안하게 - 아, 그런데 이 양반, 실력도 상당하지만 반상에 턱하니, 턱 턱 모자를 잘도 두신다. 약간 허풍기가 있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감각적으로 두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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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력이 있다고 할 것인가. 사회적 갈등에 대한 내외, 앞뒤 흑백, 그런 2분법에 익숙하고 또 갈등을 끌어내고 통합하는 그런 기술에 익숙해서 그것이 반상에 잘 드러난 때문에 모자도 잘 둘 수 있는 것이련가. 그런 의문이 한두 번 들었었다. 모자는 반상을 자르는 것. 별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오늘은 “과연” 하는 마음 잡혔다. 

그러하다. 자세는 안목과 관계가 깊다.

예를 들어보자.
몸을 꾸부리고 포석을 할 수 있나?
부분의 수상전, 사활에서 몸을 꾸부리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나?

태도와 반상안목, 수법 등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반상의 언어가 은유에 기반하고 있기에, 언어는 몸에 체화되고 있기에, 바둑 둘 때의 몸버릇은 자연스럽다. 버릇의 바람직 여부는 떠나서.

(사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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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의 일이다. 1975년 가을 마산 학초배에서 16강전에선가 바둑이 끝나갈 때인데, 다행히 승부는 이겼었다. 덤을 내고도 몇 집을 더 남기는 바둑. 그런데 상대가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 흑에게 찜찜한 곳이 하나 있는데 - 수가 날 듯 말 듯 하는 그런 형태를 지닌 부분 - 가일수 하지 그래. 답했다. 가일수 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후 상대가 - 수를 낼 수 있을까 하여 - 몇 수 두드려 보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물론 한 수 가일수 해도 이기는 바둑이었다. 관전자 한 분이 물었다. 왜 가일수 하지 않는가. 가일수하면 확실한데 혹시라도 수가 나면 어떡할려고 공배까지 다 메우는가. 답했다. 이 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대국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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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했다. “승부사”라는 것,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의식했었다. 그 과정에 들어서고 있었다. 의식적인 노력으로.

(사례 3) 小林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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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0기 명인전 2국 관전기에/ 종국 후 으레 하는 보도진의 감상질문에 조치훈은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羽田공항에서 小林과 같은 차로 돌아오는 길에 小林은 이에 대해 말했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제2국이 끝난 순간 벌써 다음 대국의 싸움이 시작됐으니까.” (p.60/ 조치훈이 이긴 2국)

2) 1986년 제10기 기성전 제4국에서 小林이 질문에 답했다.
  “패를 양보해도 승리는 확실한데 왜?”
  “한 번 양보하면 버릇이 되어 자칫 계속 느슨해지기 쉬우니까......”
  사실 3번기 이상의 경우엔 복기는 다음 대국의 시작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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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에게 승부는, 안팎이 없다.
그것이 갖추어야 할 태도.

그렇다. 반상은 마음의 호흡, 그 한 호흡에 달려 있다.
반상은 내면에 전해진다. 자신의 것이라 할 정심(定心)이 누구에게나 부족하니 반상을 다룰 인격이 하나 필요하겠다. 그것이 호흡. 그 호흡이 태도로 연결된다.

물론 이런 말은 표현하기는 쉽되, 그 실천은 대단히 지난한 일이다. 이 글은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는 그런 자신 못한다. 아니, 그 반대일 것이다. 그러니 조심스런 맘 드러내야할 의무감 느낀다.
이번 글은 이론적으로 맞다고 생각되기에 쓰긴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동안 이리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적 없다. 예전에 프로였을 때 그러지 못했다.

반상에 휩쓸리지 않는 거, 상대의 리듬에 잡히지 않는 거, 자신을 잃지 않는 거,
필요하다고 느끼긴 해도 실제 행하기는 어려운 것.

이런 말도 하고 싶은데 - 태도가 곧 자신감인가. 자신의 확인인가. 의식의 폭인가. 합리적 접근에의 길인가. 그러나 잘 아니 된다. 그 다음 논리가 이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느덧 글의 주제가 의식, 마음, 그런 개념 쪽으로 이어지기에 그러하다.

II. 응시와 거리감

바둑은 수법과 마음이 더해서 얻어지는 세계.

당연한 말씀이긴 한데 “마음”이란 단어가 역시 맘에 걸린다. 저 거북한 개념. 환원, 퇴행, 그런 거 없이 저 개념 다를 수 없을까.

마음이란 것을 다른 개념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보다 분석적으로 활용 가능한, 한 계단 낮은 구체적인 개념으로.

그 하나가 의식, 내면. 아니, 이것도 모호하다. 하하.

자, 좌우간 반상에서 내면의 문제가 모습을 드러내고 또 그것이 실제로 활용될 수 있는 비중은 과연 한 판의 바둑에 얼마나 될까? 그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종반에서야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닫힌 경계가 대부분의 상황이 될 터이니 그러하다.
물론 초읽기 속에서의 실수로 결정되는 경향이 짙은 요즘의 바둑에서, 집중력의 부족과 내면의 문제를 동일시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중반은 어떨까.

1972년 임해봉이 이시다 본인방을 맞아 3연패(連敗) 할 당시다. 제4국에서 임해봉이 반집을 이겼는데(5집이 덤으로 빅은 백승이었다. 이는 반집과는 다르긴 하지만...) 그런데 그 고비에서 그 4국을 이긴 다음에 임해봉의 술회가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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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방전에서는 4연패 했지만 명인전은 다르다고 새로운 각오로 대했는데 제1국의 빅패로 불쾌한 무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어물어물 3연패를 당했다. 이것은 이미 기분을 지나쳐 완전히 단념무드였다.

결과론이겠지만, 제4국이 풍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 바둑은 내가 좋았는데 도중에서 이상하게 만들었고 보통 때 같으면 결정타를 당했을 텐데 반대로 石田씨가 딱딱해져 놓친 결과였다. 이것이 행운이었다. 좌우간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패를 버티어 빅승했다.

이 1승으로 기분이 매우 가벼워졌다. 지금까지 石田씨에게는 반집패도 많이 당했으나 이긴 일은 한번도 없었다. 잔 바둑이 되어도 이길 수도 있다는 자신이 생겼고 또 연패를 막았다는 데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같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순간 이상하게도 시간 사용 방법이 서툴렀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 마음에 여유까지 생겼다. 그런데 4, 5국을 연승하자 약간 방어를 의식하게 되니 인간이란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나보다도 石田씨가 더욱 딱딱했던 모양이며 그 차아 전적에 연결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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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졌다. 이길 수도 있구나.”
“시간활용에 문제가 있음을 문득 알았다.”

여기 이 두 번째 표현이 문제와 답 하나를 동시에 던져준다.

시간활용에 문제가 있어 바둑을 질 수 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 무엇보다 들어오는 것이... 자신의 태도가 한 걸음 물러선 상태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실제로 임해봉이 얻은 것은 - 이 글이 바라볼 때 - 시간활용의 문제가 아닌 것이라고 본다. 임해봉이 얻은 것은 자신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능력을 회복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사실 - 명상의 여러 전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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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대한 고유한 해결책은 단지, 그것을 인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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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또는 의도에 깊이 묶이면 수단을 통괄하는 힘이 약해진다. 그것은 10초 바둑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10초 바둑을 두면 무의식적인 조건 반사에 걸린다. 내면의 컴플랙스를 다루지 못하고 그에 걸린다. 조건반사에 가깝게 된다.

그러나 인식할 수 있으면 - 물론 지나친 인식에의 노력은 그 자체가 또 덫이 될 수 있지만 - 무의식적인 조건반사 - 예를 들어 1수에 10초인 바둑을 둘 때 자신의 의식, 지향, 의도 등 그런 합리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 - 를 피한다. 전체를 볼 수 있다. 의식의 공간(場)을 넓힌다.

보통 우린 그 결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 표현한다.

잡혀있으면 마음이 무겁다. 집착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거.
그것은 초점이 잡혀있는 것을 의미하기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그 외 다른 것은 배경으로도 잡히지 않는다.
반면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는데 일단 잡혀있으면 그만큼을 더 다른 부분과 비교하여 더 잡는다. 그것만을 먼저 강조해서 본다.
만약 반상에서 집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가지게 되면 집이 자꾸만 크게 보이게 될 것이다. 중앙보다는 변과 귀로 눈이 가게 될 것이다.

시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인식.
그 인식을 알아채는 자아, 가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통찰.

물론 그 자아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다. “자아”라고 불리는 그런 무대, 그런 공간은 없다. 경험되지 않는다.

III. 반상이 넓다는 것과 의식의 확장

성적이 좋아질수록 반상이란 넓은 것이 된다. 왜 넓냐?

같은 반상인데 부담 즉 집착이 줄어드니 넓어지는 것이다. 만약 실력이 진보하더라도 집착이 강해지면 좁아지는 것도 순간이 될 수 있다. 왜냐.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한 걸음 물러나 보는 것은 매우 요긴한데, 그것이야말로 반상에 대한 집착을 덜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안목으로 반상을 보는 것에 속한다.
새로운 의미맥락으로 반상을 보게 한다.
그러면 수법도 달리 보인다.
수법의 가치만 달리 보여도 큰 차이를 가져온다. 반상을 다루는데 있어서.

입단 직후 반점(半點)이 느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것으로 일반적인 - 바둑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 현상이라 할 만한데, 그 이유는 심리적 위협이 사라진 때문일 것이다. 한 단계 넘어서면 그 전(前) 단계는 아래로 보이는 법.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명지대 바둑학과에 입학한 프로들 승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첫 해에는. 정체성(正體性)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개안과 관련이 있는 걸까.

물론 논리는 어렵다. 순서는 어렵다.

1) 이미 반점이 늘어 있었다.
2) 편하다, 안목 넓어진다, 그래서 수법도 넓혀진다.

순서가 있는 걸까. 둘 다 맞는 걸까.

좌우간 거리감을 두고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바둑에서도 이런 현상 있다.

시간은 공간적인 거리감으로 인식되는데,
그래서 초읽기에 몰리면 마음은 요동하고 실력은 불안정해진다. 거리를 통제할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정보의 처리 비용과 정확성, 그리고 시간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 그에서 추론해보면, 초읽기에 몰려서 두는 버릇이 들면 아쉽게도 뒷날, 쌓여지는 과거는 없다. 남는 것이 없다. 당연히 진보에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진보는 쌓이는 것.

실로 짧은 제한시간은 기사의 반상 나이를 단축시키는 방향으로 영향을 크게 끼친다.
공간적인 거리감을 얻을 수 없을 정도의 시간 제약 속에서 지각과 의식은 지향성을 잃어버린다. 의지가 활동할 여지가 줄어든다. 의지, 그것이야말로 기사의 생명력.

중국(대만이던가?)에서 초읽기의 연장 대신에 벌칙을 부과하는 규칙도 있는데, 이는 일리가 있는 방책이다. 시간의 사용권을 개인에게 최대한 부여해준다는 입장이라면 말이다.

초읽기에 부정적인 입장에는, 그것이 기사 개인에게 독이 된다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인내를 배울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인내는 프로의 덕목. 반상 승부의 핵심. 내면과 반상을 이어주는 고리. 시간을 지켜볼 힘을 빼앗긴다는 것은 고통을 증가시키는 일.

IV. 이론과 통찰

올 봄. BC카드배 결승 5국 이후 이세돌 9단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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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은 원래 내가 이상하고, 중반은 사실 맞추기 힘든 부분이다. 꼭 내 바둑이나 구리 바둑이 아니더라도 맞추기가 힘들다.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초반을 보완하고 싶다. 최근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지 가끔 덜컥수가 나오는데 이 부분도 고쳐야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중반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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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을 바라보는 ”관점” - 바로 그 이야기에 눈이 갔다. 요컨대

1) 내면의 안개 하나 걷히는 거
2) 관점의 변화

이 두 가지는 서로가 밀접한 것으로 집착에서 하나 벗어나는 거, 관념에서 하나 자유로와 지는 거, 자신을 한 걸음 물러서는 거, 그런 거와 가깝다.

안목 하나 넓혀지면 그 만큼 자유로와진다. 강해진다.
"관점“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던말던 - 좌우간 - ”나아졌다,“ ”관점,“ 그런 용어를 쓰는 자체가 이미 넘어선 거, 넘어서기 그 ”前“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을 말해준다.

다음의 술회도 바로 그런 점을 강조한 것으로 - 그렇게 읽혀진다.

小林光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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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부터 바둑을 놓아보기를 좋아했습니다.
道策선생, 秀策선생, 丈和선생. 그 밖의 여러 선생의 바둑을 놓아보고 있으면 기력에 상응하여 점차 그 선생들의 마음을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는 일종의 삼매경이라고나 할까 완전히 무아의 경지가 되어 道策선생이나 秀策선생이 한수 한수에 은밀히 얘기해주는 듯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물론 오청원선생이나 坂田선생의 바둑도 놓아봅니다. 이분들은 나도 대국한 적이 있습니다만 보다 생생한 음성으로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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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거. 이거야말로 정말이지 귀한 재능이요 좋은 공부방법이다. 물론 어려운 일. 의식의 장(場)을 넓히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자, 이제
질문할 때가 되었다.

문득 “아, 그런가” 그런 것이 올 때가 있을까?
있다면 그 시기는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
그러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때가 당연히 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 하셨을 것으로 본다. 다만 그런 경험이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적절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고 학습되지 않은 때문에 그런 경험의 가치를 잊었을 수 있다.

반상은 그런 경험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세계이다.
왜냐. 형상의 목소리가 강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인 형상, 그 이미지의 그림자가 강하게 반상을 배회하고 있는 곳이다. 기호만의 논리로 지배되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형상의 언어가 강하다는 것 외에, 이론적인 이해가 반상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이론적 이해는 기억이나 반복되는 학습과는 크게 다른 세상이다. 기억만으로는 본능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저항을 이겨내기 쉽지 않다.

왜 그런가.
반상의 어떤 측면이?

1) 한 판의 바둑을 돌아보면 우린 의외로 많은 심리적 저항을 품고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뭔가 하기 싫은 것이 있다. 예컨대 끊는 것. 그러나 그 말고도 많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러나 또 서로가 비슷한 케이스를 갖고 있으리라 본다. 그 중의 하나는 모자 씌우는 것.

모자는 어렵다.
모자는 자신도 공중에 던져지는 것. 연결되지 않는 것. 불안이 배경에 도사리고 있다. 컴플랙스라고 하는 정서적인 돌출(또는 저항)과 비슷하다.
“넘어서야 한다”는 그런 의식적인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넘어서기는 매우 어렵다.

맥점 하나 하나 닦아가면 분명 수법은 쌓인다.
포석의 이치 하나하나 배우면 실력은 진보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모자의 수법을 자연스럽게 얻지는 못한다.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반상이란 무엇인가?”
그 이해로부터 모자의 힘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래야 소화가 된다.
먹는 것, 대개의 경우 그것은 문화적인 문제이지, 자연의 논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먹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둑에서도 수법을 하나 하나 소화시키려면 먹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은유가 강하게 요동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2) 먹는 훈련을 이야기 했으니 이제 한 걸음 더 실전적인 현실적인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겠다.

그것은 반상의 안목을 구별하는 것이다.
수법을 구별한다고 해도 된다.
광의의 수법.
맥도 수법이고 세모와 네모를 이해하는 것도 수법이다.

반상에서
수나누기, 두터움, 신포석, 세력, 19줄의 의미, 무거움과 가벼움.

그런 것들은 “문득” 바둑이 늘려고 싶은 사람에게 대단히 요긴한 수법의 범주에 들어간다.

반상이라는 모호한 세상에서 안개를 걷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시야를 밝혀주고 넓혀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런 맘 문득 찾아올 때 - 공부를 해서든 또는 우연히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진실이든 - 우린 행동의 변화를 갖게 된다. 행동의 의미가 변하기 때문이다.

바둑에서도 그러하다.
바둑의 배경이 되는 개념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가능하다.

하루밤새 기력이 성장 가능한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았다. 설마하니 왕적신이 실제로 하룻밤새에 그리 강해졌을 리가!
그러나 가능하다. 이론적인 이해를 통해 반상에 대한 안목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마음 먹기가 어려움을 느낀 적 있었다.
"한 수 한 수 늦은 듯 따라가도 충분히 승부가 된다.“
승부를 멀리 바라보고자 할 때 대단히 필요한 안목이라 하겠는데 문제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 하나 갖기가. 
그러하다. “반상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그런 이론적 이해 없이 한 판의 바둑을 두어가는 것, 그 실천은 대단히 어렵다. 그런 이해 없다면, 인내와 끈기로 승부를 이어가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의식은 구성되는 것. 그러므로 반상에서도 우린 의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언어. 지평의 확장은 의식의 구성 요소를 - 특히나 언어 - 폭 넓게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