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의 정의(定義)와 언어의 다양성

I. 은유와 상징

그 동안 반상의 주된 언어를 은유로 보고, 그 은유적 속성을 단초로 해서 이것저것 이야기했는데, 앞서 밝혔듯이 전공도 아닌 영역을 건드려서 부족함이 적지 않다. 상징 이야기도 그랬다. 상징을 다루는 방식과 그 개념 정의는 대단히 다양한데 - 철학은 물론이고 심리학과 인류학, 종교 등 - 철학 하나에서만도 개념 정의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이해 중 어느 것이 반상의 본질에 잘 들어맞는가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다. 그러니 상징에 대한 정의 하나 없이 논의에 들어간 것은 무식의 소치였다. 그러나 은유적 언어를 이야기해야만 했고 기호적 수준에서의 이해를 - 맥이나 행마, 급소 등의 이름으로 - 반상에서는 피할 수 없으니, 그 상대적인 개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상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런 측면이 반상에도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드러낸 것은 그래도 의의가 없지 않다고 본다.

부족한 것은 누군가 메워주시리. 철학이나 문학, 예술 등 상징을 깊이 다루는 분야에서 반상의 상징적 측면을 잘 밝혀주는 글을 하나 써주시면 좋겠다.

뛰어난 학자들은 다루는 솜씨가 다르다. 주제를 다루는 솜씨만 보아도 - 굳이 책의 내용을 보지 않아도 - 그 경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인상 처음부터 안겨주는 아름다운 글 하나 드리고 싶다. 상징에 대한 인식론적 논의 들어가기 전의 글인데, 과연 저자의 식견을 예견케 한다.

A. N. Whitehead의 “상징활동: 그 의미와 효과” 중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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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워싱턴 시의 의사당 건물을 마주하고 있는 워싱턴 기념비를 보기 전에, 그리고 버지니아 주 경계를 넘는 경험 - 영국인으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 을 하기 전에 쓴 것이다.
영어권 세계 전체에 낭만의 상징으로 통하는 버지니아, 영국의 낭만주의 시대에 영어권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인물이었던 월터 랠리 경이 영어권 세계 속에 끌어들였던 버지니아, 그 기원에 충실해왔고 낭만으로 그 역사를 흠뻑 적시고 있는 버지니아.
낭만은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월터 랠리 경은 그의 낭만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낭만은 땅바닥을 소리 없이 기어다니는 일이 없다. 그것은 워싱턴의 기념비처럼 위를 향해 내닫는다. 땅과 푸른 하늘을 이어주는 한 가닥의 은빛 줄기.       1927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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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의 半의 半만 이해해도 얼마나 안목이 경쾌할까. 수학자여서 그런지 사변적인 표현 없는 글인데, 그래도 글을 읽으면 건조하지 않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인상 온다. 간결함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없는 탓일까. 이미 “간결”이라는 그 단어에서 충분히 우린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느끼기 때문일까. 그러면 “간결”이란 단어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참고로 기념비는 나무와 다르지 않다. 하늘과 땅을 잇는 세계의 중심축. 앞서 이 글 어디에선가 이야기했던 나무 은유의 하나. 아. 참. 이 인용문의 출처는 출판사 “동과서”에서 2003년 펴낸 “상징활동: 그 의미와 효과”(p. 5.)로, 문창옥님이 번역하였다. 감사드린다. 
  
이제 이 글이 반상의 언어와 관련되어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한 듯하다.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넘기는 것, 그것은 어렵지만 인정해야 하는 것.

오늘은 그래서 핑계를 먼저 하고 시작하겠다. 오늘 글은 딱히 뭔가를 매듭짓겠다는 욕심으로 쓰는 글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시론(試論)에 속하는 글도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 반상 언어의 복잡함에 대해서, 모호함에 대해서 약간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을 듯해서 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맥”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실로 맥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저번 글에서 “맥의 정의를 너댓 개 만들었다,” 그리 이야기했는데 처음에는 쉬운 줄 알았다. 아, 그런데 문득! “이거 무지 어려운 주제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문은 당연하다.
“맥”이 무엇이냐? 그에 대한 만족스런 답을 할 수 없다면, 우린 대체 바둑을 둘 때 “맥”을 어떻게 다룰 수 있나?

그 한계는 실로 아쉽다. 그럼에도 그런 한계가 있다는 그 사실 또한 바둑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웅변하는 사실이라고 하고 싶다. 바둑은 쉽지 않다. 바둑은 단순한 놀이가 아닌 것이다. 바둑은 충분히 “바둑문화” 그런 표현 받을 수 있는 세계이다.    

II. 맥(脈)의 정의 기준으로서의 형상과 증명

앞서 이런 개념들 다루었다.

은유. 형상. 마디(節)은유. 나무 은유. 좌우(左右)는 반상의 조건. ... 

그런 개념들을 이리저리 다루다 보니까 이쯤에서는 맥(脈)에 대해서 한 번은 다루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가. 맥에 대한 그 동안의 정의(定義)가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글이 예전에 사용했던 정의도 역시 별로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맘 들었다.

애초에 이 글이 가졌던 맥의 정의는 다음과 같았다.

맥의 정의 (1): 어떤 수법의 결과가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증명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 수법을 맥이라고 부른다.

틀린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대단히 불만족스럽다.
왜냐.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바둑은 시각적인 게임. 그런데 시각적인 인상을 하나도 주지 않는 그런 개념 정의, 과연 바람직할까. 그럴 리 없다. 반상의 본질을 쉽게 드러낼 그런 정의가 아니면, 비록 깨끗한 정의라고 하더라도 그 정의는 흠이 없을 뿐이다. 흠이 있더라도 발전적인 정의, 반상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그런 안목이 깔린 정의, 그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얼마 전 글에 이런 정의도 했었다.

맥의 정의 (2): 반상의 설명 중에서, 형상의 부적절한 점을 드러내는 자리,
             그것을 맥이라 하자.

역시 흡족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 정의(2)가 정의(1)보다는 낫다. 반상의 시각적인 측면을 강조해서 인상을 잡아두는 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맥(脈)이란 글자는 무엇을 나타내던가.
기억으로는 -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 지류(支流)를 일컫는 것이었다. 강 하류(下流) 바다 접하는 곳에서 흐트러지는 세류(細流)들. 그런 이미지로 우리 몸에 수많은 맥이 있다. 요가철학에서는 우리 몸에 3만 6천, 또는 7만 2천 개의 맥관(脈管)이 있다고 말한다. 바둑에는 얼마만큼의 맥이 숨어 있을까. 수 만 개? 그 이상일 것이다.

III.  맥(脈)의 정의를 내리는 기준은 하나가 아니었다

      1도 (형상의 부적절한 점을 드러내는 자리)

1도에서 백1과 백2는 모두 흑돌의 취약점을 그대로 밝히는 자리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만약 저 자리를 흑이 두었다면 흑돌의 형상이 대나무 마디 잘 이루어진 인상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는 나무가 좌우로 균형을 잘 잡고 있어 기울어지지 않은 그런 시각적 이미지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아래. 흑3과 흑4가 그 자리.

      2도 (형상을 무너뜨리긴 하지만)

그러나 2도에서 보듯, 맥은 맥이되 - 하변 흑2나 상변 흑6 - 1도만큼 그렇게 뚜렷한 이미지를 주지 않는 맥도 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맥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할 지도 모르겠다. 그럴 것이다. 흑백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정적(靜的)인 이미지를 얻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만약 2도와 같은 종류의 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앞에서 본 맥의 정의는 부족한 거 아닐까? 그 중에서도 두 번째 정의(정의2).
그러하다. 충분치 못하다. 그럼에도 형상을 기준으로 하는 맥의 정의는 상당한 힘 발휘함은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두점머리 두드리는 것은 맥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석점머리 두드리는 것도 맥에 속한다.

      3도 (두점머리 두드리고 석점머리 두드린다)

어떨까. 여기 3도는 과연 백돌 마디의 - 부러뜨리지는 못하더라도 - 부절(不節)함을 드러낸다. 제한한다. 공배가 메워져 있어 백은 괴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4도 (귀보다 중앙에서는 두점머리 석점머리가 훨씬 아프다)

다른 예도 들어보자. 4도는 같은 두점머리 석점머리라도 중앙으로 가까이 갈수록 마디의 고통이 큰 것을 보여준다. 변이라는 땅, 또는 언덕의 안정감을 얻지 못해 수직선(垂直線)의 불안감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기둥이나 나무는 균형을 잡지 못하면 - 한쪽으로 쏠리면 - 불안하다. 실제 반상에서도 그 영향은 절대적이다. 거의 틀림이 없다.

저번에 예를 든 것인데 5도와 같은 경우는 어떤가. 맥일까. 아닐까.

      5도 (맥일까, 저 백3은)

5도에서 흑2는 3에 두어야 했다. 그래야 네모가 완성되어서 좌변 흑은 안정되고 안전하다. 여기 백3을 맞으니 흑 전체가 흔들린다. 불안하다.

여기서 하나의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6도와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6도 (이런 경우는 그 동안 맥이라 말해왔다)

6도에서 백1은 흑의 모양을 우그러뜨리는 수. 흑을 두모로 만드는 맥점이다. 그러하다. 이 경우는 분명히 “맥점”이라고 불렀다. 저 백1을.

5도와 6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5도는 아직 모호한 경계에 들어가 있는데 반하여 6도의 흑은 형상이 분명한 경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일 것이다.

만약 상대를 불안정하게 몰아가는 것을 맥점의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면, 5도 백3이나 6도 백1은 모두 맥점에 속할 것이다.

안정이란 무엇인가. 세모와 네모로 형상을 이룬 것.
불안정이란 무엇인가. 두모로 형상을 이룬 것.
그러나 안정과 불안정은 역시 모호한 개념이다. 안정과 불안정은 한편으로 심리적인 것이기에, 5도는 아직 불안정하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안정과 불안정은 맥을 정의하는데 충분한 기준은 아닌 듯하다. 5도와 6도의 차이를 넘어서서 그러하다.

그 동안 나온 바둑책을 돌아볼 때, “안정이냐 불안정이냐” 그 기준보다 상대의 응수가 분명해서 증명의 수준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가든가, 또는 이득을 보는 거, 그것을 맥을 정의하는 기준으로 - 암묵적으로 - 삼고 있는 듯도 하다.

5도는 형상이 뚜렷하지 않기에 비록 백3이 흑의 안정을 무너뜨리는 급소임에도 불구하고 - 5도와 같은 경우에 - “맥”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본 적이 없다. 급소라고만 했다. 어느 누구도 저 5도 백3을 맥점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반감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모두 합의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 그러면 증명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되므로 - 그 형상과 관련해서는 맥점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을 것인가. 과연 그리 이해되어 왔던가?
만약 그리 이해되어 왔다면 그 형상은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꼭 그렇지만도 아닌 듯하다. 다음 7도를 보자.

      7도 (백2 흑3은 “2의一”의 급소인데 맥이라고도 부르고 있나)

7도 백2 흑3은 맥점인가?
맥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흑3과 달리 백2의 경우엔 형상이 분명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답은 우리가 알고 있다.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확정한 답. 그러나 우상의 경우 좌하에 비해서는 형상이 거의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갈등의 초점은 공간이 너무 넓다는 점에 있다.

“2의一”의 경우 형상이 일반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답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형상이 일반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지는 답에는 “2의一” 외에도 “1선의 묘수”라든가 “좌우동형 중앙” 등이 해당된다.

      8도 (좌우동형 중앙이 급소/ 이것도 맥인가)

8도에서 백1은 맥으로 알려졌는데 흑2도 맥으로 분류되나? 맞보기의 맥? 그런 표현 있나? “맞본다”고 쓰인 것은 보았지만 “맥”이라고 쓰인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있을 법한데, 확실치 않다. 맥을 노리는 수법이라고 말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적당할까.

형상과 증명을 아울러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형상으로 표현되는 맥은 그 사례가 하나에 그친다. 일반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반상의 위치 - 1선의 호구, “2의一” 등 - 에 의해 표현되는 맥은 그 사례가 다수가 된다. 주변의 돌의 형상이 조건으로 작용하는데 그 형상이 다양해서 사례가 한 둘이 아니게 된다. 예컨대 다음 9도.

      9도 (1선 호구의 급소는 형상이 정해져 있지 않다)

만약에 형상이 굳어져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동안 맥이라고 불러온 것이 적지 않다면, 그거은 우리의 동의(同意)가 형상과 증명 못지않게 중요한 기준이 되어 왔음을 시사한다. 다음 10도가 그런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10도 (흑4를 맥이라 부르는 데는 누구나 동의)

10도는 2000년 제4회 응씨배 8강전 요다(백)와 이창호(흑). 흑4(실전 흑153)가 묘착이었다. 흑A 백B를 하기 이전인 지금 두는 것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찝는 맥”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조건이 그야말로 드문 거의 나오지 않는 장면이기에 과연 “찝는 맥” 범주에 집어넣어도 좋을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맥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형상이나 증명도 중요하지만, 그 수법이 사회적으로 모두에게 동의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처음 등장하는 수법도 맥점이라고 부를 때가 있다.

묘한 수단을 맥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걸까. 그것이 폐쇄된 상황에서의 사활묘수풀이에 관련된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맥은 두 개의 큰 조건을 전제해서 다루면 무난할 것이다.
1) 일반화된 수법
2) 일반화되지 못한, 단지 묘한 수법

그러나 이 경우엔, 특히 일반화되지 못한 사례의 경우엔, 범주를 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이를 것이다.

“기경중묘” 등 일부 고전을 보면 “건너가는 맥”의 주제가 있고 “끊는 맥”이라는 주제도 있다. 그런 제하(題下)에서 여러 가지 수단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범주에 들어가는 수법들은 일반화되기 힘든 것들이 많은데, 이러한 관행이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맥의 외연을 정하기가 힘들었다는 점을 증거하고도 남는 듯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잠시 요약하자. 표1은 그 동안 맥을 정의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 있었음을 알려준다. 하나는 분명하다. 의도를 기준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확실히 맥은 그 결과가 분명한 것을 기준의 하나로 삼았음을 알겠다. 그래서 “자충의 맥”과 같이 착수의 결과 드러나는 조건을 기준으로 맥을 규정하는 것도 가능했다. 아니, 이 “조건”이라는 것도 “결과”의 일부인가. 잘 모르겠다.

표1. 맥을 정의하는 기준이 여러 가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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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상을 기준으로
   상대 돌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두점머리, 두점의 배붙임
   자기 돌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이단젖힘
2. 반상의 위치를 기준으로/ 1선에 묘수, “2의 一” 
3. 결과를 기준으로/ 건너는 맥, 끊는 맥, 후절수
4. 조건을 기준으로/ 자충의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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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기준이 다양한 사실은 반상(발전)의 본질을 말해준다

이토록 다양하고 기준이 일관되지 않으니 그 참.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당연하다. 이 글도 투덜거린다. 뭐야, 이거. 이리도 복잡하다니 하고. 글의 불만은 자신이 깔끔하지 못하다는 데에서도 온다. 간결해야 아름답고 힘도 있는 것. 그런 오래된 - 냉정하게 보면 편견의 여지도 적지 않지만 - 희망을 왜 아니 갖고 싶겠는가.

      11도 (백1은 맥인가)

11도를 보자. 백1은 맥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흑2 이하는 성립되지 않기에 말이다. 백5가 유명한 맥. 그러나 백1을 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흑이 흑2 이하를 아니 두니까 그러하다. 맥(백5)을 잠재태(潛在態)로서 갖춘 백1이지만 당장 흑이 손해를 아니 보면 맥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이 관습.

형상이 다양한 것에 속하지만 우리가 쉽게 수긍하는 맥 하나는 장문의 맥. 수없이 많은 장문의 급소가 있다. 아주 어려운 것은 프로도 찾기 힘든데, 좌우간 - 좌우를 막아서, 아니다. 좌우를 막는 수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 장문의 맥이라 부를 수 있는 다양한 형상 즉, 사례를 적어도 수 십 개 이상 제시할 수 있다.

코붙임의 맥이라 불리는 것도 그 형상으로 볼 때 10개 가까이 서로 다른 것이 기억난다. 어떤 것은 일반화의 여지가 높지만 어떤 것은 아주 낮다.

이 정도로 다양한 기준과 정해지지 않은 형상에서의 답이 맥으로 불린다면 과연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것을 통일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버릇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세상의 의미는 쉽게 찾아진다. 의미가 얻어지면 질서감은 더욱 쉽고 삶은 불안하지 않다.

그렇지만 통일보다는 상대성, 그런 이해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매우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 중에서 카시러(E. Cassirer)의 안목을 하나 드리면, “정신적 창조활동의 ... 모든 형식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자신을 위해서 이를테면 어떤 특정한 감성적 기체를 창출하는 것에 의해서만 자신에게 적합한 독자적인 파악양식과 형태화의 양식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세계와 신화의 세계도 각각이 제시하는 감성적으로 파악 가능한 특수한 형상의 세계가 전부인 것 같다.” (“상징형식의 철학, 제1권: 언어,” p. 49.)

이 시각에 의하면, 바둑은 바둑의 세계를 가진다. - 다른 세상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 즉 “자신에게 적합한 독자적인 파악양식과 형태화의 양식을” 가진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그건 따로 다루어야 하겠지만 이 글은 바둑의 “독자적인 양식”을 은유적 언어를 중심으로 파악하려고 했었다. “감성적 기체”는 상징이라는 개념에 미루고.

독자적인 양식, 그 점을 귀하게 여긴다면 세상에서 답을 지나치게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 것도 좋을 듯하다. 좋은 태도다. 괜찮은 실존적인 태도라 하겠다. 바둑에서 맥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맥의 속성에 대한 “기준”이 다양함을 인정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양한 이해의 틀(式)이 존재한다는 것이야말로 바둑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참이고 또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그래도 묻자. 다양한 이해의 틀(式)이 다양한 발전 경로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다양한 발전 경로가 다양한 이해의 틀을 가져왔던가?
왜 그리도 복잡하여 정의(定義) 하나도 다루기 힘든가?

맥에 한정해서만 그 원인의 일부를 생각해본다.

1) 형상의 언어와 증명의 언어가 뒤섞인 까닭.
2) 맥에 대한 정의가 일찍이 없었던 까닭.(노력 부족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도 오늘
   이 글처럼 한계를 크게 느꼈던 때문일 수 있다.)
3) 맥과 묘수의 구별이 부족했던 까닭.(이 또한 반상의 속성 때문에 그럴 수 있다.)
4)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까. 일본과 중국을 비교해볼 때 
   a) 바둑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달랐다. 계가방식의 차이가 그 예가 되겠다.
   b) 패러다임이 달랐다.
   c) 반상을 바라보는 안목에서 중국은 바둑을 다른 세상 - 예컨대 전쟁 - 에 유비해서         규정하려는 태도가 강했던데 반해, 적어도 17세기부터 일본은 설명과 묘사를 구별할        수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바둑의 발견2”에서 다루었다.)
...

이는 쉽게 인정할 만한 그런 요인들이라 하겠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그 참. 승부만 다투지 않는다면 굳이 기호로 귀착되는 형식을 밟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러면 “맥”이라는 주제는 없어도 될 터인데.

V. 다양성과 모호함은 자유와 상상의 조건

아쉬운 점도 적지 않겠지만, 바둑의 언어가 은유에 힘입은 바 크다면 우린 반상의 언어를 - 기술적인 측면에서 현재의 수준에서는 - 그냥 인정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닌가도 싶다.

반상에서 형상을 다루는 언어는 그 자체 이미지의 힘이 큰데, 만약 이 이미지를 모호하다는 쪽으로 오해하고 또 판단해서 보다 뚜렷한 형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한다고 해보자.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바람직할까? 이미지의 힘이 큰 언어를 - 예컨대 象形文字인 漢字 - 관계의 힘이 강하기에 논리에 강한 굴절어(i.e. 영어, 독어)로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 다양한 언어가 하나의 국가 속에서 함께 쓰이는 예를 생각해보면 답을 얻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맥의 정의를 다양한 상태로 두는 것도 바람직한가? 그럴 수 있겠다.
무엇보다 반상이 1) 기호와 상징으로 대별되는 속성을 둘 다 가지고 있으며 2) 증명의 언어, 형상의 언어, 이론의 언어가 뒤섞여져 사용되어 온 것이 현실이기에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양성과 모호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반상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아니, 가능성 정도가 아니다. 당장에 좁아질 것이다.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모호한 반상을 붙잡기 위해 상징적으로 인식되는 의미를 얻어야 하며, 또 그것을 은유적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 경계는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할 때 어느 하나의 정의, 그것도 기호에 속하는 맥의 정의가 증명의 언어와 형상의 언어가 뒤섞인 상태를 기초로 해서 얻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맥의 정의가 명료하게 드러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러면 이 글은 맥의 정의를 그냥 뒤로 물려둘 생각인가?
그러하다. 이 글의 앞에 정의를 두 개 제시하였었다. 그로써 멈출까 한다.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다. 의미를 잡아채는 것은 실로 의미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과정. 정의(定義)란 무엇인가. 그를 먼저 돌아봐야만 하겠다.

쉽지 않은 일. 어려운 일. 그랬다. 예전에도 바둑의 용어 정리 노력은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용어의 정돈에 가까운 것이었지, 용어를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이해하고 범주를 정하느냐? 그에 대한 연구는 다소 부족했던 거 같다. 반상 용어의 본질을 다루지 않고서 사전적(辭典的)인 수준에서 정리하지 않았던가 한다.

반상의 언어는 쉽게 통일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인위적으로 통일할 필요도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반상의 언어를 만들어 왔던 문화 자체가 이미 한 둘로 좁혀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념의 외연을 자칫 함부로 설정하다가는 반상의 생명력인 상상력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